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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절대적이다.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고백이다. 행동은 약속할 수 있으나 감정을 약속할 순 없다는 니체의 직관도 이어진다. 인간성의 바닥 모를 심연을 들여다보아서일까.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는 이성을 불신했다. 19세기를 무대로 한 음산한 예언이 지역감정의 망령으로 21세기 우리의 총선을 떠도는 풍경은 을씨년스럽다.

“지역감정 발언자들은 오히려 비판받기를 즐긴다. 비판받으면 지역이 되레 뭉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유력 일간지 한 편집국장의 증언이다. 지역감정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를 웅변해준다. 영호남 말만 나와도 귀가 쏠리는 사람들이 있다.

행여 `고향'과 관련한 비판이 나오면 감정 밴 반발을 보이기 일쑤다. 그 칠흑의 공간엔 이성의 빛이 내릴 틈이 없다. 사회운동가들과 지식인들도 예외는 아니다. 지역감정이라는 캄캄한 심연엔 쉬 눈먼 모습을 보인다.

물론 오늘 지역감정에서 자유로운 정치세력은 없다. 민주당·한나라당·자민련·민국당 모두 지역정당임이 틀림없다. 진보정당이 고전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여기에 있다. 그만큼 지역감정은 한국정치의 냉엄한 현실이다. 바로 그렇기에 지역감정을 관념적으로 비판만 할 일은 아니다. 이번 총선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듯이 지역감정을 내놓고 부추기는 정치세력이 실존하기 때문이다.

누구인가. 총선연대가 낙선운동 대상자로 꼽은 부패·비리·반민주 인사들이다. 툭툭툭 지역감정이 불거진 발단도 김종필씨의 충남 부여 발언이었다.

더구나 그는 사실까지 왜곡했다. 지역감정의 원인이 5·16쿠데타 세력의 호남차별정책에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 모두 솔직할 필요가 있다. 더러는 그 차별이 사람됨됨이로 이어지는 야만이 저질러졌다. 수도권, 영남 중심의 개발과 인사차별이 한 세대 이상을 지배해 온 까닭이다.

문제는 누가 수혜자인가에 있다. `영남패권주의' 라는 말에 영남인들이 불편할 것은 당연하다. 영남을 근거지로 한 재벌이나 장·차관 등 권부로 줄달음친 자들은 말 그대로 한줌도 안 되지 않은가. 사실 영남이든 호남이든 민중이 소외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더 큰 문제는 소외당한 사람들이 뭉치는 것을 지역감정이 가로막고 있는 점이다. 호남보다 2.5배 많은 영남에서 선거 때마다 지역감정으로 여론을 물들여 기득권 체제를 지켜온 것이 영남패권주의의 실체다.

그 점에서 영남 민중 또한 영남패권주의의 피해자다. 민중을 지역별로 조각내 기득권을 지키려는 수구세력의 `분할지배'는 파탄을 맞기도 했다.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이 그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개혁 없이 그 위기들을 넘긴 `무기'도 지역감정이었다. 지역에 기댄 정당들이 천박한 정치를 일삼아 온 배경이다.

다만 보안법 개폐와 남북화해, 그리고 재벌개혁에 의지를 보이는 정당과 그 모두에 부정적인 정당의 차별성까지 애써 무시할 이유는 없다. 더구나 진보정당을 지지하지도 않으면서 기존 정당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이 혹 지역감정에서 빚어진 것이라면, 그야말로 지역감정 수혜자들의 노림수가 아닐까.

엄정히 물어야 한다. 누가 오늘 지역 감정을 부추기는가. 정책대결로 당선이 어렵거나 당세 확장이 힘든 수구정치인들이다. 총선 뒤 언론개혁 바람이 불까 불안한 수구언론인들도 가세한다. 짐짓 지역감정을 비판한다면서 은근히 조장하지 않은가.

낙선운동에 끈질기게 음모론을 제기했지만 근거없다는 것이 밝혀진 그 순간 떠오른 마지막 기댈 언덕, 바로 그것이 지역감정이다. 정치개혁의 열쇠인 지역감정의 궁극적 해소는 기실 언론개혁과 맞닿아 있다. 총선 결과와 관계없이 언론개혁을 불지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릇 감정의 심연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아니 감정이야말로 인간성의 근본일지도 모른다. 지역감정 여론조장은 단순한 민족적 죄악이 아니라 반인간적 범죄다. 누가 심판할까. 눈먼 지역감정의 최대 피해자, 민중이다. 눈 뜬 민중에게 `고향'은 하나다. 조국이 그러하듯.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4월 6일 한겨레신문에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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