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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과 입술에 피멍이 맺혔다. 이가 부러지고 갈비뼈도 모두 부서졌다. 두 평 남짓 단칸방은 피범벅이었다. 고 서정만. 예순여섯, 할머니였다.

2000년 3월. 그는 그렇게 한많은 삶을 떠났다. 어린시절 동무들이 모두 부러워할 만큼 어여쁜 얼굴은 친언니조차 알아볼 수 없게 짓이겨졌다. 누구일까. 누가 60대 지친 여인을 참혹하게 살해했을까. 고인은 입에 풀칠을 위해 반세기동안 몸을 팔았다. 주한미군의 `노리개'로 온 삶을 바쳤다. 맞아죽은 전날 밤도 미군을 받았다. 목격자가 나왔음에도 살인자는 오늘까지 잡히지 않았다. 조국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2000년 7월. 여중생을 성추행하려던 미군의 덜미가 잡혔다. 정부는 즉각 “강한 분노를 느낀다”며 조사에 나섰다. 여론이 들끓었다. 미군은 재발방지 대책을 발표했다. 지역주둔 미군책임자와 총영사가 공개 사죄했다. 그래도 부족했다. 미국대사가 외무 당국자를 방문해 공식사과했다. 주둔 미군 전원에 무기한 야간통행금지령을 내렸다. 백악관은 클린턴이 분노하는 주민들과 만날 것이라고 발표했다. 짐작했겠거니와 뒷이야기의 무대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일본 오키나와다.

더러는 그 나쎄에 매춘이 남세스럽다며 쉬쉬하자는 `귀족'들도 있다. 기지촌 여인과 여중생이 같은가 회의하는 먹물들도 있다.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2000년 4월 대한민국 대구. 주한미군의 50대 군속이 초등학생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초등학교 들머리에 거주하면서 과자를 미끼로 어린 꽃들을 유인해 성추행을 일삼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조용했다.

살해당한 여성은 비단 서씨만이 아니다. 우리는 미군이 우리 누이 윤금이를 어떻게 엽기적으로 죽였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최근에도 김성희·이정숙·신차금·박순녀·허주연 등 수많은 여성들이 살해됐다. 일본과 비교조차 안 될 만행이 저질러졌으나 우리는 누구로부터도 단 한마디 사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무엇 때문일까. 미군이 일본과 달리 이 땅에서 활개치는 까닭은.

얼마 전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우리 민족성을 한탄했다. 한국인들은 분하고 들뜨는 습성이 좀 심하다며 일갈했다. “우리는 정말 아무도 못 말리는 사람들인가.” 물론 미군범죄를 거론한 것이 아니다. 남북 정상회담에 들떠 있다는 비판이었다. 어쩌면 조선일보가 정확한지도 모른다. 보라. 미군이 우리 형제들을 학살한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미군기지 주변 누이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만행이 주기적으로 일어남에도, 매향리를 끝없이 폭격함에도, 침묵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하지만 정녕 그럴까. 전혀 아니다. 기실 이 땅의 민중들은 손놓고 있지 않았다. 미군의 범죄와 불평등에 맞서 손에 손잡고 연대기구를 만들며 숱한 밤샘 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힘이 모아지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노동·시민·여성·종교단체 대표들이 두루 참여한 시국선언도 여론을 불지피지 못했다. 누구 책임일까. 언론이다. 언론의 냉갈령으로 마땅히 불붙어야 할 여론이 사그라들고 있다.

하여 단언한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다. 피맺힌 원혼들 앞에서 눈감은 것은 미국 이전에 우리 언론이다. 만일 수구언론들이 미군에 대한 여론을 왜곡하지 않았다면 시건방진 점령군 행세 따위는 일찌감치 사라졌을 터이다. 그러나 어떠한가. 민족지를 자임하는 조선일보와 수구언론인들은 미군을 향한 어떤 문제제기도 `용납'하지 않는다. 남북 공동선언 뒤에 미군을 두남두는 기사와 칼럼, 사설들이 되레 더 쏟아진다. 예서 그치지 않는다. 뜬금없이 통단사설로 목청을 돋운다. “조선일보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남쪽 내부의 정당한 냉전언론 비판을 북쪽과 연계해 몰아세우는 저 케케묵은 수법을 보라. 어느새 자신들만이 참된 통일론자로 둔갑해 있지 않은가. 그래서가 아닐까. 주한미군의 손에 피가 마르지 않는 까닭은.

조선일보와 이 땅의 목곧이들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민중을 꾸짖기 전에 제발 스스로에 먼저 묻기를. “우리는 정말 아무도 못 말리는 사람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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