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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뜬 마음으로 여행을 나섰던 때와 달리 여행지에 도착해 며칠이 지나면 약간은 나른하고 무미건조해 지는 시간이 찾아온다. 관광지마다 바글거리는 사람들에 치이고 길을 찾아 걷느라 온종일 혹사 당한 다리가 점점 무거워질 때도 이 즈음이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의 불편한 잠자리와 먹거리는 이런 피곤함을 날려주지 못하고 다음 날이면 구경거리를 찾아 또다시 길을 나서게 한다. 이쯤 되면, 입이 떡 벌어지게 놀랍던 각종 경치는 차츰 시들해지고 사진이나 책으로 접하던 유명 관광지에 대한 환상도 하나 둘 벗겨지게 된다. 뜨끈한 대중탕에 몸 담그고 앉아 피로를 풀고 방안에서 데굴거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고개를 내밀 뿐이다.

▲ 동네에서 열리는 시장의 가판 모습
ⓒ 조미영
▲ 시장에는 활기가 있다!
ⓒ 조미영
이처럼, 왕궁 같은 건물들도 비슷해 보이고 박물관의 유물들이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들과 별 차이를 못 느낄 때가 되면 가는 곳이 있다. 동네의 슈퍼나 재래시장 같은 상가들이다. 때마침 벼룩시장이라도 열리면 더없이 좋다. 아침 일찍이라면 싱싱한 물건들이 도착하고 진열되는 과정과 이를 고르는 바쁜 손길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오후라면 퇴근 후 장을 보는 일상인들을 만날 수 있어 좋다. 가끔 떨이로 싸게 파는 과일을 한아름 사서 그간 섭취 못한 비타민도 맘껏 보충하는 덤이 생기기도 한다.

필리핀처럼 더운 나라에서는 새벽 시장이 좋다. 금방 떠오른 태양이 아직 달궈지기 전이어서 그리 덥지도 않고 갓 잡아 온 생선의 팔딱거림도 볼 수 있다. 미리 잠을 깨면, 새벽마다 울어대는 독특한 닭 울음 소리도 싫지만은 않을 것이다.

▲ 새로 지어진 현대화된 건물이지만, 아직은 재래시장 맛이 나는 헝가리 시장이다.
ⓒ 조미영
▲ 네덜란드의 벼룩시장. 동남아와 아프리카의 토산품이 많다.
ⓒ 조미영
유럽에서도 도시마다 다르긴 해도 우리의 5일장 같은 재래시장이 꽤 많다. 일정한 장소와 시간을 정해 놓고 농수산물 위주로 판매를 하는데 물건도 싱싱하고 가격도 싸다. 일주일에 한두 번 거리에 천막을 치고 가판을 차려서 판매하는데, 주로 오전에만 열린다. 이는 상설시장도 마찬가지여서 오후 3, 4시를 넘기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신 대형 할인점은 일주일에 몇 번 늦게까지 문을 연다. 이 때 가면 양복 입은 직장인들이 퇴근 후 장을 보는 걸 볼 수 있다. 능숙한 솜씨로 장을 보고, 마지막으로 작은 꽃다발까지 뽑아 들고 계산대로 향하는 모습은 참 보기 좋다.

▲ 시장에서는 거리 예술가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 조미영
▲ 역시 먹는 게 빠질 수 없다. 게 튀김을 파는 가게에 사람이 가득하다.
ⓒ 조미영
여행을 하면서 그곳 사람들의 일상과 접할 수 있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하지만 재래시장에 가면 살아 있는 삶의 문화를 만날 수 있다. 정치, 경제, 사회가 모두 이 곳에 녹아 있다. 가격 흥정에도 유쾌함이 묻어나고 힘든 노동 중에도 웃음이 배어나며 떠돌이 예술가의 어설픔에도 흔쾌히 박수를 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건강한 것이다.

듬직한 아주머니의 장바구니로 들어가는 것들과 북적거리며 몰려 있는 곳에는 물건을 파는 상인들의 콧노래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퉁퉁 부은 발도,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의 무게도 모두 잊게된다. 때마침 솔솔 풍겨오는 음식 냄새는 식욕을 자극하며 낯선 음식에도 서슴없이 도전하는 용기를 준다.

▲ 버스를 두번 갈아타고 간 헝가리 최대의 벼룩시장에서 만난 할머니. 수 놓은 식탁보와 손수건을 이 할머니에게서 샀다.
ⓒ 조미영
요즘엔 벼룩시장이 관광 상품으로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탓인지 유명한 곳에 가 보면 현지인들보다 많은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상품들도 기존 기념품 상점에 전시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실망감을 안겨 주기도 한다. 그래도 전부 그런 것은 아니니 너무 체념할 필요는 없다.

사진을 찍고 싶다는 나의 부탁에 다소 긴장한 듯 차렷 자세를 취하는 순박한 서양 할머니들과 "멋지다"는 칭찬 한마디에 덤으로 하나를 더 얹어 주는 아저씨의 유쾌함은 이런 시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사람 냄새인 것이다.

▲ 노팅 힐의 포토벨로 마켓은 유명한 관광지이다.
ⓒ 조미영
▲ 벼룩시장의 아저씨
ⓒ 조미영
▲ 난 이 아주머니가 갖고 있던 인형을 1유로에 샀다.
ⓒ 조미영
난 여전히 일상이 우울하거나 짜증이 날 때면 사람 냄새 '풀풀' 풍기는 시장에 간다. 시장에서 느끼는 이 '살' 맛은 삶의 충전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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