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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영 열린우리당 의장께

올 가을은 여느 해보다 길군요. 의장께서는 가을을 좋아하십니까. 제게 가을은 참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저는 청소년 시절을 촌에서 보냈는데, 가을걷이가 다 끝난 늦가을 밤이면 동네 장정들은 인심 후한 집 사랑방에 두런두런 모여 앉았습니다. 김치 한보시기 내놓고 탁주를 즐기며 한해 농사 얘기하고, 서로 품앗이한 것을 평하며 농도 걸곤 했죠. 그러면 저는 그 옆에서 또래 벗들과 더불어 슬며시 탁주 한사발에 설탕이나 사이다를 타 먹곤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걸 보시고도 그저 껄껄하셨고 저는 달빛을 등지고 집에 와서는 어머니가 주시는 무나 고구마를 깎아 먹으며 어머니와 형, 동생과 재잘거리곤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가을이면 가족의 사랑이 그립고 벗의 우정을 말없이 찾아가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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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는 지금 여의도 국회 앞에서 10일째 단식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눈, 나의 심장인 사랑하는 세살 딸아이가 아침 저녁으로 아빠를 찾아 난감하다는 아내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말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곳에서 국가보안법폐지를 위해 이른 새벽부터 자정을 넘기는 시간까지 투쟁하고 있습니다.

왜냐고요? 1928년 일본 제국주의가 조상들을 유린하고 식민지 지배를 강요하기 위해 만든 치안유지법이 친일파들에 의해 국가보안법으로 탈바꿈해서 지금까지 살아남아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하고, 분단과 냉전을 종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보안법이 보이지 않는 감옥이 되어 우리 국민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고 한반도의 긴장을 조장하고 있는 현 상황에 방구들을 등에 지고 고구마를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에 보내자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씀과 열린우리당이 연내에 개혁 입법을 관철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반드시 관철될 수 있도록 독려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추운 밤공기를 텐트 한장에 의지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민주 개혁에 힘을 더하겠다는 우리를 참여정부의 경찰들이 와서 텐트를 부수고 동지들에게 욕과 폭력을 행사해도 감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개혁을 가로막고 있는 한나라당과 수구세력에 대한 투쟁을 위해 촛불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국가보안법 폐지를 비롯한 4대개혁 입법을 올 안에 반드시 통과시키겠다던 열린우리당 안에서 한나라당과 협상을 해야 한다, 대체입법으로 해야 한다, 국보법을 제외한 나머지만 통과시키자는 등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혁을 후퇴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개혁을 생매장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말이 조금 과했나요? “산이 높으면 돌아가고, 물이 깊으면 얕은 곳을 골라가야 한다”고 하셨죠.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을 것”이라고 하셨죠. 내년에 열린우리당이 설령 과반수가 무너져도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 국보법을 내년에 통과할 수 있다고 하셨죠. 6자회담 등 주변 상황이 안 좋아서 국보법 처리가 어렵다고 하셨죠.

산이 높고 물이 깊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산이 높아야 멀리 내다보고, 물이 깊어야 큰 배를 띄웁니다. 수구냉전의 힘을 두려워 하기보다 국민의 촛불을 두려워 하시고 의탁하십시오.

한반도 주변 상황을 좋게 하기 위해서나 남북이 평화적으로 관계 증진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폐지가 선행돼야 할 필수조건이 아닌가요. 지금 열린우리당의 지지도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내년 보궐선거가 위기의 상황으로 예상되는 것은 국민이 만들어 주고 지켜준 '권력과 여당'이 국민의 개혁 의지와 민주 발전 열망을 외면했기 때문이 아닌가요.

열린우리당의 기만적이고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는 일련의 정책과 움직임들이 범개혁세력 결집을 가로막지 않았나요. 열린우리당이 누울 자리가 친일을 통해 태어나고 군부독재와 결탁해서 기득권을 공고히한 수구냉전세력과 국민과 민족의 민주개혁열망을 놓고 거래하고 칼질하는 것인가요.

1992년 6월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민족민주열사 범국민 추모의 날에서 이부영 의장은 추모사를 하시며 "내가 현재 속한 집단이 열사들을 위해 제대로 활동을 하고 있지 못하기에 이 자리에 나오기를 망설였으나 옛 동지들의 모임이라서 나왔다. …… 의문사 진상규명과 구속인사 석방 등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의장께서 앞장서서 힘을 주고 어려운 난관을 먼저 돌파하셔야 되는 것이 아닌가요. 국가보안법 폐지를 비롯한 개혁입법에 당신의 모든 정치적 능력을 내걸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당신은 양지를 좇는 철새라는 오명을 쓰지 않는 ‘성공한 정치인’이 될 것입니다.

따뜻하고 안락한 의장석에서 국민과 국가를 보지 마시고 지금도 냉전에 떨고, 수구질서로 인해 밤거리를 떠도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통일, 우리 국민의 개혁열망을 직시하시길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2004. 11. 11.
한국청년단체협의회 정책위원장 송현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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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석은 한양대에서 철학과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교원대에서 교육정책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교육감 정책비서와 국회 보좌관, 교육부 장관 보좌관으로 근무했다. 지금은 민생경제연구소 공동소장과 (사)돌바내 이사이며, 2021년에 포스트86세대 연구자들과 함께 공공정책에 초점을 맞춘 정책연구네트워크 넥스트브릿지를 만들어 운영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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