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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잠시 한 눈을 팔다 놓쳐버린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날이 어둑어둑해짐에도 목적지로 삼았던 도시가 여전히 보이지 않자 전속력으로 도로를 날아갔다. 그런데 도로 오른편에 바람에 위태롭게 세워진 웬 천막을 지나친 것이다. 얼핏 스쳐보기로는 그 속에 무엇인가를 파는 아이들 두 명이 있었던 듯 했다.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조금 더 가다가 그만 핸들을 꺾었다. 대관절 바람이 점점 거세지는 늦은 오후 허허벌판에, 성의라곤 눈곱만치도 안 보이는 급조된 듯한 천막에 아이들이 있는 연유가 궁금했다.

 

 

코코넛 파는 아이들, 장사수완은 젬병이지만

 

"안녕!"

"안녕."

 

자전거를 도로가에 세워두고 열 걸음을 더 들어가고 나서야 아이들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한 눈에 봐도 꾀죄죄한 모습의 아이들은 그러나 표정만은 한없이 밝아 보였다.

 

"여기서 뭐하니?"

 

서툰 스페인어를 동원해가며 말보다는 표정과 몸짓에 포커스를 두고 말을 거니 수줍게 웃는 아이들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아이스박스를 가리켰다.

 

"이게 뭔데?"

 

궁금한 나에게 여자 아이는 다소곳이 다가와 직접 아이스박스를 열어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코코넛 열매 몇 개와 이미 코코넛을 다듬어 잘게 잘라 봉지에 담아놓은 것도 있었다. 그제야 이 녀석들이 코코넛을 팔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장사 수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사방에 아무 것도 없는 벌판에 세워진 천막에서 탐스러운 코코넛 열매를 가득 쌓아놓는다거나 하는. 이렇다 할 눈요깃거리도 없고 그저 손님이 먼저 와야 그 때서야 수동적으로 파는 열악한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도무지 팔 생각이 없는지 아니면 외국인이라서 부끄러웠는지 그저 머뭇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앙칼지게 하나 사 달라고 귀찮게 조르거나 몸을 배배 꼬면서 어리광을 부리지도 않으니 일은 내 쪽에서 풀어가야 했다.

 


"이거 하나에 얼마니?"

"10페소요."

 

코코넛 열매를 잘게 썰어놓은 봉지 하나에 1달러 정도했다. 그 봉지란 게 이를테면 성인 주먹의 3배 정도 크기였으므로 꽤 묵직했다. 다른 곳에서 파는 것과 가격은 동일하면서 양은 최소 20% 이상은 더 들어간 것 같았다.

 

"10페소라구?"

 

쓸데없이 경비를 지출하는 것을 무척이나 혐오해서 9개월 동안 단지 딱 한 번 숙박비를 지불할 정도로 자발적 초강경프롤레타리아로 지내온 내 지갑이 이 순간 아주 쉽게 열릴 조짐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얼음땡 자세로 서 있는 아이에게 최대한 손님으로서 정중하게 요청했다.

 

"코코넛 하나만 잘라 주겠니?"

 

초난감한 깍두기 코코넛, 그래도 "무이, 부에노!"

 

그랬더니 누나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아이스박스에서 코코넛 하나를 꺼내들어 예기치 않는 손님을 위해 슬슬 손질하기 시작했다. 우선, 얼룩이 훤히 보이는 비위생적인 도마 위에 그냥 물 한 번 붓고는 더 더럽게 보이는 행주로 도마 위를 훑고 나서 코코넛을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오늘 단 한 번도 씻어본 적이 없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는 무딘 칼을 가지고 땟물이 그득한 조막만한 손으로 코코넛을 이리저리 잡아가며 싹둑싹둑 잘라내는 모양이란! 이를 옆에서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 난 참 뭐라 말하기 힘든 복잡다단한 심경이다.

 

이윽고 손질이 다 끝나 잘게 썰어진 코코넛을 봉지에 담고선 몸을 돌려 내 눈을 응시한 채 아이가 말했다.

 

"소스 넣어드려요?"

"그러렴."

 

아무 생각 없이 승낙했더니 자신들의 입맛에 맞을 정도로 매운 칠레 소스를 마구마구 뿌려대는 것이었다. 딱 봐도 코코넛의 달콤한 이미지는 사라지고 깍두기 사촌뻘 되는 모양이 탄생하시었다. 난감이 가중되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투털대거나 윽박지를 수도 없는 일. 거기에 내가 손님을 끄는 건지 차 한 대가 도로 가에 서더니 인자하게 보이는 할머니께서 코코넛 두 봉지를 더 시킨 상황이라 추가 요구는 나도 부담스러웠다.

 

"고마워."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가 이거 하나 열심히 손질해서 파는 건데'라는 생각에 받아든 코코넛을 최대한 맛있게 먹기로 했다.

 

냠냠, 우적우적 씹어가며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보이자 아이들도 뭐가 좋은지 삐죽빼죽 고르지 않은 흰 이를 드러내며 따라 웃는다.

 

사실은 입에서 열불이 난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주스나 음료를 같이 팔면 좋았겠지만 역시나 그런 부분까진 생각지 못했는지 마실 게 아무것도 없었다.

 

웃고 있는데도 뭔가 부자연스러운 내 표정을 간파했는지 아이는 물이 필요하냐며 나에게 물었다.

 

"오, 그래 물! 한 잔 만."

 

물이라도 있다니 다행이었다. 이젠 표정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매운 티를 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내 표정이 웃긴지 아까보다 더 박장대소를 한다. 다들 웃는데 나도 전염이 되었는지 그만 따라 웃고 말았다.

 

그런데 아이가 건네준 물은 지금까지 코코넛을 손질하면서 겪은 과정의 결정판이었다. 도무지 생수로는 어울리지 않는 물 속을 한가로이 유영하는 각종 찌꺼기와 민물고기가 서식이라도 한 듯 비릿한 냄새가 나를 더욱 암울한 절망의 늪으로 침잠시켰다. 어쩔 수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살짝 한 모금 마시는 시늉만 하고는 다시 컵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배불러….'

 

양이 적은 내가 아닌데 그리고 시장했던 차였는데 몇 조각은 끝내 남겨두고 말았다. 다른 이유가 아닌 정말 배가 불러서였다. 저녁 생각이 싹 가실 정도로…. 얼마나 많이 담아줬으면.

 

아이들에게 맛있다는 의미로 '무이 부에노!'를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칭찬받는 것이 익숙지 않은지 가타부타 대답이 없다. 그러고는 천천히 자전거 쪽으로 걸어가 지갑에서 10페소짜리를 꺼내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 때서야 조용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을 한다. 그 대답으로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눈웃음 한 번 주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희는 좋은 어른이 될 거야

 

나는 이 아이들의 부모가 어디서 뭘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최소한 아이들을 이 험한 세상바닥에 내팽겨 놓고 모르쇠로 일관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만 믿고 싶다.

 

어린 나이에 거친 세상의 길로 나와 살아가는 방법을 거칠게 체득한 영악한 아이들을 많이 봐왔지만 이 녀석들처럼 밝고 건강한 웃음을 가진 친구들은 많이 없었다는 점에서 부모의 자질을 함부로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또 이 친구들이 언젠가 배우고 또 자라나 어른이 되었을 때 자신의 어린 날을 결코 잊지 않고 진정 자기 자신과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멋진 인격체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했다.

 

지금은 비록 몇 푼 안 되는 코코넛 장사로 세상을 마주하고 있지만 이 맵디 매운 코코넛 속에 녀석들의 작지만 소중한 꿈이 달디달게 영글어가고 있음을 녀석들의 가식적이지 않은 마음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단 1달러짜리 코코넛 하나에 세상 욕정으로 줄다리기 하지 않고 그 본질에 새겨진 소박한 기쁨을 나눌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훈훈한 장면인가.

 

작별 인사를 하고 천막을 빠져나오는데 어쩐지 뜨뜻한 온탕에 들어갔다가 나온 기분이다. 집안 대청소처럼 마음의 피로가 싹 가신 맑은 느낌. 아이들을 마주하고 나서 내 속에 찌꺼기를 얼마간 털어낸 또 개운한 느낌.

 

찰나에 스친 녀석들의 눈빛이 내 발걸음을 멈춰 세웠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있게 맛있는 코코넛을 맛보았다. 점점 날이 어둑해지고 바람이 거세지기에 매일 그 자리에서 같은 일과를 보낸 아이들이었겠지만 괜시리 걱정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무척 흡족하고 감사했다. 이 작은 만남이 가져다 준 큰 행복 때문에. 그리고 전광석화처럼 열나게 페달을 밟으며 바람결에 혼자 조용히 읊조렸다.

 

"그래, 멈춰서길 잘 했어!"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세계일주, #멕시코, #문종성, #자전거, #비전노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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