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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입구에 들어서면 '미켈란젤로 광장'이란 이름에 걸맞게 다비드 동상이 서있다. 진품은 아카데미카에 있으니 이 동상은 제작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재연 작품이다. 지나가는 객이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차라리 '미켈란젤로 광장'이라는 이름답게 미켈란젤로의 동상이 있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미켈란젤로를 기념하는 광장에 다비드 동상이 있는 것까지 좋다. 다비드 동상이 안전한 실내로 옮겨진 것도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적절했다. 원래 동상이 있던 자리에 새로운 다비드가 서 있는 것 역시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이 작은 도시에 다비드가 3개씩이나 있는 것은 지나치지 않았나 싶다. 다른 두 개의 작품이 중요한 관광지마다 있어서 관광객들은 다비드를 너무 자주 보게 된다. 그래서 다비드는 피렌체에서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것처럼 느껴졌고 식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했던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의 사진 속에서 봤던 다비드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다비드를 진짜로 보려면 몇 시간씩이나 줄을 서야 하고, 하루 일정 자체를 그것에 투자해야 하니, 만나야겠다는 욕망은 줄어 들어갔다. 그러니 진품에서 느낄 수 있는 아우라를 느끼지 못한 채 다른 작품만 보고 돌아서게 됐다.

처음부터 그것을 보려고 피렌체를 방문했던 것도, 유명하니까 무조건 봐야 겠다는 것도 아니니 의지는 아쉽게도 점점 줄어들었다. 바티칸에서 '피에타'를 보고, 미켈란젤로의 위대한 작품에는 기가 질려버리기도 했던 터여서 오히려 회피하고 싶었다. 

식상한 '피렌체의 상징', 흔한 '이탈리아의 자부심'

그런데 '진품' 다비드를 관람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피렌체 특강>이라는 책 때문이다.

책은 피렌체에서 다비드를 관람하는 미국인 여행자의 하루 이야기다. 그는 우연히 길에서 노인을 만나 그와 대동하게 된다. 이카데미카에서 별 의미 없이 보고 지나쳤던 다비드상을 다시 심도 있게 관람하면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지에 대해 느끼고, 배우고, 돌아간다는 내용이다.

성공학에 관한 책이자, 자기 개발서 성격을 갖고 있는 책이다. 신의 이야기에 충실했던 미켈란젤로의 삶의 태도를 닮고자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기독교적인 인생관을 담고 있기도 했다.

책에 의하면 미켈란젤로가 다비드를 모델로 삼았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피렌체가 소도시라는 점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고향이자 작은 도시인 피렌체가 주변의 거대한 도시국가와의 경쟁에서 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국가적인 위기를 만날 때면 다비드처럼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고자 했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다비드는 피렌체의 상징, 그 자체였던 셈이다. 그런 미켈란젤로의 소망 덕분인지 피렌체는 중요한 소도시로 현대까지 살아 남았고, 아직도 그 매력을 뽐내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의도 중에서도 특히 그 부분에 대한 이해가 있는 피렌체 시민들이라면 다비드상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심미적인 관점에서도 훌륭하겠지만, 동향의 시민들로서는 선조가 들려줬던 소중한 메시지였기에 눈의 즐거움을 넘어서는 남다른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중요 관광지마다 세워 타지에서 온 손님들에게 자랑하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내 후회는 훗날 발길을 다시 아카데미카의 다비드에게로 이끌어 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보겠다는 집착을 버려야만 다음 행선지로 나갈 수 있다. 그러니 이탈리아에서의 여행은 매번 쉽지 않은 선택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반가운 한국인 여행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곳

미켈란젤로 광장은 피렌체를 여행하는 많은 한국인 여행자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어서 다국적 여행자들을 다양하게 볼 수 있기는 하지만 한국 사람들 비율은 특히 높다.

로마나 베네치아에 비해 피렌체를 선택하는 여행자가 적다는 점까지 감안한다면 광장에 모인 한국인들은 정말 많은 편이다. 아마 피곤해서 숙소에서 쉬는 사람 빼고, 찾아오려다 길을 잃어버려서 못 온 사람 빼고, 보다 보다 지겨워서 더 이상 안 올라오는 사람 빼고는 다 여기 와있지 않을까. 다들 한번쯤은 그곳에 올라와서 시내를 내려다봤을지 모른다.

동행인과 길이 엇갈려 헤어질까 싶으면 미리 여기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기도 한다. 어차피 모두들 저녁에는 야경을 보러 올라갈 거니까 이곳에서는 휴대폰도 따로 필요가 없다. 일상 속에서 약속 잡을 때 매번 필요했던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참 빡빡하게 살고 있다.

여행을 하다 보면 한국 여행자를 많이 보게 되는 유명 관광지가 몇 군데 있다. 그런 곳에서는 이내 자주 못 만나는 친구를 오랜만에 보는 동문회장 같은 분위기가 된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우리들은 대체로 외국어에 능통하지 않기 때문에 '간만에' 모국어를 쓰게 되면 신이 안 나려고 해도 안날 수가 없다.

흔한 동문회장에서처럼, 그간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묻기도 하고, 지나온 시간들을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갖게 된다. 처음 만났지만 그동안 만나고 싶던 오래 전 친구를 오랜만에 다시 만난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한국에서 자연스러웠던 일들이 여행지에서 어색했던 경험을 서로 얘기할 때면, 동창과 학창 시절에 있었던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같은 지역에서 같은 언어를 쓰던 사람들을 타지에서 만나니 자연스레 동질감이 생겼다.

반면 학창 시절 껄끄러웠던 친구와 합석하게 되면 어색함에 어찌할 바를 모를 때도 있는 것처럼, 가끔은 어색함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는 그런 분위기다. 이곳은 유럽의 아주 대표적인 한국인 '여행자 동문회장' 중 하나다.

<냉정과 열정 사이> 스포일링은 이제 좀 그만!

미켈란젤로 광장에 한국 여행자들이 모이면, 미켈란젤로나 다비드 얘기는 별로 없다. 많은 이들이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얘기뿐이다. 피렌체 시내를 내려다 보며 원하던 원치 않던 옆 사람들이 읊어주는 영화 줄거리를 들어야 했다. 준세이가 어쩌고, 아오이가 저쩌고.

이미 오래 전에 극장에서 내린 영화이기에 '스포일러'라 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 영화를 못 보고 온 나로서는 억울했다. 이 사람 저 사람 다 그 얘기다. 매번 같은 줄거리를 듣다 보니 나도 이미 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가 됐다. 여행 얘기에서 영화 얘기로 넘어가면서, 동문회장 분위기는 동네 반상회 분위기로 넘어갔다. 지난 드라마 줄거리 얘기하는 엄마들 모임 같았다.

시야가 뻥 뚫린 곳에 올라가서, 도시를 훤히 내려다보면서 하는 얘기가 겨우 어둡고 막힌 영화관에서 보고 왔던 영화 줄거리 밖에 없다니 아쉽다. 높은 곳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 그 자체가 즐거운 일이고, 그 자체가 영화 속 한 장면인데 말이다. 과거에 봤던 영화가 아니라, 현재 내려다보고 있는 이 경치가 우리에게는 더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그 영화의 촬영지라는 이유로 이곳에 오는 사람이 많다는데, 그건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쩐지 좀 촌스러운 행동 같았다. 영화는 굉장히 대중성이 있는 예술 분야이고 영화를 본다는 것은 별로 특별한 경험에 속하지 않는데 그에 비해 여행은 훨씬 더 특별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또 그 줄거리를 매번 들어야 하니 그 공간조차 지루해져 갔다.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를 여행하는 것은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여행 패턴이 된 지 오래지만 줄거리 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영화 속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 속에 풍덩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영화 기행자라면 그때의 감동을 더 섬세하게 느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나만의 영화를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이 순간 오직 나만이 만들 수 있는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는 거다. 미켈란젤로 광장이라는 무대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고, 나만이 간직하는, 나만의 소중한 러브 스토리를 만들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아닐까. 그러면 비행기 표 값은 뽑고도 남는다.

미켈란젤로 광장은 아기자기한 도시가 한 눈에 잘 들어와 구경하기 좋은 편이고, 교통이 잘 연결돼 있어서 올라가기도 쉽다. 버스가 꼭대기까지 올려준다. 올라가는 길도 꽤 한적하고 보기 좋아서 내려올 때는 걸어오게 되곤 한다.

시내 건물 곳곳에 조명 설치를 잘 해둬서 언덕 위에서 관람하기가 아주 좋게 돼있다. 피렌체에 열흘을 머물더라도 열 번은 올라오고 싶고, 한 달을 머물면 한 달 내내 올라오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매력있는 곳이다.

▲ 미켈란젤로 광장의 석양 해가 지는 광장에서 피렌체 시내를 내려다 본다. 날이 저물면 이곳은 사랑하는 이들의 공간이 된다. 어떤 연인들의 눈에는 길가의 가로등 조명이, 지나는 자동차 전조등이, 사랑의 빛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 정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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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동영상 여행, #이탈리아, #유럽, #배냥여행, #피렌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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