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영화의 핵심 줄거리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편집자주>

"세상이 공평할 거란 기대는 버려. 우리 같은 사람은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해."

시작부터 뜨끔한 메시지가 뜬다. 이것은 주인공 양미숙이 하는 말이고, 또 감독 이경미가 보내는 일침이다.

 

우리가 만든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그러기에 '우리 같은 사람'은 남들, 그러니까 '우리같지 않은 사람'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가슴을 후려파는 이 두 문장은 과연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 이 문장을 읽고 혹은 듣고, 뜨끔해진다면 그 사람은 '우리 같은 사람'에 속하는 왕따일까?

 

공평하지 못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양미숙, 서선생의 딸 서종희, 그리고 보이지 않는 찐따들을 이야기하는 <미쓰 홍당무>는 황당하면서도 기이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의 눈물겨운 연대를 담고 있다.

  

그녀, 양미숙은 삽질하는 여자다. 고등학교 러시아어 교사에서 쫓겨나다시피 중학교 영어교사로 낙하되고, 짝사랑하는 남자를 10년동안 따라다니지만 정작 그는 양미숙이 안중에도 없다. 하지만, 그녀 양미숙은 착각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그렇게 되고 싶은 욕망이 과해서인지 서 선생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사랑을 가로막는 이유리는 양미숙이 넘고 싶어도 넘을 수 없는 산이다. 예쁘고 매력적인 그녀는 캔디처럼 주위 모든 남교사들의 사랑을 받는다. 양미숙이 '우리 같은 사람' 부류에 속한다면, 이런 이유리는 '남들' 부류이다. 당연히 양미숙이 이유리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이런 그녀에게 삽질하는 소녀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서선생의 딸 서종희. 양미숙은 그녀와 모종의 관계를 이루어가며 서선생과 이유리의 만남을 방해하는 동시에 그들 스스로가 친구가 되어 항상 혼자였던 모습을 하나하나 지워간다.

 

 삽질하는 두 여인의 연대 <미쓰 홍당무>

삽질하는 두 여인의 연대 <미쓰 홍당무> ⓒ ㈜모호필름

  

<미쓰 홍당무>에서 양미숙과 서종희의 관계는 이경미의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에서 지영과 희진의 모습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 서로 대조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비슷한 처지이며, 서로를 알아가면서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연대해 나가는 이야기가 상통되는 부분이 많다. 흥미로운 것은 두 인물들이 주류과 아닌 비주류의 동맹관계라는 것이다.

 

단편에서 등장했던 두 인물이 노동자와 노동자라는 끈으로 자본가라는 대립항에 저항한다는 것. 그와 맞대어 장편에서는 학생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왕따교사와 왕따학생이 서로 자신들의 모습들을 인정해가며 열혈적으로 주류(이유리)에 반기를 들고 있다. 이것은 감독 이경미가 자신의 믿음직한 단편을 어떻게 장편에서 응용, 발전시켰는지 확실히 보여주는 바이다.

 

종종 데뷔작을 내놓는 감독들이 그들의 인상적인 데뷔작에서 한참 멀어져 괴상한 작품을 내놓기가 다반사인데, 그녀 이경미는 철저히 자신들을 지지해 주었던 지지자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다. 표피적인 면에서 웃음과 황당함을 유발하는 '코미디'의 장르의 옷을 입었지만, 그것은 이상하리만치 괴이하고 동정보다는 객관적인 관람을 유도할뿐 아니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까지 담고 있어 오히려 진한 '드라마'에 가깝다. 그리고 난 이 영화가 여성이 주도하는 여성에 관한 '성장영화'라고 주저없이 말할 수 있다.

 

19세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양미숙

 

1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양미숙은 고등학교 때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수학여행 단체사진 촬영 때, 양미숙은 친구들 곁에 서지 못한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노력도 해보지만 모.두 다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영화는 잊을 만할 때 쯤, 한 번씩 이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주는데, 매번 같지가 않다. 처음엔 프레임 안에도 체 들어가지 못한 양미숙을 보여준다. 그만큼 그녀가 주변부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점차 양미숙이 사진 안에 들어가기 시작하는데, 영화는 그 과정을 양미숙이 비주류에서 주류에 편입하는 것으로 대입하지 않는다. 그런 안이한 선택에서 벗어난 영화는 대신, 부끄럼이 많은 그녀가 어떻게 자신의 의사를 확실히 표현하고 잊지 못하는 19살 우울한 소녀 시절에서 빠져나오는지를 단체사진 장면의 반복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여자 양미숙

그여자 양미숙 ⓒ ㈜모호필름

안면 홍조증을 가진 양미숙은 자신이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의 외모에서 기인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별로 그것을 고치려는 의지가 없다.

 

오히려 피부과 의사에게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말해줄 뿐이다. 하지만 시시콜콜하고 엉뚱하기만 그녀의 일상담은 주변 사람들을 귀찮게 할 뿐이다.

 

마치 관객에게 하는 내레이션처럼 양미숙은 자신의 이야기를 의사에게 들려준다. 오로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그밖에 없는 것처럼 열정적인 표정으로 말이다.

 

그녀는 의사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해 보인다. 이것은 결말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예고하는데, 대부분은 뒷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할만큼 양미숙과 의사와의 관계는 적잖이 의미심장하다.

 

사실 그녀 이야기를 그나마 가장 잘 들어주는 것은 그녀와 동질적인 위치에 있는 서종희다. 둘은 급한 불을 끄기 위해서 계약적인 관계로 만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울면서 진심을 나눌만큼 긴밀한 사이가 된다. 서종희의 모습에서 자신의 옛 모습을 보았을까? 둘은 사제사이라는 것을 금방이라도 잊을만큼 친밀하며 자매 이상으로 끈끈하다. 아픔을 인정하며 '고도'를 기다리는 그녀들은 서로의 존재를 그대로 쿨하게 받아들인다.

 

어떻게 보면 양미숙을 어두운 기억에서 이끌어 내는 것은 어두운 현재를 살고 있는 서종희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19살 점프하듯 날을 수 밖에 없었던 부끄러운 사진 속의 기억에서 유유히 빠져나와 자신의 안면홍조(부끄러움)를 멋지게 인정하는 현재의 29살 미숙으로 성장한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은 보는 사람들도 뿌듯하다.

 

안면홍조를 그대로 인정하는 홍당무의 성장영화

 

 양미숙과 계약적 관계에서 자매이상으로 발전하는 서종희

양미숙과 계약적 관계에서 자매이상으로 발전하는 서종희 ⓒ ㈜모호필름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하는 양미숙과 서종희는 그 길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예술제가 끝나고 정문으로 내려오는 그녀들의 뒷모습은 밀가루로 뒤덮여있다. 허나 그래도 슬퍼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누가보면 상당히 슬픈 장면일 수 있는데, 그들은 자연스럽게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으로 떠나려는 사람처럼 자신감에 넘쳐 있으며 행복해 보이기까지한다.

 

이경미의 재능은 여기서부터 다시 빛을 발한다. 그녀들은 사차원으로 '결코'가지 않고, 관객의 예상에서 한참 빗나가는 곳으로 열차를 탄다. 그리고 안면홍조를 그대로 인정하는 홍당무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관객은 그녀들은 결코 삽질만하는 찐따가 아니며 삽질도 잘하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게 되는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된다.

 

세상이 공평할 거란 기대는 버려. 그러니 우리 같은 사람은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 필요도 없어.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네오이마주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10.22 10:53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네오이마주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미쓰 홍당무 이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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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 2008 시네마디지털서울 관객심사단 2009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관객심사단 2010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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