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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드림의 '종말' 그리고 유러피언 드림

 

그러니까 2009년 5월 23일 아침.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모 라디오 방송국 아나운서가 전하는 아침 뉴스에 내 귀를 의심했다. 그날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날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 닥 존경하진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애증이었는지도 모른다. 최근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기자가 노 전 대통령이 살아 있을 당시, 그러니까 2007년 대선을 코앞에 두고 진행한 인터뷰를 실은 책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읽고는 애증은 더 없이 쌓였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2003년은 내가 사회초년생으로 이제 막 이 사회에 첫 발을 내 딛는 해이기도 했다. 해방 후 한국사회를 60년 넘게 지배한 세력들이 그를 탄핵으로 몰아넣을 때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단 엄밀히 얘기하면 '시대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촛불을 들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그는 내게 위안을 주지 않았다. 솔직히 많이 실망했고, 그가 할 수 없는 일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애증은 풀리지 않고 여전히 남았는데, 돌연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를 보내며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글과 함께 그를 기렸다. 그래서였다. 그가 언론과 한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는 대통령이 권력이 아니라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진짜 권력이기에 시민 속으로 들어 가려했다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유러피언드림>을 읽게 된 배경이다. 그가 퇴임 후 죽기 전까지 참여정부 시절 함께했던 이들과 진보와 민주주의를 공부하면서 읽고 토론했던 책 중 하나가 <유러피언드림>이었다.

 

그래서 그와의 애증을 풀어보려던 개인적인 의도도 있었고, 그가 퇴임 후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 된 힘'과 함께 지향하고자 했던 한국사회 '진보의 미래'와 '민주주의 미래'가 궁금했었다.

 

<유러피언드림>의 저자 제러미 리프킨은 책을 통해 '아메리칸드림'은 끝났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 자리를 유러피언드림이 대신하고 있다고 했다. 책에 나와 있는 대로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나, 문명의 위기, 자연의 위기는 아메리칸 방식으로 극복이 불가능 하다.

 

저자는 여러 가지 예를 들어 16세기 이후 유럽과 유러피언, 아메리카와 아메리칸이 걸어왔던 길을 비교 분석해 아메리칸이 왜 그런 아메리칸드림을 형성했는지를 계몽주의와 청교도혁명 등 오늘날 서양(유럽과 미국)의 형성케 한 서양철학을 기초로 밝혀낸다.

 

그리고 최근의 각종 경제지표와 사회적 현상 분석을 통해 아메리칸 드림이 쇠퇴하기 시작했고, 유러피언 드림이 시대적 가치로 떠오르고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가 책을 통해 말하는 유러피언드림과 아메리칸드림의 가장 큰 차이는 '공동체'에 대한 관점과 인식이다. 즉, 유러피언과 유러피언드림은 공존, 공영, 호혜, 연대, 집단주의 등의 가치가 강한 반면 아메리칸과 아메리칸드림은 승자독식, 경쟁, 효율, 개인, 엘리트주의 등의 가치가 강하고 실제로 그렇게 사회시스템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

 

유러피언의 '네트워크'와 동양의 '관계'

 

책을 읽고 나서 몇 해 전 읽었던 신영복 선생의 <강의>가 떠올랐다. 어쩌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나서도 18세기까지 동아시아는 세계 선진국이었다. 유럽이 여전히 15세기에 이르러도 도시국가 체제에 머물 때, 동아시아는 강대국이었다.

 

<강의>가 떠오른 이유는 내겐 동양철학을 관통하는 흐름이 바로 '관계'이고,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시아든 유럽이든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간 억압과 수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적으로 긍정하진 않는다.

 

다만 좀 더 들여다보면 조선이 500년을 지속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회에 '공동체'라고 하는 사회적 합의와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굽은 생선은 뒤집지 말라'고 했다. 나머지 반은 자기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야 공동체는 유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철저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조선을 지배한 철학이념이 유교사상이다. 더 엄밀히 얘기하면 그 중에서도 성리학 즉, 주자학 일색이다. 그러나 모든 선비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유교경전의 기본 바탕인 '대학' 2장에 '대학의 도는 재친(신)민'이라는 구절이 있다.

 

성군을 자처했던 정조대왕이 경연장에서 신하들에게 물었다. '재친민(親民)'으로 읽는 게 옳은지 '재신민(新民)'으로 읽는 게 옳은지를, '재친민'은 곧 양명학의 바탕이 되고 '재신민'은 주자학의 바탕이다. '재신민'으로 읽으면 대학의 도는 백성을 새롭게 하는데 있다고 해석하게 된다. 즉, 정치란 백성은 다스려야 하는 교화의 대상이다.

 

반면 '재친민'으로 읽게 되면 대학의 도는 백성들과 가까워지는 데 있다고 해석하게 된다. 즉, 정치는 백성들은 다스리면 되는 대상이 아니라 가까이 지내야 하고 정치의 주인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유교의 가르침인 '백성 위하기를 하늘처럼'이라는 '위민이천'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얘기가 길어졌다. 이 얘기를 꺼낸 것은 공동체를 구성하고 관계를 형성할 때 초석이 되는 것은 상대를 향한 존중과 배려, 이해다. 그것을 통해 타인, 다른 집단, 사물, 자연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고 공존할 수 있다는 기초가 싹트게 된다. 동양철학은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 토속신앙도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정치와 백성의 그런 '관계'를 강조했다.

 

유러피언드림을 읽고 남과 북을 생각한 것은 '오버'일까?

 

다시 유러피언드림이다. 유러피언의 공동체와 아시안의 공동체는 서로 다른 토대와 사회문화적 환경, 역사 속에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다름은 있어도 공동체는 여전히 살아 흐르고 있다.

 

그래서 제러미 리프킨은 말한다. 유럽대륙을 넘어 전 지구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시스템으로 '네트워크 시대'가 도래하고 있고, 이미 기업 간, 기업 내 개인과 개인 간, 유럽의 각 나라와 나라 간, 각 나라의 시민과 시민 간, 심지어 사람과 동물 간 네트워크도 현실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네트워크를 구성해 인류공동체가 상호 공존과 호혜, 공영과 지속가능한 세상을 열어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책을 덮고 나서 우선 들었던 생각은 한국이었다. 아니 동아시아의 남한과 북한이었다. 유럽이 유러피언드림 달성을 위해 50년전 유럽경제공동체로 출발해 유럽연합에 이르고, 최근에는 유럽연합 대통령까지 선출했다. 놀라운 일이다.

 

저자는 유럽공동체 다음으로 네트워크를 현실화 할 수 있는 곳으로 아시아를 들었다. 이미 중국과 일본은 각각 차이니즈 드림방식의 아메리칸 드림방식의 '아세안(동남아시아 10개국)+3개국(한,중,일)'의 아시아 공동체를 주도하겠다고 나선다. 이것이 아시안에게 호혜일까?

 

아메리칸드림의 장막에 갇혀 있는 한국과 일본이 유러피언드림을 꿈꿀 수 있을까? 새로운 패권국가로 등장 한 중국이 아시아적 가치에 맞는 유럽피언드림 즉, 아시아공동체를 진짜로 희망하고 있을까? 그래서였다. 남과 북이 떠오른 것은. 그래서였다. 남과 북의 통일을 꿈꾼 것은.


유러피언 드림 -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원기 옮김, 민음사(2005)


태그:#유러피언드림, #아메리칸드림, #네트워크, #관계,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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