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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9일(화)


어제보다 날이 한층 더 추워졌다. 창밖으로 내려다보는 도로 풍경이 을씨년스럽다. 오늘 거제도의 기온은 최저 5.4도에서 최고 13.6도다. 11월 들어 낮 기온이 가장 낮다. 바람이 불어서 체감 온도는 이보다 더 내려갈 것으로 보인다. 오늘 이후로 날씨가 한층 더 추워진단다. 서울에는 비록 싸락눈이기는 하지만 첫눈이 내리고, 체감온도는 평소보다 3, 4도 더 낮아진다고 한다. 일기예보를 듣는 것만으로도 몸이 으슬으슬 떨려온다.

아침부터 조짐이 좋지 않다. 뒷바퀴에 공기를 잔뜩 주입하고 출발하려다 앞바퀴가 조금 주저앉은 느낌을 받는다. 혹시나 해서 손가락으로 앞바퀴를 눌러 본다. 탄력이 많이 떨어진다. 뒷바퀴는 물론이고, 앞바퀴마저 바람이 새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앞뒤 바퀴가 다 펑크가 난 게 여간 심상치 않다. 어젯밤 앞바퀴마저 펑크가 난 사실을 알았다면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 놓고 잠에 들었을 텐데, 지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바람이 불고 날이 추워 거리에서 펑크를 수리한다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뒷바퀴조차 수리를 못 하고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마당에 앞바퀴까지 펑크가 나 버려 난감하기 짝이 없다. 일단 앞바퀴마저 빵빵하게 공기를 주입한다. 그나마 타이어의 공기가 몸으로 느끼기 힘들 정도로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어 다행이다. 한 번 공기를 주입하면 최소 반나절은 충분히 달려갈 수 있을 것 같다.

칠천교 위에서 내려다 본 바다. 이곳의 바다에서 칠천량해전이 벌어졌다. 왼쪽이 칠천도, 오른쪽이 거제도.
 칠천교 위에서 내려다 본 바다. 이곳의 바다에서 칠천량해전이 벌어졌다. 왼쪽이 칠천도, 오른쪽이 거제도.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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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기 좋고 아름다운 섬, 칠천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바람이 심하게 부는 편이다. 날이 추워서 그 바람이 칼을 품고 달려드는 것처럼 아리다. 얼마 가지 않아 칠천도로 들어서는 다리가 나타난다. 칠천교다. 다리 위로 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갓길로 가지 못하고 중앙선 가까이 붙어서 달린다. 인도로 올라서는 건 엄두도 못 내고, 갓길을 달리는 것도 불안불안하다. 마침 다리 위를 지나가는 차량이 드물어 가능한 일이다.

거제도에는 연도교로 연결이 되어 있는 섬이 두 개다. 칠천도와 가조도가 그 섬들이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에 따르면, 연도교로 연결이 되어 있는 섬들은 대체로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일종의 닮은꼴이다. 섬사람들의 생활 환경이 비슷한 것은 물론이고, 섬의 지리적 형태마저 닮아 있는 게 보통이다. 그러니까 칠천도와 가조도 역시 거제도와 유사한 형태의 섬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칠천도 역시 언덕이 많은 섬이다. 하지만 그 언덕이 애초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큰 힘 들이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다. 칠천도는 바닷가를 따라, 해안을 일주할 수 있는 도로가 깔려 있다. 도로가 낮은 산자락을 타고 넘는다. 비록 수시로 언덕이 나타나서 힘이 들기는 하지만, 고통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섬이 작고 산이 낮아, 언덕이 있다고 해도 거제도만큼이나 높고 가파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칠천도의 해안도로 역시 다른 곳의 해안도로 못지않게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준다.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에, 거대한 철선들이 미동도 없이 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날은 춥지만 하늘은 맑아서 해안에서 바라다보는 바다와 섬 풍경이, 눈이 시리게 아름답다. 자동차도 드물다. 그러고 보면, 칠천도만큼이나 자전거 타기 좋은 섬도 없다.

물안해수욕장. 칠천도 유일의 해수욕장으로 아담한 크기다.
 물안해수욕장. 칠천도 유일의 해수욕장으로 아담한 크기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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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교.
 칠천교.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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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수군을 전멸 위기로 몰고 간 '칠천량 해전'

칠천교 앞 칠천량해전을 설명하는 표지석.
 칠천교 앞 칠천량해전을 설명하는 표지석.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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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도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린다.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아 이 작은 섬을 돌아 나오는 데도 시간이 솔찮게 걸린다. 컨디션이 좋았다면 훨씬 더 편하고 즐거운 여행이 됐을 것 같다. 칠천도를 빠져나오면서, 칠천도로 들어서기 전에는 보지 못했던 탑 하나를 발견한다. 처음에는 다리를 건설하고 난 뒤에 조성한 기념탑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게 아니다.

정유재란 당시 이곳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다. 칠천량해전이다.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하고 있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지휘권을 잡고 있을 때다.

왜의 수군과 육군의 협공을 받은 조선 수군은 거의 전멸 상태에 이른다. 조선은 이 전투에서 수군 1만여 명과 거북선 등 전선 150여 척을 잃는다. 이때 남은 전선이 겨우 12척이다. 조선 수군은 이 전투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어렵게 지켜왔던 남해의 해상권을 빼앗긴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이 되고 만 것이다.

이 전투 이후 원균은 고성으로 퇴각하다 육지에서 전사하고,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돌아온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이순신 장군은 칠천량해전에서 살아남은 12척의 전선을 가지고 울돌목에서 일본 수군 133척의 공격을 물리친다. 이로써 남해 해상권을 회복하고 전세를 뒤집게 된다. 이 두 사건이 모두 1597년 음력 7월과 9월 사이, 단 두 달 사이에 일어난다. 그야말로 극적인 사건의 연속이다.

칠천량해전은 왜군이나 조선군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전투 중 하나였음이 틀림없다. 칠천교 앞에 서 있는 이 탑은 그때의 패배와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든 탑이다.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미가 담겼다. 칠천도에서는 앞으로 이 전투에서의 패배를 기억하고 당시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옥계마을에 '칠천량 해전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연하해안로에서 바라다 본 바다 풍경.
 연하해안로에서 바라다 본 바다 풍경.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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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도 이후의 여행은 여행 아닌 '고행'

칠천도를 떠나서는 '연하해안로'를 달린다. 비록 이름은 해안로이지만, 실제는 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구간이 많아 낭만적인 분위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오가는 차량도 제법 많은 편에 속한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거제도 여행은 딱 여기까지다. 나같이 거제도 해안을 모두 일주해야만 하는 여행 목적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거제도여행은 가급적 칠천도에서 끝내는 게 좋다는 생각이다. 좀 더 간다고 해도 거제조선소 앞에서 멈추는 게 바람직하다.

이후로는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나 '모험'이 될 가능성이 높다. 우선 연하해안로만 해도 갓길이 없고, 노면도 상당히 거친 편이다. 거기에다가 현재 도로의 상당 구간이 공사 중이다. 뒤따라오는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기 일쑤다. 차들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면, 나 역시 신경질적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바람에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날이 건조한 탓에 길 위로 먼지가 뿌옇게 피어오른다.

당시만 해도 이 도로만 벗어나면, 사정이 나아질 거라고 짐작했다. 여기에서 더 이상 나빠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도로는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 거제도를 빠져나가는 14번 국도에서 마주치게 되는 일은 상상초월이다. 내 자전거여행 역사에 이렇게 험한 도로는 처음이다. 자동차전용도로도 이렇게까지 위험하지는 않았다.

거제조선소 앞을 지나면서 살짝 숨통이 트인다. 조선소 앞으로 자전거가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하해안로를 벗어나 비로소 내가 살 길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길 역시 옥포조선소 앞을 지나가는 길과 마찬가지로 생색을 내는 데 불과하다. 조선소 앞을 벗어나면, 그때부터는 그야말로 '정글'이나 다름이 없는 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연하해안로 도로 공사 구간.
 연하해안로 도로 공사 구간.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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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어에 박힌 나무 가시,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거제조선소를 지나 가조도 진입로까지, 14번 국도를 굶주린 사자 무리에게 쫓기는 한 마리 늙은 사슴의 심정으로 달린다. 뒤에서 으르렁거리며 달려오는 차들 때문에 잔뜩 겁을 먹고 자전거 위에서 허우적거리기 일쑤다. 그런데 그 와중에 갑자기 아랫배가 아파온다. 너무 긴장을 한 탓인지, 아니면 연하해안로로 들어서기 전에 점심으로 먹은 중국 음식이 잘못된 것인지 장이 제멋대로 부글거린다.

갓길이 분명하지 않은 국도 위에서 차들의 추격전은 계속되지, 배는 살살 아파오지 자전거를 타는 게 보통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당장 무슨 수를 써야 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가조도로 들어서는 길 입구에 사등면 면사무소 건물이 보인다. 여행을 다니면서, 관공서 건물이 이렇게 반가웠던 적도 없다. 건물은 지은 지 얼마 안 돼 무척 깨끗하다. 시설도 최상이다.

아무래도 오래간만에 너무 기름진 중국 음식을 먹은 게 탈이 난 것 같다. 볼일을 보고 나서는 온몸에 맥이 쭉 빠진다. 이럴 때 자전거만이라도 제 기능을 다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랫배의 고통이 사라지고 나니까, 이번에는 다시 자전거가 걱정이다. 그 사이에 앞바퀴가 또 탄력을 잃고 물렁물렁해졌다. 뒷바퀴보다는 확실히 상태가 더 안 좋다. 이 지경이 되면, 펑크를 수리하지 않고 견딜 재간이 없다. 결국 쉬어가는 김에 면사무소 한쪽 담벼락 밑에 주저앉아 수리를 시작한다.

어떻게 된 일인지 타이어에 또 나무 가시가 박혀 있다. 나무 가시 때문에 펑크가 난 게 내 기억에 올해에만 벌써 세 번째다. 예전에는 없던 일이다. 올해 이런 일이 계속 반복이 되고 있는 게 좀 이해하기 힘들다. 펑크를 수리하는 김에 뒷바퀴마저 수리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좀처럼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뒷바퀴를 잘못 다루면, 이전처럼 브레이크에서 또 심각한 소음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앞바퀴만 수리하고 나서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화장실을 급하게 다녀온 뒤라, 가조도 여행에 마음이 가벼울 리 없다. 가조도 역시 만만하게 볼 섬이 아니다.

가조대교
 가조대교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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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길이 없고, 유독 대형 차량이 많이 지나다니는 14번 국도
 갓길이 없고, 유독 대형 차량이 많이 지나다니는 14번 국도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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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번 국도에서 자동차들과 사투를 벌이다

가조도를 돌아 나와서는 다시 14번 국도로 올라선다. 왠지 사지로 들어서는 기분이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다. 우회로가 있으면, 멀리 돌아서 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그 길로 가고 싶다. 하지만, 이 근처에 다른 도로는 보이지 않는다(도로는 있는데 내가 찾아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거제도를 빠져나가려면 오로지 이 길을 달려야 한다.

갓길도 없는 도로를 다시 자동차들과 함께 달리면서 겨드랑이로 식은땀이 흐른다. 이곳에서는 자동차 운전자들의 운전 솜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거친 건 물론이고, 도로 위에서 발생하는 소음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요란하다. 단순히 자동차 소음만으로는 그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자동차가 전속력으로 달려가면서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박박' 긁거나 '퍽퍽' 쳐대는 소리다. 드르륵, 덜덜덜, 탕탕탕…. 온갖 요란한 소리들이 자동차 꽁무니를 따라다닌다. 그 소리가 내 귓속을 파고들어와 머릿속까지 강타한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사등면 사무소가 있는 곳에서 신거제대교까지, 14번 국도가 지나가는 구간은 약 5㎞에 불과하다. 긴 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그 이상이다.

나는 오늘을, 하루 종일 도로 위에서 자동차들과 사투를 벌인 날로 기록한다. 거제도의 14번 국도는 내 생애 최악의 도로다. 세상에 이런 길은 처음이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국도를 달렸지만, 이곳의 도로처럼 위험한 길은 달려보지 못했다. 자전거로 통행하는 데 지나치게 큰 위험이 따른다. 그런데도 우회할 길이 없다. 이 도로를 이대로 방치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신거제대교를 넘어서, 거제도를 빠져나와서는 통영시 죽림지구로 들어선다. 이로써 통영 시내에서만 벌써 삼 일째 밤을 맞는다. 무슨 인연으로 이곳에서 이렇게 긴 날들을 보내야 하는지 모르겠다. 웬만하면 오늘로 통영시를 벗어나 고성군으로 들어서고 싶다. 하지만 거제도를 벗어나서는 더 이상 자전거를 탈 의욕이 나지 않는다.

죽기 살기로 달려와 이젠 더 이상 위험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긴장이 풀리면서 손가락 하나 꿈쩍하기 싫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일찌감치 숙소를 찾아 기어들어간다. 오늘 하루 종일 17장의 사진을 찍었다. 이번에 여행을 하면서 매일 100여 장 이상의 사진을 찍은 것과 극히 비교가 된다. 그만큼 여유가 없었던 하루다. 오늘 하루 달린 거리는 82㎞, 총누적거리는 3770㎞다.


태그:#칠천도, #가조도, #거제도, #물안해수욕장, #칠천량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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