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라브디아즈 감독의 영화를 봤다. 20분씩 2번의 인터미션까지 합쳐서 모두 6시간 40분의 시간이 흘렀다. 쉬지 않고 보면 100분 정도의 영화를 4편을 볼 수 있는 긴 시간. 그런데 내가 본 것은 기껏해야 한 작품이었다. 그것도 결코 쉽게 접근하기 애매한 영화.

지난 2009년, 나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라브 디아즈 감독의 480분짜리 영화 <멜랑콜리아>를 본 적이 있다. 영화 상영 종료 직후 담당 영화평론가는 "9시간(인터미션 포함)을 이겨낸 여러분들은 승리자"라고 말할 정도였다. 굉장히 집중해서 본 <멜랑콜리아>는 불행히도 이후 어떤 장면도, 무슨 내용인지도 생각나지 않는 영화가 됐다. 하지만 <멜랑콜리아> 덕분에 나는 이후 2~3시간 정도의 영화를 어려움없이 볼 수 있었다. 또한, 라브 디아즈라는 필리핀 감독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됐다.

그리고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그의 최근작인 <출산의 세기>를 보게 됐다. 영문 제목은 < Century of Birthing >. 영화는 6시간 동안 1세기(100년)를 다룬 것처럼 긴 호흡으로 이어졌다. 나는 <멜랑콜리아>를 볼 때처럼 눈을 부릅뜨고 6시간 40분을 견뎌냈다. <출산의 세기>는 가볍게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

미쳐버린 여자에게 남은 것은 '아이의 출산'

 사이비 종교에 심취하지만 결국 미치게 되는 여자

사이비 종교에 심취하지만 결국 미치게 되는 여자 ⓒ 전주국제영화제


영화는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여자와 오랫동안 영화 작업에 몰두했지만 완성품을 쉬이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 영화감독의 이야기를 중첩적으로 그리고 있다. 교차 편집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두 이야기는 하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보이게끔 만들어주는 것은 영화 속 감독이 만들고 있는 작품 때문이다.

영화 속 감독이 편집 중인 작품은 수녀 생활을 그만두고 세상을 온몸으로 경험하려고 하는 여자와 몇십 년 동안의 수감 생활을 끝으로 사회에 복귀한 한 범죄자의 이야기다. 그들은 한 축제를 통해서 만나게 되고 서로의 아픔을 꺼내 보인다.

그런데 이 영화 속 이야기가 본래의 두 인물(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여자와 영화감독)의 이야기와 연관지을 수 있는 이유는 인물들이 묘하게 닮았기 때문이다. 여자는 여자대로, 남자는 남자대로.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여자는 동료들을 이끌고 모범적으로 교리를 배우거나 성가 부르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날, 그들을 묘연히 방문한 한 사진가에 의해 여자의 삶은 풍비박살난다. 사진가는 자신의 집에서 여자를 강제적으로 범한다. 이후 사진가는 여자가 사이비 종교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자유를 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강간했다고 고백한다.

여자는 자신이 맹종하는 종교자(신부·아버지)의 권위를 위협하는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여자의 삶은 사진가로 인해 나락으로 빠져든다. 여자는 끝없는 계단을 오르거나 수년 만에 다시 찾아간 어머니 곁에서 그녀를 간호하며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간다.

하지만 신부는 이미 처녀의 몸이 아닌 그를 받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신부는 충격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여자는 다시 그곳에서 나와 도시로, 다시 시골로 점차 흡수되듯 버려지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만큼 혼돈 상태에 빠지게 된다. 충격 때문에 미쳐버린 여자에게 남은 것은 자신을 구원해 줄 '아이'를 출산하는 것.

'미완성' 영화감독, 노래에 홀리다 애를 받다

 자연을 향한 또다른 외침과 변화

자연을 향한 또다른 외침과 변화 ⓒ 전주국제영화제


한편, 남자는 영화 만들기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지만, 마감 날짜를 지키지 못한다. 그의 친구들(콜센터에 다니는 여자친구나 그의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와 주변 감독들)은 그런 그에게 도움을 주지만 영화의 완성은 머나먼 이야기다.

그는 친구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거나 똑같은 영화를 계속 보면서 자르고 붙이기를 반복할 뿐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영화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어떤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하나둘 깨닫게 된다. 그러던 중 콜센터에 다니는 친구와 여행 중에 여자친구가 자신의 애를 지워서 내장 쪽에 심각한 병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고 충격을 받는다. 그는 여자친구를 병원에 두고 돌아오는 길에 시골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 다시 기운을 차린다. 그리고, 순간 자신 앞에 나타난 미친 여자(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여성)가 부르는 노래에 이끌려 그 여자를 쫓아가게 된다. 이후 그 여성의 아이를 받게 되는 진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라브디아즈 감독은 6시간 동안 롱테이크 방식으로 영화를 진행해 나간다. 별다른 컷이 느껴지지 않을만큼 배우의 움직임과 배경을 시작부터 끝까지 숨 조리듯 따라간다. 아마도 이 영화의 총 장면 수는 일반 영화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거나 오히려 더 적은 듯하다.

등장인물의 고통... 관람객도 함께 느끼게 돼

 미친 여자와 미친 여자를 뒤에서 바라보는 영화감독

미친 여자와 미친 여자를 뒤에서 바라보는 영화감독 ⓒ 전주국제영화제


주인공들이 겪는 고통만큼 이 영화의 장면을 따라가는 것 역시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고통의 과정'이 될 수 있다. 감독은 관객 또한 주인공이 겪고 있는 고통의 과정에 동참하라고 손짓하고 있다.

또한, 최대한 인위적인 것을 배제한 채 주변 공기를 화면 안에 등장시킨다. 도시의 오토바이 소리와 자동차 소리, 자연 속 바람소리와 빗소리등을 그대로 잡아냈다.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여자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소리를 아예 줄이거나 삭제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남자 주인공(영화감독)이 나오는 부분과 그 여성이 등장하는 부분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영화감독으로서 주변의 모든 상황들을 제어해야 하는 남자는 도시의 소음안에 갇혀 홀로 영화 편집을 해야 하는 처지다. 반면, 여성은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것을 타인의 인위적 행위로 인해 방해받고 미쳐버리고 사회로부터, 신앙으로부터 고립돼기 때문에 사운드를 지극히 조용하게 설정한 것이다.

신부(아버지)로 부터 용서받지 못한 여자는 결국 아이를 낳는다. 자연을 향한 울부짖음은 또다른 자연을 탄생시킨다. 영화는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들이 모두 사라진 숲과 강의 모습을 조용히 담는다. 세기는 변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불신으로 가득하거나 사이비와 같이 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산재돼 있다.

감독은 이런 현실의 괴로움을 영화 속에 담는다. 영화만이 시대의 증거물이 되고, 삶의 흔적이 된다. 라브디아즈는 이 긴 시간동안을 함께한 관객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출산의 고통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삶은 새 시대를 탄생시키기 위한 출산의 고통일까. 해답은 관객 스스로 찾아야 할 물음표로 남은 채 행방불명된다.

덧붙이는 글 <출산의 세기> [라브디아즈 (필리핀) | 2011 |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전주국제영화제 출산의 세기 라브 디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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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 2008 시네마디지털서울 관객심사단 2009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관객심사단 2010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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