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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이때만 해도 어머니가 건강해 보인다. 모처럼 엄마와 수다를 떠는 딸과 며느리.
▲ 어머니이며 여자이고 '나'인 그녀들 2006년 이때만 해도 어머니가 건강해 보인다. 모처럼 엄마와 수다를 떠는 딸과 며느리.
ⓒ 이경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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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내가 엄마가 되어있다. 며칠 전 집앞을 산책하다가 '엄마손칼국수'라는 간판을 발견한 딸아이가 "왠지 '엄마'라는 말이 들어가면 맛있을 것 같애, 이모나 고모가 들어간데도 많지만 엄마...하면 느껴지는 그런게 있잖아"라고 했다.

이 녀석은 요즘 아이들에 비해 엄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듯한데 아마도 제 엄마가 지나고 있는 이혼이라는 평범치만은 않은 시간의 아픔을 느끼고 있기 때문인 것도 같다. 그러나 딸과 나는 이 과정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글쎄, 그렇기는 한거 같은데... 만약에 들어갔다가 엄마라는 말은 있는데 맛이 없으면 어떨까?"
"그러면 우리 엄마 같은 엄마인가보다 하는 거지. 내가 말한 건 친구 엄마가 해주는 맛이거덩."

내 음식 솜씨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딸 녀석과 까르르거리며 길가의 보라빛 엉겅퀴가지를 꺾었다. 내가 음식솜씨없는 것은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물론 천성도 있겠지만 우리엄마를 잘 아는 친구는 '네 어머니의 간단하게 만드는 음식에서 기인했을거야' 한다. 그런 것도 같다.

보통사람은 '엄마의 느낌'하면 구수한 된장찌게라든지, 보릿고개같은 궁핍 속에서도 참외를 깎아주는 손길을 기억하는데 나는 엄마의 음식이라면 어느 여름날의 허옇고 짜기만한 김치가 떠오른다. 열너댓살쯤 되었던 그해 유독 고추가루가 비쌌던 적이 있었는데 엄마의 김치는 해도 해도 너무했다. 여름날 고무다라 물통 속에서 건져진 김치는 백김치도 아닌것이 드문드문 검붉은 고춧가루가 붙은 푸르딩딩하고 뜨뜻 미지근한게 왕성한 허기에도 불구하고 먹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시절 다 어려웠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은 엄마가 이리저리 마련한 맛있는 것들에 대한 추억들을 가지고 있는데 내겐 그런 다정한 추억보다는 악착같이 무엇인가에 늘 매달려 있는 엄마의 모습이 있다. 몇번의 사업실패가 있었지만 나중에는 평생 교직에 계셨으니 그럭저럭 먹고사는 문제는 없었을 것 같은데 우리 엄마는 왜 그렇게 지독하게만 살아야 했을까?

"아빠! 모두가 '예스'라고 말할 때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있어요?"

언젠가 동생이 오래된 광고카피를 예로 들며 아버지의 우유부단함을 꼬집어 농처럼 한 말이었는데 아버지는 한술 더 떠서 "뭇혀(못해)~ 평생 노라고 말 해 본 적 읎어~" 하시자 옆에 계시던 엄마의 일설이 시작되었다.

"아이구~ 노를 어떻게 해, 무조건 오케이지 내가 그런 느이 아배 뒤치닥거리하느라 고생한거 말하자면 책 열두 권도 더 써."

누구생인들 사연이 없을까만은 여자들 특히 우리 어머니들은 모두 책 열두권을 쓰고도 남는다. 책 열두권도 넘는 길고 반복되는 이야기가 또 시작되었다.

"사업이네~하고 서울서 그렇게 고생시키고도 여기 내려와서도 학교에서 선생들이 돈 빌려달라고 하면 어떻게 한 줄 아냐? 돈 줄은 내가 쥐고 있으니까 빌려 줄 수 없잖아?  그러면 없다고 하면 될텐데 다른 선생한테 '나 믿고 빌려주세요하는 거야' 그러다 그 선생이 못 갚으면 그 덤탱이를 쓰고 그제서 나한테 말하는 거야 너도 조종남 선생님 알지? 그 선생도 그만두는 바람에 그때 1400만 원이었어... 한둘이 아니야..."

엄마의 사연은 끝이 없다. 아버지는, 아니 아빠는 우유부단하고 사람 좋기로도 고향의 작은 읍내에서 유명하다. 그래서 엄마도 아버지에 대해 모든 걸 다 타박하면서도 "인복하나는 타고났다니까" 하신다

오십이 다 되어 가는 우리 남매들이 아직도 아버지라는 호칭보다 '아빠'라는 유아기적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어머니를 대신했던 아버지의 다정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어린시절부터 엄마보다 아빠가 좋다는 것을 입에 달고 살았고 그 시절 한방에서 잠자리에 들 때면 엄마 옆이 아닌 아빠 옆에 누워자려고 4남매가 쟁탈전을 벌이곤 했었다. 모든 사랑은 아빠에게로 향했고 모든 힘겨움은 엄마에게로 남겨졌었다. 악바리같은 엄마에게로. 그런 엄마가 나에게는 또 하나의 불편함이있었다.

엄마는 담배를 피웠다. 학교를 막 들어가던 무렵이었으니 우리나이로 여덜살쯤 되었을 때다.

"요 앞에서 사지말고 저기 골목 나가서 오른쪽으로 쭉 올라가면 담뱃가게 하나 있어, 새마을이다?"

아빠가 설계했다는 마당 넓은 집에서 갑자기 남의 집 단칸방으로 이사했을 때였다. 격동의 세월이었다고 하는데 어린 나에게는 요동의 세월이기도 했다.  왜냐고 묻지 않았다. 왜 가까운 담배가게 두고 멀리 가서 사 와야하는지 묻지않았다. 그리고 왜 엄마손으로 직접 사지 못하는지. 그 어린나이에도 알고 있었다. 여자가 담배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엄마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담배를 피웠고 간혹 담배 심부름을 하는 내게도 피는 모습을 들키면 움찔해하며 돌아 앉아 손사례를 쳤다. 이제 담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아도 괜찮은 연세가 되었지만 엄마는 여전히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만 담배를 피신다. 한 여름이건 한 겨울이건 베란다에 나가서 베란다문을 닫은 채 혼자 피신다.

아버지를 그렇게 구박하면서도 가장 반듯하고 잘생긴 음식이 아버지 것이고 밥주걱 끝으로 긁어 내린 것이 당신것이어야 하는 공자가 온 몸에 섞여 있는 어머니에게 여자가 피는 담배는 천형같은 거였다.

내가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갔다.

"엄마 추운데 그냥 들어와서 피우세요, 다 알고... 이제 그렇게 해도 되잖아요."
"들어가 불편해~"

손사레를 치는 엄마 옆에 억지로 쭈그리고 앉았다.

"그렇게 무서운 담배를 왜 피우기 시작했어?"
"후~ 아무래도 몸에 맞으니까 피웠겠지?"

담배 연기 속에서 엄마 눈길이 아스라이 먼 곳을 향했다.

"그냥... 어느날 밤 너무 막막해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공터에 앉아 있다가 한번 피워 보고 싶었어. 굉장히 어지러웠는데... 그 다음날 또 하고 싶은거야. 그래서 밤에... 아무도 없는 그 공터로 또 갔지..."

엄마의 토막말들이 그 시절 혼자 남겨진 공터로 갔다. 빚쟁이들에게 쫒겨 아버지가 먼저 시골로 피신했고 집마저 압류당해 동생들도 뒤이어 보내지고 취학기에 있던 나와 엄마만 단칸방에 남겨졌던 그 시절로. 엄마가 한밤에 공터에서 어지러움 뒤에 찾을 수 있었던 잠깐의 안정을 세상은 인정해 주지 않았다.

아니 당신 스스로도 인정할 수 없었다.  당신 스스로 쓰고 있는 여자라는 굴레때문에. 엄혹했던 시간에 공장 월급의 일부를 차압당해가며 아버지의 빚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에 정착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았던 것도, 그 엄청난 4남매의 등록금들을 다 마련했던 것도, 엄마의 역할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내가 엄마가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엄마! 또 급식비 안넣었어?"
"어? 어어... 깜박했어."
"자꾸 왜 그래 챙피하게."

내게도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 아들 녀석은 매번 엄마가 잊어버리고 급식비를 안 넣은 줄 알았던 시간들. 원래 먹는것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지만 비정규직의 하루종일을 김밥 한 줄로 때우고 점심식대를 아끼며 아이들을 챙겼던 시간, 나는 혼자서 종종거리며 아이들 모르게 그런 시간들을 지나왔다. 냉장고에 우유가 떨어졌는데 당장 손안에 만 원이 없었던 순간이 있었다.

"엄마는 국수 좋아하잖아?"

다 자라 그래도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20대 쯤, 집에서 점심 메뉴를 정할 때였다.

"엄마 옛날에 국수 좋다고 맨날 국수만 먹었잖아!"

갑자기 엄마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눈물까지 지으시며 서운해 하셨다.

"국수?  생각만 해도 물려... 너는 엄마가 정말 국수를 좋아했다고 생각하니?"

나는 어쩐 일인지 어렸을 때부터 면 종류를 싫어했다. 국수는 물론이고 그 시절 모두가 좋아하는 짜장면, 라면. 그래서 엄마와 단둘이 단칸방에 남겨졌을 때도 나는 항상 밥을 먹었다. 겨울이면 엄마는 내 밥만 이불 속에 한 그릇 묻어놓고 엄마는 국수를 삶거나 수제비를 해 드셨다. 난 수제비도 싫어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의 수제비는 맛나게 국물을 내거나 재료를 푸짐하게 넣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수제비를 싫어한다는 편견으로 수제비를 먹지도 집에서 해보지도 않았었는데 어느날 우연히 아이들이 먹자고해서 인터넷 레시피를 보며 엉성하게 했는데도 맛이 그럴듯 했던 것을 보면 수제비가 맛이 없었던게 아니고 '우리 엄마의 수제비'가 맛이 없었던 모양이다. 식구도 없이 혼자 드시는 수제비 국물을 맛나게 내지도 않고 간단하게 맨 소금같은 것으로 간을 했었을 것이다.

공장생활하는 내내 엄마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셨다. 공장식당이 있고 매일 식권이 나오는데도 엄마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셨다. 대신 쓰지 않고 모았던 식권으로 월말이면 한박스씩 과자며 빵으로 바꾸어 내게 한달에 한번씩 호사를 맛보게 하셨다.

아직도 화장실 변기물을 모아서 내리고 설거지물 모아 재활용하고 알뜰함을 넘어 아착같이 세월을 살아 오신 어머니도 결혼 전에는 부잣집 고명딸이었다. 세월이 엄마를 그렇게 몰고 갔던 것일까?  어머니라는 이름이 여자를 버리게 했었을까.

가끔 서울에 올라오시면 아직도 아들집이 아닌 딸인 내 집에서 머무시는데 딸이 편한것도 있겠지만 아마도 베란다에서나마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곳이 내 집이라 그런게 아닌가 싶다. 내가 어머니에게 해 드릴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어머니의 한스러운 시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를 그냥 같이 듣는 것이다.

나는 동생에게도 '너도 빨리와서 숙제해!'라고 농처럼 말하지만 동생은 바쁜 와중에도 내가 농으로 던지는 숙제를 열심히 한다. 그 세월을 살았던 다른 어머니에 비하면 우리 어머니의 고생이 더 할 것이야 없지만 고생의 크기가 사람에게 모두 같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도 꿈을 꾼다니까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날 좋아했던 사람이... 얼굴은 모르겠는데 내 뒤에서 이러어~케 안는거야..."

엄마는 당신의 팔을 벌려 누군가를 안고 다시 그 벌려진 팔에 당신의 어깨를 묻었다.

"그러면 그 느낌이 너무 좋은데.. 아 참! 나는 다 늙었지?  그러면 가슴이 철렁하고 가슴이 뻥 뚤리는거야."

엄마의 꿈 얘기는 나는 벌써 여러번 들었건만 들을 때 마다 가슴이 먹먹하다. 동생은 엄마의 허허로움에 눈물을 찍고 나는 코 끝으로 몰리는 뜨거움을 감추었다. 칠순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는 꿈 속에서 여자로 돌아갔다. 어머니를 연모했다던 젊은날의 청년을 조카 결혼식에서 젊잖은 노신사로 만나 "그리워했습니다" 라는 한마디에 아직도 설레여 하는 어머니는 여자였다.

이제 경제적 안정은 찾았지만 몸은 노쇠해 걸음을 옮기기 조차 어려워하신다. 이기적이었지만 여자와 어머니 그리고 세상이 만들고 옥죄이던 관습의 세월에서 당신 스스로의 삶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셨던 엄마. 그 모든 것에서 놓여나게 하고 싶은데 그게 그냥 당신이 되어 가슴에 한으로만 남은 당신.

건강하세요, 제가 자주 숙제하러 갈께요. 숙제하며 길게 엄마랑 맞 담배나 피워야겠다.

덧붙이는 글 | '나의 어머니' 응모 기사입니다.



태그:#어머니,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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