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안에 개봉할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영화가 나타났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발견한 여러편의 영화 중 <1999, 면회>는 청춘을 기억하려는 이들이나 청춘을 추억으로 남기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충만한 기쁨을 안겨줄 작품이다. 부디 이 작품이 널리 알려지길 바라는 심정은 감독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 작은 극장을 공유했던 이들 역시 같은 생각을 가졌으리라 확신한다.

내 인생의 영화를 꼽으라면 난 항상 주저하지 않고 임순례 감독의 <세 친구, 1996>라고 말하곤 한다.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진 세 친구의 이야기는 스무살이었던 나의 마음을 여러 번이나 움직였다. 아직도 난 그때 거실 비디오의 재생 버튼을 누르고 멈춤 버튼을 누를 때까지의 내 표정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세 친구의 겉모습은 그 누구도 나와 닮아 있지 않은데 이상하게도 난 그들에게 동요되어 그들의 우울한 정서를 그대로 내 맘 속에 흡수했던 것 같다. 그 영화를 본 1999년은 내겐 그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군입대를 며칠 앞둔 상황이었고 지독히도 우울했다. 그래서일까? 영화에 나오는 그들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군대간 민욱을 찾아간 승준과 상원, 하지만 그들의 맘은 편하지만은 않은데.

군대간 민욱을 찾아간 승준과 상원, 하지만 그들의 맘은 편하지만은 않은데. ⓒ 부산국제영화제


<세 친구>는 '군대'라는 큰 줄기에 잎을 피워 나간다. 군대를 가지 않으려는 삼겹, 어쩔 수 없이 군대에 끌려가지만 고참의 폭력으로 되돌아오는 무소속,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섬세를 통해서 청춘은 어떻게든 방황하며 보낼 수밖에 없는 시간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무소속'이 군대에서 한쪽 청력을 잃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에서 삼겹과 섬세의 부름을 못알아듣는 장면은 지금까지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물론 그때, 1999년 그 영화를 보고나서 바라본 하늘의 색깔은 잿빛이었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지 가야하는 공간. 그때는 IMF가 터진 직후라 몇몇 친구들은 정말 어쩔 수 없이 군대로 내보내져야 했었다. 술 한 잔 기울여가며 군대에 먼저 간 친구들의 이야기를 하고,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그렇게 1999년은 가고 나 역시 그 해가 가기 전 군대라는 터널을 통과해야만 했다.

<1999, 면회>를 보는 내내 <세 친구>가 떠올랐다. 물론 소재만 비슷할 뿐 내용과 정서는 <세 친구>와 멀리 떨어져 있다. 임순례의 작품이 우울한 그림자의 정서라면 김태곤의 2번째 장편(첫번째 장편은 <독>)은 그보다 훨씬 밝고 유머러스하다.

무엇보다도 제목그대로 '면회'라는 소재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곁다리를 치지 않고 한 곳에 집중해 가는 간결함이 돋보인다. 2000년이 되기 1년 전, 그때 그 모습과 상황들을 매우 디테일하게 표현해 내어 절로 웃음짓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무엇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디 배우들의 생생한 연기가 영화에 집중하게 만든다.

 황폐한 얼음위를 걷는 소년들

황폐한 얼음위를 걷는 소년들 ⓒ 부산국제영화제


그때 그 시절에 스무살을 맞이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가 많이 웃고 함께 씁쓸해하며 이내 가슴이 멍해질 것이다. 나또한 나의 스무살 시절을 떠올리며 영화에 자연스레 스폰지처럼 빨려들어갔다. 그때는 정말 그것이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푸르고 꿈많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어서 맘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여기서 멈출 수 없게 만드는 또다른 매력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매끄러운 에피소들의 나열이다. 자칫 다른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개연성없는 에피소들의 나열이 이 영화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면회'와 관련된 에피소들은 심도있게 연결되고 그럴법한 이야기로 확장되어 간다. 상원(심희섭)과 승준(안재홍)은 군대에 간 친구 민욱(김창환)에게 면회를 간다. 서울에서 강원도까지의 거리는 굉장히 가깝게 지냈던 그들에게는 생소하게도 오래걸리는 시간만큼 멀고도 멀다. 꽁꽁 얼어붙은 거리와 강. 그들이 길바닥에 싸놓는 오줌마저 금방 얼어버릴 듯한 추위는 가뜩이나 긴장된 마음을 더욱더 심화시킨다.

해가 지고 있는 것인지 한참 중천에 있는 것인지도 구별할 수 없을만큼 무심한 하늘 아래서 승준은 상원에게 민욱의 여자친구 에스더가 보낸 이별편지를 자신이 전달해야함을 고백한다. 그때부터 상원과 승준의 마음은 편하지 않다. 하지만 스무살, 그 패기어린 나이만큼 그들은 민욱을 보자마자 이내 모든 것을 잊고 고기와 소주를 마시고, 논 위에서 몸싸움을 벌이고 사진도 찍는다. 마지막으로 밤새 몇 짝의 술을 마시며 종업원들과 노래를 부른다. 결국 에스더의 이별편지는 민욱에게 전달되지 못한다. 꽁꽁언 논 위에서 잃어버린 승준의 카메라처럼 이별편지도 끝내 그들의 손에 되돌아 오지 못한다

 다방 종업원들과 외출밤을 보내는 세 친구

다방 종업원들과 외출밤을 보내는 세 친구 ⓒ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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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종일관 긴장감 있게 전개되는 이야기의 원동력은 앞서 언급했었던 에피소들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면회를 가기까지의 과정과 민욱을 만나고 고참에게 꾸지람을 듣고 난 후 허름한 고깃집에서 술을 마시는 등의 에피소들은 억지나 비약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로 현실적이다.

특히 김꽃비가 모두를 사로잡는 종업원으로 등장하는 다방 장면은 비록 그곳을 경험하지 않은 관객이라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는 부분이다. 모두가 약점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들인데 그들이 한데 모여 아무 문제없이 '우리도 사람이었지'라고 말하는 듯 취하며 쓰러져갈 때까지 즐겁게 노는 장면은 이내 잊을 수 없는 감흥을 전해준다. 버릴 게 없는 에피소들 중에서도 그 장면은 백미다.

말할 수 없는 상실감은 누구나에게 찾아온다. 승준은 그가 그토록 아끼던 카메라를 잃고 민욱은 여자친구를 잃었으며 상원은 처음 본 여자에게 순결을 잃는다. 그들에겐 모두다가 소중한 것들이지만 이제 추억 속에 묻어두어야 할 것들이기도 하다. 승준은 자신이 무척 아끼던 카메라였기 때문에 분명히 다시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민욱 역시 마지막까지 여자친구가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아도 그것이 이별이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어하며 하룻밤을 같이 한 다방 종업원과의 만남이 돈을 더 지불해야하는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상원은 인정하고 싶지 않다.

 부대로 돌아가는 민욱을 바라보는 승준과 상원

부대로 돌아가는 민욱을 바라보는 승준과 상원 ⓒ 부산국제영화제


하지만 그들은 자신에게 다가온 믿을 수 없는 상실감을 모두다 스스로 이겨내야 함을 깨닫는 순간을 맞이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을 함부로 말할 수 없지만 불현듯 찾아오게 될 것은 그들을 보면 분명해 보인다. 모두 기억하지만 이제는 찾을 수 없는 스무살의 추억들, 1999년의 그때를 반추하는 의미있는 영화가 불현듯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때 우리 모두는 햇살좋은 곳을 씩씩하게 걷는 밝게 빛나는 소년이었으리라.

부산국제영화제 김태곤 김창환 심희섭 안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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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 2008 시네마디지털서울 관객심사단 2009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관객심사단 2010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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