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파평윤씨 5세 문숙공 대원수 윤관장군 영정 사진
 파평윤씨 5세 문숙공 대원수 윤관장군 영정 사진
ⓒ 윤도균

관련사진보기


▲ 문숙공 윤관 대원수 추향제 문숙공 윤관 대원수 추향제에 참가한 파평윤씨 후손들이 추향제를 모시는 실황을 취재한 동영상이다.
ⓒ 윤도균

관련영상보기


우리나라 최대 "용미리 석불 입상"을 만나다

지난 11월 14일(수요일)은 경북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에 있는 파평윤씨 시조 태사공 할아버지 추향제를 모시고 왔고 오늘(2012.11.18)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는 파평윤씨 5세 문숙공(윤관장군) 추향제를 모시려고 집안 조카와 동생과 함께 오전 9시 반 인천에서 외곽순환고속도로를 달려 용미리에 도착하니 10시 20분이다.

아직 추향제 모시는 11시까지는 40여 분간의 여유가 있어 마침 인근에 있는 "용화사" 경내를 지나 좌측으로 오르면 우리나라 최대 석불인 "용미리 석불 입상"이 있는데 일부러 이곳에 오기 쉽지 않아 잠시 용미리 석불 입상을 돌아보기로 하고 계단을 오르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야옹하면서 우리를 반겨 맞이한다.

산에 사는 고양이는 대부분 사람을 보면 곁을 안 주는데 이 아이는 사람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에게 달려와 몸을 비비며 어리광을 부려 하도 신기해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얼마나 좋아하는지 유난히 동물을 좋아하는 동생이 고양이를 앉고 "용미리 석불 입상"을 한 바퀴 돌아도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별놈 다 봤다. 나중에 내려오다 용화사 스님께 여쭤보니 버려진 고양이를 데려다 밥을 주고 키운 아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최대 “용미리 석불 입상”을 만나다.
 우리나라 최대 “용미리 석불 입상”을 만나다.
ⓒ 윤도균

관련사진보기


문숙공 윤관장군 추향제 진설 제물
 문숙공 윤관장군 추향제 진설 제물
ⓒ 윤도균

관련사진보기


여진정벌의 명장 "문숙공 대원수 윤관장군" 추향제

그 바람에 20여 분이나 시간이 지나 서둘러 문숙공 "윤관 대원수" 묘역에 도착하니 파평윤씨 공신공(2 世諱 先之), 복이야 공(3 世諱 金剛), 문정공(4 世 諱 執衡) 3位 세 분에 대한 망제는 이미 끝이 났다. 나는 11시부터 세 분에 대한 망제를 모시고 문숙공 할아버지 추향제를 모시는 줄 알았는데 내가 착각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안심인 것은 문숙공 할아버지 추향제를 모시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급한 김에 서둘러 전국 팔도에서 모인 파평윤씨 후손 제관들이 제례 준비를 하고선 문숙공 묘역에 오르니 동생과 조카가 보이질 않는다. 문숙공 윤관 대원 할아버지 추향제에 참석한 종친들이 "인산인해"를 이뤘기 때문이다. 그래 어쩔 수 없이 전화를 해 추향제 끝나고 점심때 만나자고 연락을 해놓고 나는 제단 주변에서 열심히 취재를 한다.

이날 파평윤씨 5세 "문숙공 윤관 대원수" 할아버지의 추향제는 (초헌관 후덕 厚德, 아헌 관 호 중 昊重, 종헌 관 관석 官石, 집례 태의 泰義, 대 축 열상 烈相) 제관 3분이 모두 파평윤씨 현역 국회의원이 되어 종친들로부터 환심을 사는 가운데 "강신례, 참신례, 독 축, 참헌례"를 끝으로 파평윤씨 5세 문숙공(諱瓘) "윤관 장군"할아버지의 추향제를 모두 마쳤다.

추향제를 마치고 점심 시간인데 예년에는 해마다 마을(파평윤씨 문중) 종친들이 손수 음식장만을 해 점심 제공을 했는데 올해는 도시락 업체에서 만든 점심이 제공돼 추향제를 모신 종친들이 따스한 초겨울 햇빛 아래 잔디 위에 앉아 식사를 하며 막걸리를 한잔씩 나누며 오가는 전국 팔도 파평윤씨 종친들의 대화가 시간 가는줄 모르고 무르익는다.

문숙공 윤관장군 추향제 진행 모습
 문숙공 윤관장군 추향제 진행 모습
ⓒ 윤도균

관련사진보기


문숙공 윤관장군 추향제에 참가한 제관들이 집례의 진행에 따라 추향제를 올리고 있다.
 문숙공 윤관장군 추향제에 참가한 제관들이 집례의 진행에 따라 추향제를 올리고 있다.
ⓒ 윤도균

관련사진보기


파평윤씨 * 청송심씨의 산송(山訟)

점심이 끝나고 먼 곳에서 오신 종친들은 서둘러 시조 태사공께서 탄강하신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늘노리 350 - 1 용연 (龍淵) 파평윤씨 성지를 향해 떠나고 나는 400년 가까이 묘지 다툼을 벌여온 조선시대 명문가 파평 윤(尹)씨와 청송 심(沈)씨 가문이 2005년 8월 5일 청송심씨 문중에서 파평윤씨 측에서 제공한 2,500평 부지로 이장키로 합의한 "파평윤씨 청송심씨 화해 기념비"를 관심을 두고 돌아본다.

조선 중기인 16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1593~1662)이 명당으로 꼽히는 윤관 장군 묘 바로 뒤에 부친 묘를 조성했고 본인도 죽어서 부친의 묘 옆에 묻혔다. 윤씨 종중은 이에 반발해 100여 년이 지난 1763년 심지원 묘를 일부 파헤쳤고 심씨 종중은 이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두 집안은 앙숙이 됐다.

파평윤씨 문중과 청송심씨 문중에선 조선시대에 여러 왕비를 배출한 대표적인 외척세력으로 당시 임금이던 영조(1694~1776)는 고민 끝에 윤관 장군 묘와 영의정 심지원 묘를 그대로 받들도록 해 두 문중의 화해를 구했다. 그러나 여기에 반발한 파평윤씨 일가가 이에 불복, "용미(龍尾 산소 뒷부분)를 누르는 심지원 묘를 이장해야 한다"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장살(매를 맞아 죽는) 형벌을 당함으로써 두 가문 간 원한은 더욱 깊어졌다.

그 후 두 집안은 1969년 7월에 양가 후손들이 화해각서를 교환하는 등 간간이 해결의 기미를 보였으나 번번이 최종 단계에서 실패했다가 2005년 8월 5일 양가 문중 후손들의 적극적인 화해 분위기 조성으로 드디어 양해각서가 체결되었으며 이를 공식으로 인정하기 위해 유홍준 문화재청장 입회하에 합의가 인정되어 2008년 10월 20일 심씨 문중의 묘를 모두 이장하고 "파평윤씨 청송심씨 화해 기념비"를 세웠다.

문숙공 윤관장군 추향제에 참가한 파평윤씨 후손들이 추향제를 모시고 있다.
 문숙공 윤관장군 추향제에 참가한 파평윤씨 후손들이 추향제를 모시고 있다.
ⓒ 윤도균

관련사진보기


문숙공 윤관장군 추향제에 참가한 파평윤씨 후손들이 점심을 먹기 위하여 줄을서 대기한 모습
 문숙공 윤관장군 추향제에 참가한 파평윤씨 후손들이 점심을 먹기 위하여 줄을서 대기한 모습
ⓒ 윤도균

관련사진보기


"파평윤씨 청송심씨 화해 기념비" 내용

400년간 윤*심 갈등의 해소를 하려고 파평윤씨 대종회장 윤정원과 청송심씨 대종회장 심명구는 전 경찰청장 강민창의 중재로 국민화합 차원에서 그간의 갈등을 해소하기로 하고 운문에서 2,500평의 묘지 땅을 증여하고 심문에서는 운문산에 있는 19기의 묘를 이장하기로 2005년 8월 4일 합의하여 130만 양 문중에 공포하였다.  

2006년 4월 11일경 KBS TV 일간신문에 "왕도 해결 못 한 400년 윤*심 갈등 해소"라는 제목으로 크게 보도되어 전 국민의 칭송이 잦았고 윤*심 문중에서는 기쁜 마음에 여충사 주변 정화 문제를 검토하던 중 청송심씨 측에서 이장허가 신청을 경기도에 냈는데 2006년 4월 21일 손 지사로부터 불허처분 통지를 받고 2006년 6월경 김문수 지사의 도움을 받아 이장 재신청 중 2007년 2월 20일 윤정원 회장 임기로 파평윤씨 대종회장 윤철병이 취임하여 재심신청 진행에 양대종회장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2007년 11월 2일 김문수 경기도 지사는 재심 신청 허가 결재와 이장허가를 하였다.

이에 전 국민이 환영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 윤정원 심명구 윤철병의 그간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며 130만 양 문 중은 서로 존경하고 화합하여 이 영광을 길이길이 후손들에게 남기게 되었다.

2008년 10월 20일 파평윤씨 대종회
회장 윤철병

동생, 조카와 함께 파평윤씨와 청송심씨 두 문중의 뜻깊은 화해 기념비를 새겨 읽으며 후손의 한 사람으로 늦게나마 날아갈 듯 마음이 가볍다. 그렇지 않아도 내 고향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파평산 아래 마산1리 용산동 파평윤씨 집성촌 종친회장을 맡은 사람으로 우리 마을 아랫동네 "지내올"이란 마을에 청송심씨 집성촌이 있는데 그 동네에 절친한 친구가 살고 있는데 이참에 언제 고향 가는길에 시간 내 친구와 함께 우리끼리 화해주라도 한잔해야겠다.

▲ 파평윤씨 * 청송심씨 화해 기념비 400년 가까이 묘지 다툼을 벌여온 조선시대 명문가 파평 윤(尹)씨와 청송 심(沈)씨 가문이 2005년 8월 5일 청송심씨 문중에서 파평윤씨 측에서 제공한 2,500평 부지로 이장키로 합의한 “파평윤씨 청송심씨 화해 기념비”를 관심을 두고 돌아본다.
ⓒ 윤도균

관련영상보기


파평윤씨 * 청송심씨 화해 기념비
 파평윤씨 * 청송심씨 화해 기념비
ⓒ 윤도균

관련사진보기


문숙공 대원수 윤관장군
문숙공 윤관
호 : 문숙공
이름 : 윤 관 (尹瓘)
관직 : 문신,무신
시대 : 1040(정종 6)~ 1111(예종 6) 

고려의 문신이자 무신으로 파평면 금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광탄면 분수리에 묘가 있다. 자는 동현, 호는 묵재, 본관은 파평, 고려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 신달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을 지낸 집형의 아들이다.고려 문종(文宗)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 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정벌에 나섰으나 여진의 강한 기병에 패하고 임기응변으로 강화를 맺고 철수하였다. 그 후 특수부대인 별무반(別武班)을 창설 대원수(大元帥)가 되어 예종2년(1107)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아 국방을 수비케하였다.윤관은 문무(文武)를 겸한 공신으로 예종6년(1111)에 돌아가자 1130년(인종 8)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 되었다. 

고려 예종(睿宗)때 여진정벌의 공을 세운 명장 윤관(尹瓘)의 묘로 묘역전체 규모가 상당히 크고 웅장하며 봉분과 석물이 단을 이루며 자리잡고 있다. 봉분아래는 장대석 모양의 호석(護石)을 두르고 봉분뒤로 담장을 둘러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봉분정면에 상석(床石)이 놓여있으며 왼쪽에 묘비가 서있다. 한계단 아래에 양쪽으로 망주석과 상석 전면에 사각의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장명등을 중심으로 각각 양편에 동자석, 문인석, 무인석, 석양, 석마등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묘역 아래에는 윤관장군의 영정이 봉안돼있는 여충사(麗忠祠)가 자리하고 있다.

- 파평 윤씨 홈페이지 참조


문숙공 윤관장군 대원수 사적비
 문숙공 윤관장군 대원수 사적비
ⓒ 윤도균

관련사진보기




태그:#윤관장군, #문숙공, #대원수, #여충사, #파평윤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