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볼.매.꾼의 활동 발표회 첫 순서로 화장을 지우는 세안식이 진행되었다.
▲ 화장을 지우는 ‘세안식’ 볼.매.꾼의 활동 발표회 첫 순서로 화장을 지우는 세안식이 진행되었다.
ⓒ 김예지

관련사진보기


느와르 영화에 어울릴법한 비지스의 노래 <홀리데이>가 흐르는 무대 위로, 한 여자가 터덜터덜 걸어온다. 비장함이 감도는 무대에서 여자가 한 일은 세수. 지쳐 보이는 여자는 비누로 거칠게 화장을 지워내고서야 비로소 생기를 되찾는다. 배경음악은 어느새 구성진 트로트 가락으로 변해 있다. 노래 제목은 <화장을 지우는 여자>.

10월의 마지막 날 저녁, 서울 중구에 위치한 서울시NPO지원센터 대강당 '품다'에서 '볼.매.꾼'의 활동 발표회가 열렸다. 볼.매.꾼은 '볼수록 매력 있꾼'의 약칭으로, 학내 외모 품평 문화를 바꾸기 위한 대학생 모임이다. 이들은 한국여성민우회가 2009년부터 이어온 20대 여성주의자 양성 프로젝트의 일환인 '물, 길' 5기로 활동하고 있다.

볼.매.꾼은 대학생이 취업준비와 자기관리의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외모 품평 문화와 그에 대한 압박을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풀어나가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지난 4월부터 활동을 시작했고, 동국대 총여학생회 '봄비', 숭실대 총여학생회 '다락', 한양대 총여학생회 '도담', 인권법률공동체 '두런두런' 등 총 6개의 단체가 함께하고 있다.

'아프냐고 묻지 마, 화장을 안 했을 뿐'이라는 제목의 '세안식'으로 문을 연 볼.매.꾼의 활동 발표회는 그간 볼.매.꾼이 진행한 활동 보고로 이어졌다. 소소한 활동들이 주를 이뤘지만, 재기발랄함이 돋보였다.

숭실대 총여학생회 '다락'은 학생들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에서 마저 외모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거울을 가리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동국대 총여학생회 '봄비'는 학내 곳곳에 붙어 있는 성형외과 포스터에 "You Look Fine(넌 좋아 보여)"이나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할게" 등의 문구가 적혀 있는 스티커를 붙였다.

한양대 총여학생회 '도담'에서 활동하고 있는 막하(활동명)씨는 "수업시간에 교수로부터 '화장을 안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외모 품평 문화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지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성형외과 포스터에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할게" 스티커 붙이기

동국대 총여학생회는 볼.매.꾼 활동의 일환으로 성형외과 포스터에 스티커 붙이기 캠페인을 진행했다.
▲ 동국대 총여학생회의 스티커 붙이기 캠페인 동국대 총여학생회는 볼.매.꾼 활동의 일환으로 성형외과 포스터에 스티커 붙이기 캠페인을 진행했다.
ⓒ 볼.매.꾼 페이스북

관련사진보기


이어 이들은 지난 6월 30일부터 9월 30일까지, 총 세 달간 진행한 '취업현장 외모요구사항 실태조사'의 결과를 소개했다. 이 설문조사는 온라인 및 오프라인으로 진행된 것으로 총 195명이 참여했는데, 이 중 90.8%가 여성이다. 또 응답자 중 55%는 취업 전선에 맞닿아 있는 대학교 3~4학년 학생들이다. 이들은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하여 인턴, 비정규직, 정규직으로 취업했던 경험을 토대로 설문조사에 참여했다.

한양대 총여학생회 '도담'에서 활동하고 있는 진기(활동명)씨는 설문조사에서 주목할 만한 지점을 짚어나갔다. 특히나 '취업 준비 중인 직종이 외모에 많은 영향을 받는 직종입니까'라는 질문에 '예'라고 답한 비율이 40%였으나, '취업 활동 시 외모 관리에 부담을 느끼십니까'라는 답변에는 '예'라고 답한 비율이 66%에 달한 점을 들며, 업무와 외모의 관련성이 없는 직종을 준비하는 학생이라 하더라도 외모 관리에 부담을 느낀다는 점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면접 과정 중에 면접관에게 외모에 대한 칭찬(지적)을 받은 일이 있느냐'는 질문에 "요즘 세상에 누가 대놓고 면접 자리에서 외모에 대한 지적을 하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놀랍게도 51%의 응답자가 그런 경험이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외모로 인하여 취업에 불이익을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13%가 긍정했는데, "면접에서 떨어졌는데 다시 전화가 와서 '양심이 있으면 성형이라도 하고 살아라'라고 말했다", "벌레를 닮았다고 하루 일하고 잘렸다", "청소를 못하게 생겼다"는 등의 구체적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진기는 "애매모호한 기준들에 의해서 취업에 많은 불이익을 겪는 경우가 있다"며 "차별이 너무 당당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러한 설문조사 결과를 분석하던 진기씨도 발표 말미에 "'우리가 입사 담당자라면 외모를 보지 않고 뽑을 수 있을까?'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 막막했다"는 일화를 전했다. 진기는 "사실 이런 상황에서 '예쁘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며 고충을 털어놓았지만, "(그렇기에) 이렇게 목소리를 내고 기록을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정리했다.

"벌레 닮았다고 하루 일하고 잘려"... 외모 때문에 취업 불이익 '13%'
서울시NPO지원센터 대강당에서 진행된 볼.매.꾼 활동 발표회 현장 모습
▲ 볼.매.꾼 활동 발표회 현장 모습 서울시NPO지원센터 대강당에서 진행된 볼.매.꾼 활동 발표회 현장 모습
ⓒ 김예지

관련사진보기


행사의 마지막 순서로 '학내 여성주의 활동 이후의 나', '학내 여성운동의 새로운 이슈 발굴', '총여학생회 선거에서의 남학생 투표권 요구', '반여성주의적 상황 대처 노하우'라는 네 가지 주제로 모둠 단위 토론을 진행했다. 토론에는 대학생뿐만 아니라 한국여성민우회의 활동가들이 함께 참여하여 진행에 도움을 주었다.

토론에서는 20대 대학생들이 모여 청소년을 위한 여성주의 강좌를 진행하는 사회적 기업이나 '여성주의 모텔'에 대한 아이디어가 나오는 등 다양한 상상이 펼쳐졌다. 또 최근 불거진 대학 축제의 반여성적인 문화를 바꾸기 위해 반성폭력 강연을 의무화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대학 내에서 총여학생회가 처한 위기 상황을 이야기할 때는, 남녀이분법을 넘어서는 '성평등위원회'의 도입이 언급되었다.

특히 '두런두런'에서 활동하는 혜진씨는 '총여학생회 선거에서의 남학생 투표권 요구'에 대해 이야기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맥락"이라며, "그 맥락이 정말 여성주의에 대한 남성들의 수요가 늘어나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여성주의가 불편해서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행사는 한국여성민우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배들의 마무리 발언으로 끝이 났다.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시원(활동명)씨는 "오랫동안 이런 활동을 해오면서 '우리 다음 세대는 조금 편안하게, 즐겁게 활동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며 "학교 안에서 친구들과 만나 좋은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기회들을 많이 만들어, 후대 여성주의자들의 귀감이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인터뷰] 최은미(25) 동국대 총여학생회장
- 현재 총여학생회 활동에 대해 남학생들이 '우리를 배척한다'고 바라보거나, 여학생들이 '유난떤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무관심이다. (학생들이) 총여학생회가 있는지 모르거나, 있는 것은 알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총여학생회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총여학생회가 내 삶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총여학생회가 필요 없고 오히려 (삶에) 마이너스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총여학생회에 무관심한 경우에는 아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무관심이 문제다.

전반적으로 학생들이 (학내 활동에) 크게 관심이 없는 분위기이다. 총여학생회뿐만 아니라 총학생회 활동도 그렇고, 학내 소모임이나 동아리들이 모두 그런 흐름이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공동체나 소모임이 없어지는 상황에서도 가장 먼저 폐지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총여학생회이다.

왜 총여학생회만 논쟁의 대상이 되는지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여전히 성 차별이나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다. 전반적으로 무관심이 문제이지만, 그 안에서도 여성이나 소수자에 대한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가장 문제라고 생각한다."

- 총여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느낀 여성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가 무엇인가.
"여성주의나 총여학생회에서 하는 모든 활동들이 생물학적 여성만을 위해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공동체나 그 누구, 예를 들어 장애인, 군대를 가지 않은 남학생, 외국인 학생 등을 위해 활동할 수도 있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목소리를 쉽게 내지 못하는 사람, 그런 구조에 희생되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총여학생회다.

하지만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총여학생회가 나랑 무슨 상관인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 물론 생물학적 여성을 위한 기관으로 시작한 것은 맞지만, 그것'만'을 위한 기관은 아니다."

- 현재 대학 내 총여학생회가 폐지되거나, 존재하더라도 총학생회의 하위기구 혹은 복지기구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주의를 말하는 총여학생회를 꾸려가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냥 힘든 것이다. 무관심을 관심으로 돌리는 일이 너무 어렵고,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가능하다고 믿고 활동하는 것이다."

- 현재 볼.매.꾼이 하는 것과 같이 외모 품평에 반대하는 활동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공감한다. 하지만 이것을 개인이 실행에 옮기는 것은 어렵고, 주저하게 된다.
"그래서 같이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혼자하면 어렵고, 힘들고, 민망하다. 하지만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가능하다. 예를 들어 화장을 혼자 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런데 오늘 우리 과에서 열 명이 화장을 하지 않기로 한다면? 이것은 또 의미가 다르다. 그 열명이 느끼는 것이 다르고, 열 명이 아닌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 다르다. 그래서 당장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나랑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고, 그 의미가 얼마나 큰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태그:#볼매꾼, #외모품평문화, #총여학생회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