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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세월호 농성장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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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사흘 앞둔 22일, 서울 세종로 광화문의 저녁은 알록달록한 전등과 자동차 불빛으로 밝았다. 세종문화회관 앞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의 발걸음 사이로, 구세군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광화문 광장에 있는 세월호 농성장 천막은 눈에 띄지 않았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던 지난 여름보다 천막 규모도 작아졌다. 벌써 여러 계절을 돌아 겨울을 맞은 농성장은 고요했다.

아이들이 뛰놀던 농성장 앞 분수대에는 벌써 소복하게 눈이 쌓였고, 몇 개 남지 않은 천막마다 따뜻한 주황색 불빛이 새어나왔다. 농성장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사랑의 열매 조형물 뒤로 크리스마스트리가 보였다. 빨간색 장식 대신 노란 리본이 달려 있었다.

"진상조사할 때까지 계속해야지. 가족대책위에서 철수하라고 하면 철수해야지. 그전까지는 계속 여기 있을 거야. 국민들한테 알리기도 쉽고, 소통하기 쉬운 장소가 광화문이기 때문에..."

12월 31일 열리는 광화문 문화제 포스터
 12월 31일 열리는 광화문 문화제 포스터
ⓒ 세월호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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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 아빠' 이종철(47)씨는 세월호 특별법을 위한 서명 부스에서 시민들을 만나고 있었다. 다른 곳과는 다르게,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서명을 받는 부스는 비닐로 입구를 막아놓을 수 없었다. 찬바람이 그대로 들어왔다. 부스를 지키고 있는 서너 명의 사람들이 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우리 12월 31일 날 문화제 엄청 크게 해. 록 페스티벌. 공연팀도 20팀 정도 오고. 오후 3시 4분부터 새벽 1시까지."

이종철씨에게 행사 시작을 3시 4분에 하는 이유를 물으니, "304명"이라고 짧게 답한 뒤 "원래는 4시 16분에 시작하려고 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린다. 행사의 시작 시간은 3시 4분, 본 공연 시작 시간은 4시 16분으로 맞췄다고 했다. 매일 '영석 아빠' 오병환(43)씨와 함께 농성장을 지키는 이종철씨는 이날 행사장을 꼭 찾으라고 당부했다.

"가만히 있으면 뭐해요, 같이 리본 만들고..."

노란 리본 공작소
 노란 리본 공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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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은 사람이 모인 부스는 '노란 리본 공작소'였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노란 리본을 수북하게 쌓아두고 저마다 열심히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의정부에서 왔다는 김태희(57)씨는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각지에서 개별적으로 찾았다고 설명했다.

"그때만 해도 특별법 빨리 제정되고 해결될 줄 알았지. 밥을 굶고 있는데... 그런데 20일, 30일이 가도록 그게 아닌 거예요. 아 이거는 정말 아니다, 대통령이 해주겠다고 약속도 했고... 아마 거의 다 나랑 비슷한 생각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나도 8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단식 참여하고. 가만히 있으면 뭐해요. 같이 리본 만들고..."

지난 여름 '손님처럼' 농성장을 찾았다는 김태희씨는 어느새 이곳에서 겨울을 맞았다. 김씨처럼 단식 농성을 함께했던 사람, 촛불 집회에 참여하다 '미안하고 부끄러워' 리본을 만들고 있는 사람, 진주에서 세월호를 알리는 피켓을 들고 서명을 받았던 학생까지. 사연은 다양했지만, 하나같이 농성장에 꾸준히 발걸음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모르던 사이였는데 다 한 가족처럼 알게 됐어요. 거의 매일 보니까, 오히려 집에 있는 가족들보다도 더 식구들 같아.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으니까. 온종일 계시는 분들도 있고, 매일 오시는 분들도 있고. 서울보다 외지에서 더 많이 와요."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의 크리스마스트리.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304명의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하트와 노란 리본이 달려있다.
▲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의 크리스마스트리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의 크리스마스트리.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304명의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하트와 노란 리본이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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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씨가 기자의 손이 차갑다며 한참을 붙들고 있자, 노란 리본 공작소에 들어오는 사람마다 "무슨 사이냐"며 장난을 쳤다. 작은 공간이지만, 훈훈한 공기가 감돌았다. 노란 리본 장식이 달린 크리스마스트리에 대한 아이디어도 이곳에서 나왔다고 했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대해 물으니, 모두 '덕희쌤'을 찾았다. 노란 리본 공작소에서 '덕희쌤'으로 불리는 김덕희(52)씨는 "다 같이 한 거다"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옆에 있던 김태희씨가 "덕희쌤이 디자인을 하고 아이디어를 냈다"며 귀띔했다.

"바느질은 여러 사람이 참여할 수 있잖아요.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한 땀 한 땀 하다 보면 의미가 달라지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우선이잖아요. 물질의 사회에서 보면 이건 유치하죠. 돈 주고 사지, 뭐하러 이런 걸 만드나 싶기도 할 텐데...

희생자가 304명이잖아요. 실제로 (희생자 이름이 적힌) 하트를 만들 때마다, 그냥 '304명이 죽었대'가 아니라, 전부 다 사람들의 가슴에 닿는 거예요. 실감이 나는 거죠. '아, 304명이 죽었구나, 이건 정말 작은 숫자가 아니구나.' 그러면서 세월호에 대해서 돌아보게 되고,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더 기억하게 되고..."

김덕희씨는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에도 농성장을 찾길 바라면서 트리를 꾸몄다고 했다.

한두 끼의 밥과 두 갑의 담배... "학생들이 많이 오면 힘이 나"

밤이 가까워진 농성장에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오늘 처음 농성장을 찾아 아이들의 증명사진을 가만히 바라보다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중학생인 동생을 데려와 세월호 특별법을 위한 서명을 하고 가는 대학생도 있었다. 기자와 몇 마디를 나눈 그 대학생은 "좋은 기사를 써 달라"는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떴다.

'영석 아빠' 오병환씨
 '영석 아빠' 오병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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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장 구석구석을 바쁘게 돌아다니던 '영석 아빠' 오병환씨는 지난 가을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 때 만났던 기억을 짚어 인사를 건네자, "잘 왔다"며 농성장 천막 카페로 기자를 이끌었다. 천막은 따뜻했지만, 도로 가까이 있는 터라 차가 지나갈 때마다 심하게 흔들렸다. 이곳에서 매일 밤을 보내는 것이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다.

"시끄럽고 (자동차) 매연도 안 좋잖아. 그래도 어떻게 해. 진실을 밝히기 위해 온갖 고통을 참아야지. 학생들이 방학한다고 해서 많이 찾아올 줄 알았어. 간담회도 많이 했으니까. 나름대로 바쁘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와서... 삶이랄까, 부모들의 고통스러운 삶. 한 번쯤은 와서..."

장난기 있던 '영석 아빠' 오병환씨의 대답 끝자락에 서운함이 묻어났다. 오병환씨는 요즘 하루에 한 끼, 두 끼의 밥을 챙겨 먹고 두 갑의 담배를 피운다고 했다. 담배를 피러 천막을 나서는 오병환씨에게 "밥도 잘 안 먹고 그러시면 안 된다"고 말하니 딱 한마디의 답변이 돌아왔다.

"학생들이 많이 오면 힘이 나."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의 '사랑방' 천막 카페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의 '사랑방' 천막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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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장의 '사랑방'인 천막 카페에는, 리본을 만들거나 서명을 받다 잠시 몸을 녹이러 들른 사람들을 맞이하며 하루 종일 카페를 지키는 사람도 있다. 오후 2시부터 오후 9시까지, 농성장 천막 카페에 머문다는 그는 자신을 '천막 카페 붙박이'라고 소개했다. '천막 카페 붙박이'도 세월호 사건을 마주하기 전까지 이런 일상을 상상해 본 적 없는 두 아이의 평범한 엄마였다.

"한 달 정도는 정말 밥도 못 먹겠고, 우울했어요. 그러다 세월호 참사 100일 집회를 한다고 해서... 제가 학창시절 때는 집회라고 하면 다 '이거(팔뚝질)'인 줄 알았거든요. 동네에도 대학교가 있다 보니까 최루탄 냄새도 많이 맡았고. 집회라고 하면 그런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마음은 한번 가보고 싶더라고요. 얼마나 기가 막힐까, 엄마들이.

그래서 집회 간다는 분한테 연락을 해서 나도 좀 데리고 가라고 (했어요). 겁이 나니까. 왔는데, 집회는 영상 보여주고 정적인 분위기더라고요. 오히려 집회가 끝나고 나서 집에 가려고 할 때 경찰들이 다 막아서... '사람들이 무력적인 행동을 하지도 않았는데, 왜 경찰들이 저렇게 행동을 하지?' 집에 와서도 그게 굉장히 고민스럽더라고요."

그 고민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단식 그리고 천막 카페 자원봉사로 이어졌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주변 사람들에게 세월호 사고를 알린다고 했다. 그는 사람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았다.

"광화문 농성장을 해체시킨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다는 건 오산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농성이 오래되면서 곳곳에서 마음 표현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오늘 같은 경우에는 누가 팥죽을 해오셨어요. 여기 유가족분들 드시라고. 대단하잖아요. 그런 마음들을 보면서 아직은 이 나라에 희망이 있고,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후 9시가 다 되자, 농성장을 울리던 팟캐스트 방송이 끝났다. 서명 부스를 지키던 이들도 철수했다. 노란 리본 공작소에는 먼 곳에 사는 이들이 일찍 자리를 떠 빈자리가 생겼지만, 또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졌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광화문 광장 세월호 농성장에는 고요하게 무언가를 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광화문 농성장의 크리스마스트리와 아이들의 증명사진
 광화문 농성장의 크리스마스트리와 아이들의 증명사진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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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예지 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통신원입니다.



태그:#세월호,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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