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기묘하고 황당하고 어이없고 익살스러운 사건들이 이어진다. 이야기는 100세 노인이 양로원을 탈출하면서 시작된다. 100세 생일 파티를 몇 시간 앞두고, 알란 칼손은 슬리퍼를 신은 채 양로원 방 창문에서 과감히 뛰어내린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알란의 여정은 우연적인 사건 사고들의 연속이다. 어쩌다 훔친 짐가방 덕분에 갱스터들과 엮이고 생판 모르는 이들과 '작당모의'를 해가며 경찰의 추격을 피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된다. 100살까지 살아오는 동안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노인은 초긍정 초낙관의 신공을 발휘하며 상황을 이끌어나간다.

100살 노인의 좌충우돌 모험담  

.
▲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표지 .
ⓒ 열린책들

관련사진보기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장편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팝콘 하나 놓고 부담없이 볼 수 있는 '코믹영화' 같다. 스웨덴 작가가 썼고 100살 할아버지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복지사회를 살아가는 노인의 이야기라고 짐작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격이다.

실제 영화로도 제작됐는데 시종일관 유쾌한 웃음을 준다. 100살까지 사는 것도 희귀한 일이지만, 100세 노인이 가출을 한다는 것은 더더욱 희귀한 일이다. '나이는 들었지만 말 못하게 웃기는 양반인 데다 정신까지 말짱한'(양로원 원장은 알란의 평소 모습에 대해 경찰에 이렇게 진술했다) 알란은 왜 양로원을 탈출했을까.

'그가 좀 더 일찍 결정을 내려 남자답게 그 결정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알란 칼손은 생각하기 전에 오래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노인의 머릿속에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그는 벌써 말름셰핑 마을에 위치한 양로원 1층의 자기 방 창문을 열고 아래 화단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7쪽)

알란은 자신을 끼워 맞추며 살아야 하는 양로원의 모든 규정들과 결별을 택한다. 양로원의 일상은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해버린 듯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그는 생각한다. '인생이 지겨워졌다. 아니, 사실은 인생이 나를 지겨워하고 있다.'

양로원을 빠져 나온 알란은 기차역으로 향한다. 여기서 한 갱단 조직원의 짐가방을 훔친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짐가방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노인은 자기가 왜 짐가방을 훔치게 되었는지 자문해 본다.

그냥 기회가 왔기 때문인가, 아니면 가방 안에 신발 한 켤레가 들어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자신이 잃을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인가? 어느 것 하나 정확하지 않다. 그저 알란은 삶의 부름에 대해 '좋아'라고 대답하는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다.

노인은 늙어서 허리가 조금 굽었을 뿐 젊은이 못지 않은 에너지가 넘친다. 어떠한 망설임이나 두려움도 없이,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이해타산도 없이 그저 '삶이 부르는 대로' 행동하는 알란. 이 황당하고 대책없는 행동을 10대, 20대가 했다면 '철이 덜 들었다'고 손가락질했겠지만 그는 무려 100살이다.

100살이 되어서도 삶의 부름에 따라 스스럼없이 인생을 부딪쳐갈 수 있다는 건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용기가 아니다. 부러웠다. 그의 대책없는 행동들이 황당하긴 하지만, 과연 알란처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변함없이 삶의 열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포레스트 검프'가 폭탄 제조 전문가였다면?

1905년에 태어난 알란의 원래 직업은 폭탄 제조 전문가다. 변변한 학교 과정도 수료하지 못한 그는 열 살의 나이에 폭약 회사에 취직해 폭탄 제조 기술을 연마했다. 24살이 되던 해에 고향 윅스훌트를 떠나면서 알란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세계 현대사의 페이지마다 굵직한 족적을 남기게 된다.

알란은 스페인 내전 와중에 자신이 만든 폭약이 설치된 다리를 건너려던 프랑코 장군의 목숨을 구한다. 이후에는 미국에 건너가 핵폭탄을 연구하던 로스앨러모스의 국립 연구소에서 웨이터 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핵폭탄 제조의 막힌 공식을 푸는 기적(?)을 행한다.

이 일을 계기로 트루먼 부통령과 친구가 되고, 핵폭탄을 완성한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해 2차대전을 종식시킨다. 전쟁 이후에는 중국에 건너가 마오쩌둥의 부인을 구하기도 하고, 러시아에 가서 스탈린을 만난다. 압권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그의 아들 김정일을 만나는 대목이다. 알란은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죽음의 위기를 겪지만 마오쩌둥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작가는 알란이 프랑코와 트루먼, 마오쩌둥의 알려지지 않은 친구였고 심지어 핵폭탄 제조에 관여했다는 설정을 통해 기묘하고도 독특한 방식으로 세계 현대사를 훑어내린다. 알란의 선택과 행동에 따라 세계사가 결정되는 황당한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에 봤던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떠올리게 한다. 알란이 포레스트 검프와 다른 점이 있다면 폭탄 제조라는 대단히 비밀스럽고 전문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일 게다. 세상에나, 폭탄 제조 기술이라니! 

일생을 모험 속에서 살았던 노인에게 양로원은 감옥이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노인의 삶이란 늙었을 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젊었을 때 예견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늙는다는 것은 어느날 갑자기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라, 현재가 차곡차곡 쌓여가는 과정일테니 말이다. 지금 이 순간, 오늘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가 노년의 인생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나침반이 될 것이다. 이것이 황당무계한 알란의 인생 스토리를 단순한 웃음거리로만 볼 수 없는 이유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 열린책들 펴냄 / 2015.7.)

이 기사는 이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yes24.com/xfile340)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영화 에디션)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2014)


태그:#요나스 요나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작은 시골 농촌에서 하루 하루 잘 살기 위해.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