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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포도주...
 오오.. 포도주...
ⓒ 박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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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쉬었다 갈까?'

걸은 지 5일째 아침이었다. 힘들었다. 쉬고 싶었다. 멍든 발톱은 점점 괜찮아졌지만, 몸이 지쳤다. '겨우 5일 만에…' 부정하고 싶었지만 내 몸은 피곤하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남들은 쌩쌩해 보이는데, 왜 나만…

검은 유혹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빰쁠로나에서 쉬는 사람도 많은데, 난 안 쉬었잖아, 좀 쉬면 어때?' 

산티아고를 오기 전에 본 블로그가 있었다. 부부였다. 산티아고를 걷는데, 일주일에 한 번꼴로 쉬고, 하루에 20km 남짓 걸어 완주까지 사십일쯤 걸렸다고 했다. 그때 속으로 생각했다. '에이, 이렇게 설렁설렁 걸었단 말이야?' 약간의 코웃음도 섞었다. 나는 적어도 쉬지 않고 매일 걷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의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어쨌든 쉬지 않고 걷겠다는 건 나와의 약속이었다. 쉽게 저버릴 순 없었다. 하루 쉬면 흐름을 놓치고, 게을러지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깔려 있었다. 두 손에 힘을 줘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일단 가자.

힘이 되는 건 역시나 길과 사람이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촉촉하게 내 얼굴을 적셨다. 내 앞에 펼쳐진 길, 그리고 그 뒤로 걸려 있는 하늘이 내 피곤을 잠시 지워줬다.

새벽 공기와 쭉 뻗은 길과 그 뒤에 걸린 하늘이 날 또 걷게 한다
▲ 푸엔테 라 레이나를 나서는 길 새벽 공기와 쭉 뻗은 길과 그 뒤에 걸린 하늘이 날 또 걷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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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 너 아침 먹었어? 안 먹었으면 이거 먹고 가."

도니는 삼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스페인 남자였다. 유쾌한 사람이었다. 순례 중에도 쉬지 않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힘을 돋구었다. 바 앞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가, 바 앞을 지나가는 나를 붙잡았다. 내가 옆자리에 앉자, 도니는 바게트 빵을 가로로 반 자른 뒤에, 하몽(스페인식 슬라이스 햄)을 그 속으로 슥슥 집어넣었다.

"혼자 다 먹기엔 많아서, 내가 먹던 건데 괜찮지? 이게 다 에너지야, 먹어둬." 

1유로짜리 하몽과 아마 1유로도 안 하는 바게트 빵으로 만들어진 스페인식 샌드위치였다. 볼품없었지만 충분했다. 마음이 고마웠다. 어정쩡하게 메고 있던 가방을 끌러 아예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몸에 긴장이 풀렸다. 고개를 뒤로 젖히니 하늘이 보였다. 상쾌했다. 씩 웃음이 났다. 순례자들이 옆을 지나쳐갔다. 웃으며. 인사하며. 걸을 힘이 났다.

이 문을 나서면 되돌아올 수 없다
 이 문을 나서면 되돌아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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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가장 사진을 많이 찍는 다리라는데, 피곤하니까 눈에 안 들어온다.
▲ 왕비의 다리 사람들이 가장 사진을 많이 찍는 다리라는데, 피곤하니까 눈에 안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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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통 좀 넣어줄래요? 

오늘도 달팽이가 마중한다. 급한 발걸음을 붙든다.
▲ 까미노의 수호신 오늘도 달팽이가 마중한다. 급한 발걸음을 붙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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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왔다. 걷기 시작하고 처음 맞는 비였다. 비가 오면 우비를 쓰는데 가방까지 함께 덮는다. 가방에 레인 커버를 따로 씌우는 사람도 있다.

"물통 좀 가방에 넣어줄래요?"

걷다가 쉬려고 큰 나무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먼저 쉬고 있던 한 여자가 떠날 채비를 마치고 내게 와서 자연스레 물통을 건넸다. 가방을 가리켰다. 나는 자연스레 물통을 건네받아서 그녀가 메고 있는 가방에 넣어줬다. 약속된 상황 같았다.

가방을 메고 있는 상태에서 혼자서 물통을 가방에 넣고 빼는 건 만만치가 않다. 우비를 벗고 가방을 내려놓은 뒤, 물통을 가방에 넣고 다시 가방을 메고 우비를 써야 한다. 물 한 모금에 치르는 대가치곤 크다.

"고마워요"

여자는 우비를 한 번 고쳐 입더니 이내 나무 그늘을 빠져나갔다. 그 여자와 눈도 한 번 안 마주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상황이 꽤 마음에 들었다.

낯선 사이였지만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무심했다. 일상에서 사소한 부탁을 사소하게 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함께 밥 먹는 자리에서 옆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물을 좀 건네 달라는 것마저 쉽지는 않다. 처음 봤지만, 그 여자와 나 사이에 모종의 끈끈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했다. 고난의 길을 택했다는 존중,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공감, 순례자들 사이에 공유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의 '버릇없음'은 나를 낮잡아 본 게 아니었다. 내 선의를 믿는다는 그녀의 신뢰였다. 순식간에 그 상황이 이해가 됐다. 우비 안에 땀이 차서 찝찝함이 절정에 달하고 있던 순간이었기에 그 상황이 더 극적으로 느껴졌다.

이 길 위에 있다는 게 기뻤다.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비가 시원했다. 순수해지는 기분이었다. 눈앞엔 밀밭 사이로 마을이 그림처럼 걸려있었다. 시라우끼(Cirauqui)로 향하는 길을 따라 순례자들이 걷고 있었다. 모두가 우비를 입어서 똑같은 모습이었다. 개미 떼가 나란히 줄지어 가는 것 같았다.

똑같은 모습을 한 순례자들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 괜히 웃음이 나기도 한다.
▲ 우비를 쓰고 걷는다 똑같은 모습을 한 순례자들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 괜히 웃음이 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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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면 쉬었다 가자

"여기서 2km만 더 가면 100km 지점이래."

에스뗴야에 도착하니 해가 쨍쨍했다.
 에스뗴야에 도착하니 해가 쨍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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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인 에스떼야(Estella)에 도착했을 땐 해가 쨍쨍했다. 100km를 걸었다니 기특했다.

"근처 수도원 수도꼭지에서 와인이 나온다는데?"

함께 걷던 백자매는 에스떼야에서 하루 쉬기로 했단다. 같이 하루 쉬고 가자고 날 꼬드겼다. 처음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원래 계획보다 많이 뒤처져 있었다. 원래 계획이라… 사실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사둔 게 아니라 급할 이유는 없었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자, 쉬었다 가자. 수도꼭지에서 공짜 와인이 나온다는데.

낯선 선택을 해보기로 했다. 나 자신과 약속이란 말로 그만 옭아매고 싶었다. 스스로를 조금 내려놓고 보니, 쉬지 않아야 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오히려 쉬는 게 맞았다. 사실 너무 쉬고 싶었다.

'자신만의 까미노가 있다' 

에스떼야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2km 떨어진 아예기(Ayegui)로 이동했다.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는 1박이 원칙이기 때문에 숙소를 옮겨야 했다. 아예기에는 알베르게가 딱 한 개 있는데, 이곳에선 순례 100km 기념 도장을 찍어준다.

짐을 풀자마자 빈 물통을 들고 와인이 나오는 수도꼭지로 향했다. 그 수도꼭지는 이라체 수도원에 있는데, 하루에 100L씩 와인을 무료로 제공한다. 빨리 가지 않으면 다 떨어진다고 하는데, 해가 꽤 높이 솟아 있을 때였는데도 포도주가 나왔다.

"오오…"

수도꼭지에서 정말 와인이 나오자 탄성이 흘렀다. 별일 아니지만 즐거웠다. 꼭 와인 때문은 아니었다. 와인 맛이 좋았지만, 구멍가게에서 산 와인보다 딱히 맛있지는 않았다. 그저 지금 시간에 걷지 않고 일광욕을 하고 있다는 게 한없이 여유롭고 행복했다.

▲ 와인이 나오는 수도꼭지! 이라체 수도원에서 하루에 100L 제공되는 와인. 거의 마지막 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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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체 수도원을 한 바퀴 슥 둘러봤다. 여전히 한없이 여유롭고 행복했다. 몸에서 향기가 나는 기분이었다. 내 향기를 남에게 전파하고 싶었다.

저 멀리서 도니가 걸어왔다. 지난 저녁에 술을 먹고 늦게 일어난 탓에 이제 걷기 시작했단다. 이라체 수도원의 포도주를 마셔야 까미노 완주를 할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며 포도주 한 모금을 얻어 마시고 갔다. 내 눈앞 있는 모든 게 평화로웠다.

이라체 수도원을 가면, 포도주를 저장고를 만나볼 수 있다.
 이라체 수도원을 가면, 포도주를 저장고를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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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평화로워 보인다
▲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인 가리비와 뒤에 보이는 포도밭 모든 게 평화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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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쉬었다. 걷지 않으면 게을러질까 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잘 쉬고 나니 얼른 걷고 싶었다. 멍든 발톱에 통증이 사라지고 나니 몸도 기분도 날아갈 듯했다. 날아다닐 듯했다. 스스로를 옥죄었던 지난날을 위로했다.

'그래, 쉬었다 가도 괜찮다.'

쓸모없는 날은 없다. 가만히 구름만 바라본다더라도...
▲ 쉬었다 가도 좋다 쓸모없는 날은 없다. 가만히 구름만 바라본다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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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7년 5월 22일부터 6월 29일까지 걸어서 산티아고를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태그:#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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