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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극한의 내향형 인간이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만남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불편하다. 오히려 갈수록 익숙한 것만 찾고 있는 듯하다. 이런 내가 싫어서 성격을 바꿔보려고도 해봤다. 사람들과 금방 친해지고 우스갯소리도 잘 하는 유쾌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타고난 성향을 바꾸는 게 쉽지 않았다. 남의 옷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후회와 자책이 밀려왔다. 이제 와서 무슨 성격 개조냐 나답게 사는게 최고지, 오래 묵혀야 더욱 맛을 내는 된장처럼 내면이 깊은 사람으로 살기로 했다.

시낭송 잔치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런 내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시를 낭송하게 되다니. 동네 책방에서 주관하는 '시낭송 잔치' 무대에 서게 되었다. 물론 시작을 내 스스로 했을리 없다. 나와는 정반대로 어디서든 앞장서고 가장 먼저 손을 드는 지인이 본인과 나의 신청을 함께 하신거다.

같은 지역도 아니면서 책방 행사에 항상 열심히 참여하는 의리와 정으로 뭉친 분이다. 소심한 성격인 내가 자발적으로 그런 자리에 서지 않을거 같아 대신 신청하셨을까? 나의 의사와 무관하게 참가자 명단에 이름이 올려져 있었고 그 날부터 2주간은 고민과 걱정의 시간이었다. 낭송이 부담되면 낭독을 해도 된다며 편하게 생각하라고 하셨지만 부담이 엄청났다. 나 때문에 행사를 망치면 어쩌나?

주제가 송년 또는 신년시여서 나는 정채봉 선생님의 '첫마음'을 골랐다. 처음 시낭송을 하는 나의 첫마음을 간직하고 싶었고 내년을 힘차게 열고 싶은 마음이었다. 화려하거나 어렵지 않은 시어들이 암송하기에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읽기와 암송은 완전 다른 분야였다. 1연을 외우고 2연으로 가면 1연을 잊어버리고, 주요 단어는 맞지만 조사와 어미가 조금씩 틀렸다. 당일 암송하다가 잊어버리면 당황해서 전체가 엉망이 될 것 같았다. 위험한 낭송 대신 낭독을 하기로 했다.

가족들이 모두 나간 후 거실에서 하루에 5번 이상 읽으며 연습을 했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랐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디에서 띄어 읽어야 하나, 이 부분은 어떻게 읽어야 느낌이 사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하루하루 부담감이 점점 더 커졌다. 못한다고 할까? 코로나라도 걸리면 좋겠다.

드디어 행사 당일이 되었다. 시작 시간보다 조금 여유있게 장소에 도착했다.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벌써 와 계셨다.  화려한 의상과 힘을 잔뜩 넣은 헤어스타일, 자주 이런 자리에 서 보신 듯한 여유 있는 모습들이었다. 벌써 기에 눌렸다. 순서를 보니 끝에서 두 번째였다. 관심을 한껏 받는 앞부분보다 뒷부분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시를 즐기는 분에게 한 수 배우다

시낭송 잔치 1부는 시낭송을 배우고 계신 노인복지관분들의 애송시 낭송이었다. '방문객'(정현종), '수선화에게'(정호승), '초혼'(김소월), '임께서 부르시면'(신석정), '인연이라는 것에 대하여'(김현태), '살다가 보면'(이근배), '인연서설'(문병란), '우화의 강'(마종기) 등.

알맞은 배경음악에, 각자의 목소리, 자신만의 느낌이 추가된 시낭송은 한 편 한 편 진한 감동을 전해주었다. 여든을 넘기신 어르신이 제법 긴 시를 유창하게 낭송하시고 '시는 나의 인생이다'고 말씀하셔서 큰 박수를 받으셨다. 어떤 분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의자(이정록)'를 낭송하시다 울컥하시는데 내 마음도 흔들렸다.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의자' 중에서)


평소에 잘 했는데 깜빡 실수했다며 너무 아쉬워하시는 어르신도 있었고, 노래도 아닌데 앵콜을 받으신 분도 있었다. 누가누가 더 잘하나를 견주는 경연이 아니라 즐겁게 서로의 낭송을 경청하고 자신만의 느낌을 살려 암송하는 분들이 참 멋있어 보였다. 한편으로 나는 자꾸 쪼그라들어 갔다.

2부는 '12월의 기도'(목필균), '등 뒤를 돌아보자'(박노해), '송년엽서'(이해인), '첫마음'(정채봉), '설날 아침에'(김종길) 등 송년시, 신년시 낭송의 시간이었다.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가슴이 방망이질을 거세게 해댔다.

다른 분들의 시 낭송을 차분히 감상하지도 못하고 빨리 내 차례가 오기만을 바랬다. 2부 참가자들은 1부 어르신들처럼 말랑말랑한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담백하게 시를 낭독하였다. 저 분들처럼 천천히 차분하게 읽으면 된다. 할 수 있다.

내 순서가 되었고 큰 실수 없이 천천히 내 마음을, 첫마음을 표현한 시를 낭독했다.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가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첫마음' 중에서)


드디어 끝났다. 다른 분들도 이런 기분일까? 나의 시 낭독에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었지만 도전하고 이뤄내니 좋았다. 내가 다른 분들의 작은 실수들을 기억 못하듯 저 분들도 나의 미숙함을 기억하지 못하시길 바라는 마음, 끝나서 후련한 마음이었다.

시낭송은 낭송가에게 선물이 된다

뒤풀이 자리에서 여든 셋 어르신이 말씀하셨다. "시 낭송 배우면서 날마다 설레는 마음이야. 조금 더 일찍 이 맛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말에 이어서 '진달래꽃'(김소월)을 멋지게 읊어주셨다.

겉모습도 실제 연세보다 훨씬 젊어보이셨지만 하시는 말씀이나 시 낭송하시는 모습에서 멋진 신사분, 아니 예쁜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저렇게 나이들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내향형 성향의 사람은 새로운 일 시작하기는 쉽지 않지만 일단 시작하면 꾸준히 하는 특징이 있다. 내가 날마다 시 필사를 하고 만보 걷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 낭송 자리가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르지만 다음에도 또 할 수 있을거 같다.

문자로 전해지는 감동도 작지 않지만 아름다운 음성, 따뜻한 감성이 담긴 소리로 전해지는 감동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 그 감동은 타인에게도 행복을 주지만 낭송가 본인에게 가장 큰 선물을 준다는 것을 여러 어르신들을 보고 알게 되었다. 나도 그러고 싶다.

태그:#시낭송, #첫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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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하루 좀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읽고 쓰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계획한 대로 안되는 날도 많지만 노력하다보면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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