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15 15:05최종 업데이트 23.02.15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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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소송 대리인단의 임재성 변호사와 지원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의 김영환 대외협력실장이 14일 서울중앙지법에서 '강제동원 피해 배상' 일본 니시마츠 건설 상대 손배소 1심 선고에 대해 기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강제징용(강제동원) 하면 미쓰비시중공업이나 일본제철이 많이 떠오르지만, 이들 못지않게 한국인들을 착취한 전범기업 한둘이 아니다. 14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판결이 선고된 소송의 피고인 니시마츠건설도 그중 하나다.

이번 손해배상청구소송은 1942년에 함경북도의 니시마츠 노역장으로 징용됐다가 1944년 5월 현장에서 세상을 떠난 김모씨의 유족들이 제기한 사건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48부(이기선 부장판사)는 '일본 기업의 불법행위는 인정되나 배상청구권이 시효로 소멸했다'는 이유로 원고패소판결을 내렸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재판부는 "피고가 일제의 한반도 침탈에 편승해 망인을 강제로 노동에 종사하게 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라며 "이러한 행위는 일본 정부의 한반도와 한국인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해당하므로 피고는 망인이 받은 정신적 고통에 대해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불법행위가 발생한 날로부터 10년, 피해자 측이 손해 및 가해자를 알게 된 날로부터 3년'이 지나면 청구권이 소멸한다는 민법 제766조가 피해자들을 가로막았다.

대법원은 강제징용에 관한 2012년 5월 24일 선고에서 '개인 피해자의 청구권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소멸하지 않았다'라고 판단하고 사건을 하급심으로 돌려보냈다. 그런 뒤 하급심에서 대법원으로 재상고된 다음인 2018년 10월 30일의 대법원 판결에 의해 이 판단이 확정됐다.

위 소송이 제기된 시점은 2019년 4월 30일이다. 유족들은 권리가 있음을 알게 된 2018년 판결로부터 3년 이내에 청구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2012년 판결로부터 3년이 훨씬 지났다는 이유로 청구를 기각했다.

동종 사건의 소멸시효 기산점을 2018년으로 인정한 판례도 있다. 2018년 대법원 판결 직후인 동년 12월에 징용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광주고등법원 민사2부(최인규 부장판사)는 2018년 10월부터 피해자들이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므로 이때부터 소멸시효를 계산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권리행사가 현실적으로 가능해진 시점을 기준으로 잡은 것이다.

니시마츠건설이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일은 강제징용이나 강제동원 혹은 강제노역 같은 표현으로는 담아내기 힘들 정도다. 전쟁범죄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다. 이번 재판은 이런 전범기업들까지 시효제도의 혜택을 누려야 하나 하는 느낌을 줄 만하다.

미쓰비시 못지않은 전범기업 니시마츠

니시마츠건설 홈페이지의 연혁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 회사는 일본 군함이 강화도 앞바다에서 함포사격을 가한 운요호사건(운양호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874년에 창립됐다. 이 기업은 압록강 수풍댐을 건설한 일을 자사의 핵심 업적으로 내세운다.

이 회사 홈페이지는 "댐은 제방 길이 950미터, 높이 100미터, 콘크리트 용적 300만 입방미터, 저수 용량 116억 입방미터라는 거대한 것"이었다며 "당시 동양 제일이라는 압록강 수풍댐의 건설은 전쟁 이전의 당사의 대표적 공사"라고 소개했다.

수풍댐이 대표적 공사였다고 하지만, 이는 완공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패전으로 중단된 마쓰시로 대본영 공사까지 포함하면 이렇게 말하기 힘들어진다. 바로 이 마쓰시로 대본영 사업은 니시마츠가 미쓰비시나 일본제철 못지않은 전범기업이었음을 증명한다.

일본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만약을 대비해 지휘본부인 대본영과 일왕의 거처를 안전한 데로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일본의 티베트'로 불리는 마쓰시로 산악지대에 새로운 거점을 구축하는 구상이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2019년 발간한 <마쓰시로 대본영 건설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라는 보고서는 "마쓰시로가 위치한 나가노현은 도쿄에서 직선으로 서북 약 200km 떨어진 일본의 대표적인 산악 지역"이라고 한 뒤 "특히 마쓰시로 일대는 온통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천혜의 요새"라고 묘사한다.

일본은 이곳에 미니 도시를 세우고자 했다. 요새 대부분이 공개된 이듬해에 발행된 1991년 3월 31일 자 <동아일보> 기사 '한인 원혼 떠도는 일제 발악의 요새'는 "대본영 지하벙커는 △일왕 거처와 참모본부사령부, 왕족 학습원 등이 배치된 무학산(舞鶴山, 해발 559m) 벙커, △내각과 NHK 등 언론사가 들어갈 상산(象山, 475m) 벙커, △군수창고용 개신산(皆神山) 벙커가 삼각형으로 배치돼 있다"라고 묘사했다.

이곳에 끌려간 한국인들의 규모는 대단했다. 위 기사는 "277일 동안 총 길이 13km의 돌판 공사를 위해 조선인 노무자 1만 명 가까이가 일본 각지 공사장과 조선에서 수송됐다"라며 "도쿄에서 1천 명의 조선인 노무자를 발에 쇠사슬을 채워 캄캄한 화물열차에 실어 수송했다"는 전직 정보장교의 증언을 인용했다.

나가노현이 작성한 <내선(內鮮)조사보고서 서류편책>에 따르면, 일제 패망 직후인 1945년 9월 당시 나가노현 내의 한국인은 8520명이었다고 위의 지원재단 보고서는 말한다. 마쓰시로 공사장에서 사망한 한국인들이 적지 않으므로 패망 이전에는 이보다 많은 숫자의 한국인이 나가노현에 있었고 그중 상당수가 마쓰시로 노역장에 투입됐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1990년 5월 13일 자 <조선일보> 기사 '하루 20시간까지 땅굴 공사···노인들도 많았다'에 등장하는 피해자 최태소는 함께 노역하던 한국인 대부분이 한 달 이내에 사망했다면서 "공사가 중단(45년 8월 15일)되기 한 달 전쯤인 45년 7월 이전에 온 사람은 모두 죽지 않았나 싶다"라고 회고했다. 주관적 판단이 개입돼 있기는 하지만, 이런 증언을 감안하면 8520명은 최대치가 아닐 수밖에 없다.

한국인들이 쉽게 죽기로 유명한 곳
 

1991년 3월 31일 자 <동아일보> 기사 '한인 원혼 떠도는 일제 발악의 요새'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그곳 한국인들은 노예나 다름없었다. <동아일보> 기사는 "(지하 굴착) 폭파 작업에 100% 조선인들이 투입됐고, 대피가 늦어 팔다리가 끊어지며 폭사한 경우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보도했다. 또 영양실조·사고·전염병 등으로 사망자가 속출했으며 "이들은 흙에 실려 아무 데나 버렸다"고 전했다.

이곳에서는 대화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동아일보> 기사는 "우리말 사용이 금지됐고, 이를 어기면 매질을 당했고 반항하면 사무실로 끌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조선일보> 기사 속의 최태소는 "일본인 감독은 우리를 좀벌레(무시키라)처럼 여겼고 그렇게 다루었다"고 한 뒤 "일인들은 우리끼리 사담하는 것을 발견하면 무조건 끌고 나가 몽둥이·죽도 등으로 죽도록 두들겨 팼다"라며 "특히 고향 얘기를 하다 발각되면 그 다음 날부터 사람이 없어졌다"고 회고했다. 그는 "땅을 파면서도 무엇 때문이지 몰랐다", "죽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이라고 회상했다.

일왕의 거처를 짓는 데 투입된 한국인들의 처지는 더욱 참담했다. 이들은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일왕 거처인 무학산 공사에 참가했던 수십 명은 공사 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사망한 조선인 노무자는 전체의 3할이 넘는 3천여 명에 이르러 그야말로 마쓰시로 대본영은 조선인의 피땀과 희생으로 건설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그곳에는 경상도 출신이 특히 많았다. 위 지원재단 보고서에 소개된 피해자 김창기·박도삼도 그랬다. 김창기의 증언은 이렇다.

"나는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당시 도삼과 함께 군대용 가마니를 짜면 징용을 피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막 결혼했던 터라 열심히 가마니를 짜고 있었다. 2월 경인가, 면 직원이 와서 아무런 말도 없이 집에서 끌려갔다. 25세였다. 옷을 갈아입을 틈도 없었다. 아내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그저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무엇보다 신혼 때 아내와 이별하게 되는 것이 가장 슬펐다."

징용 피할 생각에 가마니를 짜다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데가마쓰시로 징용 현장이었다. 그가 지하 땅굴 속에 갇힌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면서 얼마나 무섭고 암담해 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마쓰시로 대본영 노역장이 그런 곳이었는데도, 언론들이 집중적으로 다뤘을 당시의 나가노현은 이곳을 관광지로 만들 생각으로 분주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인명의 귀중함을 모르는 일본 지도자들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일이다.

<동아일보> 기사는 "나가노시는 마쓰시로 대본영을 철저히 상업 관광지로 개발하려 할 뿐, 역사적 진실 공개에는 관심이 없다"라며 "이는 상산 벙커 입구에 있는 나가노시의 안내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 안내문 어느 한 곳에 조선인 노무자 1만여 명이 강제동원됐고 3천 명이 희생됐다는 언급은 없다"고 기사는 탄식했다.

다른 노역장들도 그랬지만 전범기업 니시마츠의 노역장은 한국인들이 쉽게 죽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14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판결이 난 사건의 피해자도 니시마츠 노역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런 죄과를 저지른 전범기업을 처벌하는 일을 소멸시효가 가로막고 있다. 얼마나 더 많은 한국인 피해자와 유족들이 소멸시효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될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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