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17 11:42최종 업데이트 23.02.17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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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훈 외교부 2차관이 16일 오후 나루히토 일왕의 생일 축하연이 열리는 서울의 한 호텔에 들어서고 있다. 2023.2.16 ⓒ 연합뉴스

 
16일 밤 서울 남산에서 기미가요가 울려퍼졌다. 그것도, 한국 외교부 차관이 참석한 행사장에서 군국주의의 상징인 이 노래가 연주됐다.

<산케이신문> 온라인판인 16일 자 <산케이뉴스> 기사 '특보: 기미가요를 처음 연주, 한국에서 천황 탄생일 리셉션... 일·한 정상화로 한걸음(<特報>君が代を初演奏 韓国で天皇誕生日レセプション 日韓〝正常化〟へ一歩)'이 이도훈 외교부 제2차관이 참석해 축사를 발표한 일왕(천황) 생일연 현장을 상세히 보도했다.

<산케이뉴스>는 "한국 서울의 호텔에서 16일 밤에 천황 탄생일의 축하 리셉션이 주한일본대사관 주최로 행해지고, 이 리셉션에서는 처음으로 국가인 기미가요가 흘러나왔다"라며 "일본 정부는 한국의 반일감정이 강하기 때문에 예년에는 국가를 연주하는 것은 보류해왔다"라고 한 뒤, 기미가요를 한국에서 연주할 기회가 이번에 처음 생기게 됐다고 전했다.
 
작년에 발족한 윤석열 정권이 대일관계의 개선을 목표로 하는 가운데, 일본 정부도 비뚤어진 양국 관계를 탈각할 호기로 판단했다.
 
<산케이신문>은 이것이 이례적인 일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에서는 천황 탄생일 리셉션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친일파로 비난받는 일이 있었다"라며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2013년 12월 5일 이 행사에 참석한 일로 인해 2022년 인사청문회 때 힘들게 해명해야 했던 사실을 소개했다. 일왕 생일 잔치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논란이 될 수 있는 한국에서 기미가요까지 연주됐으니 일본 언론이 비중 있게 보도할 만했던 것이다.

기미가요는

'당신의 시대'를 뜻하는 기미가요는 나라 사랑을 강조하는 일반적인 애국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당신의 시대는/ 천대에 팔천대에/ 작은 돌이/ 바위가 되어/ 이끼가 생길 때까지"라며 일왕의 치세가 1천 대, 8천 대까지 무궁하기를 기원하는 이 노래는 제국주의 일본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던 19세기 후반에 현재의 형태를 갖췄다.


일본이 조선·유구(오키나와)와 청나라령 대만을 상대로 제국주의 침략을 벌이던 시기에 지금의 모습을 갖춘 이 노래는 일왕을 숭배하고 군국주의를 찬미하는 데 활용됐다. 이 노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일제는 이웃나라들과 동아시아·태평양에 쳐들어갔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을 황국 백성으로 만드는 황민화 정책을 위해 학교 조회나 각종 행사, 국기 게양이나 경례 때 기미가요를 부르도록 강제했다.

기미가요가 극우세력의 신명을 부추기고 침략 본성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은 일본 군국주의와 정면 대결했던 미국의 태도에서도 느낄 수 있다. 1945년 이후의 미군정 지배하에서 기미가요가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1952년 4월 29일 자 <동아일보> 기사 '기미가요가 다시 등장!'은 일본방송협회(NHK)의 결정과 관련해 아래와 같이 전했다.
 
일본방송협회는 점령하에 있어 방송 종료 시 국가 기미가요를 방송하는 것을 중지하고 있었는데, 금번 대일강화조약의 효력 발생을 계기로 28일부터 다시 제1·제2방송에서 방송 종료 시에 국가를 방송하기로 되었다 한다.
 
기미가요는 미군 지배하에서 억압을 받다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일본이 미군 지배에서 벗어난 날에 족쇄에서 풀려났다. 기미가요의 위험성을 미국이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일본에서도 혐오

기미가요에 몸서리치는 사람들은 한국과 중국 등뿐 아니라 일본 내에도 허다했다. 제국주의하에서 식민지인들 못지않게 고통과 시련을 당한 일본 대중과 그 후예들도 이 곡을 혐오했다. 그런 분위기를 형상화하는 상징적 사건이 기미가요 법제화(1999.8.13) 전에 발생한 히로시마현 교육자의 비극적 최후다.

1999년 3월 2일 자 <조선일보> '기미가요 강요에 고민, 일(日) 고교 교장 자살'은 "일본 문교당국이 각급 학교에서 기미가요(제국주의 일본 국가)와 히노마루(일본 국기)의 사용 지도를 강화하고 있는 가운데, 이 문제로 고민하던 한 고등학교 교장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라며 58세 된 이시카와 도시히로 교장이 2월 28일 자택에서 운명한 사건을 보도했다.
 
이시카와 교장은 졸업식에서 기미가요와 히노마루를 사용하라는 현(縣) 교육위원회의 직무명령을 받아왔으며, 이에 반대하는 교사들과의 면담 직후 자살한 것으로 확인됐다.
 
졸업식 때 기미가요를 불러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는 교사들의 모습이 얼마나 절절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교장이 교육위원회 명령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얼마나 한탄했을지 느낄 수 있다.

이 사례는 일본 민중들 사이에 존재하는 기미가요 거부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케 한다. 일장기 휘날리고 기미가요 울려퍼지는 속에서 강제징용·위안부·강제징병으로 끌려간 식민지인들의 한(恨)과 비슷한 감정이 일본 대중의 내면에도 스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필이면 서울 남산에서

기미가요가 한국·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민중의 삶을 열악하게 하는 것이었다는 점은 극우단체인 일본회의(닛폰카이기)의 활약상에서도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오늘날 일본 최대의 극우단체가 되어 있는 일본회의는 관습적으로 제창되던 기미가요를 정식 국가로 격상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들이 그런 열성을 발휘한 것은 일왕 숭배와 군국주의를 확산하는 데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아오키 오사무 전 <교도통신> 기자가 쓴 <일본회의의 정체>는 기미가요를 국가로 규정하는 국기국가법이 제정되기 2개월 전인 1999년 6월 4일에 일본회의 부회장·상임이사·사무총장 등이 회원인 아베 신조 중의원 의원 등과 함께 오부치 게이조 총리를 찾아간 사실을 소개한다. 이들은 "(반대세력에 밀리면) 일본의 장래에 필시 큰 화근이 될 것"이라며 총리를 압박했다. 이는 기미가요 법제화를 위한 일본회의의 운동을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다.

<일본회의의 정체>는 국기국가법이 참의원 본회의를 통과한 직후에 의원회관에 모여 있던 일본회의 회원 200명 정도가 일제히 박수를 치며 일어난 장면도 소개한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만세 삼창을 외치며 환호했다. 일본 대중들 사이에서는 반발과 거부감이 나오고 극우세력에서는 열렬한 환영이 나온 사실은 일왕을 앞세워 민중을 억누르려는 세력이 기미가요를 얼마나 숭상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기미가요가 한국 외교부 제2차관이 참석한 일왕 생일 리셉션에서 울려퍼졌다. 기미가요가 연주되는 속에서 수난과 고초를 당한 한국인들의 한을 무시하는 장면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서울 남산에서 벌어졌다. 생일연 장소로 활용된 호텔이 위치한 서울 남산은 일왕의 한국 지배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던 곳이었다. 한국주차군사령부, 한국통감부, 한국통감관저, 헌병대 사령부는 물론이고 조선총독부도 1926년까지 있었다. 총독 관저는 1939년까지 있었다.

일본을 상징하는 왜성이란 이름이 붙은 왜성공원도 남산에 있었다. 일본 조상신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를 숭배하는 남산대신궁(경성신사), 아마테라스오미카미와 메이지일왕(무스히토일왕)을 숭배하는 조선신궁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남산은 일왕이 자국의 신과 자국의 군대와 함께 한국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형상화하는 데 활용됐다.

이런 곳에서 일왕 생일을 축하하며 기미가요가 울려퍼졌다. 일본이 전쟁범죄에 대해 배상은 물론이고 제대로 사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3·1절을 보름 앞둔 16일 밤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기미가요 밑에서 수난을 당한 지난 백년간의 우리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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