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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평전>을 집필한 이광호 작가가 26일 오전 서울 마포구 노회찬재단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고 노회찬 의원의 삶과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노회찬 평전>을 집필한 이광호 작가가 26일 오전 서울 마포구 노회찬재단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고 노회찬 의원의 삶과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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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은 대한민국에 명실상부한 대중적 진보정당을 '만들고' 진보정치 시대를 대중적으로 '열어간' 대표 정치인이었고, 진보정당의 집권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온 삶을, 영혼까지 바친 '우직한' 정치인이었다."(<노회찬 평전> 11쪽)

그동안 많은 사람들은 노동운동가, 진보정치인, 촌철살인의 언어마술사 등의 프리즘을 통해 노회찬 의원(1956~2018년)을 이해하고 그에게 열광해왔다. 하지만 일관된 '운동'과 '진보정치'가 어떻게 가능했는가라는 물음을 둘러싼 그의 또 다른 삶의 조각들은 오랫동안 빈 공간으로 남겨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동안 '온전한 노회찬'은 우리에게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노 의원 5주기(7월 23일)에 맞춰 나온 <노회찬 평전>(사회평론아카데미)은 아주 각별하다. 이제서야 '온전한 노회찬'이 도착했고, 그 덕분에 우리는 '진짜 노회찬'과 마주하며 그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노회찬 평전>은 노 의원에 관한 최초의 평전이기도 하지만, 노 의원의 직접 기록과 각종 자료들, 200명이 넘는 사람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노 의원의 삶의 조각들을 촘촘하게 재구성한 것도 최초다. 그에게 '인천 시절'(노동운동가)뿐만 아니라 '부산 시절'(초·중학교)과 '서울 시절'(고등학교·대학교)도 있었고, 이북 출신의 특별한 부모님과 정전협정 이후 북으로 다시 돌아간 외할머니가 있었고, 평범한 부부들처럼 심각하게 부부 싸움도 있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려준다.

노동운동이나 진보정치라는 고단함 속에서도 어떻게 '슬기로운 이중생활'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일관되게 유지했는지, 인터뷰나 토론회 등 공적 대화에는 능한데 지인이나 참모, 부인 등과의 사적 대화에는 서툴렀던 그의 치명적 단점까지 '폭로'돼 있다.  

그 무겁고도 각별한 평전 작업을 4년 동안 진행해온 이광호 작가(66)를 지난 6월 26일 노회찬재단에서 만났다. 2시간 40분이 넘는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절대 노회찬 위인전을 쓸 생각이 없었고, 위인전을 쓰지도 않았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노 의원과 한 살 차이 동시대인이다. "소수파라는 점에서 나와 노 의원은 비슷하다"라고 했다.

한때 이태원 클럽에서 '딴다라'(밴드) 생활을 했고, 이후에는 <미디어오늘>(언론노조)과 <노동과 세계>(민주노총), <진보정치>(민주노동당), <레디앙>을 창간하고 편집책임자로 일했다. 지난 1992년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언론노조) 정책실장 시절 노 의원을 처음 만났고, 국민승리21과 민주노동당에서 함께 일했다. 

"시작한 지 4년 만에 나와… 책 한 권 분량을 들어냈다"
 
이광호 작가가 4년 동안 준비해서 완성한 '최초의 노회찬 평전'.
 이광호 작가가 4년 동안 준비해서 완성한 '최초의 노회찬 평전'.
ⓒ 사회평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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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회찬 평전' 쓴 이광호 작가 “노회찬의 정치보단 62년 삶 기록”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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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전은 언제 기획돼 어떻게 진행됐나?
"조현연 노회찬재단 이사가 2018년 겨울 재단 송년모임 때 처음 제안했다. 그 자리에서 못 쓴다고 거절했다가 2019년 5월에 하겠다는 답을 줬다. 2019년 7월부터 시작했고, 책이 나올 때까지는 만 4년 걸렸다. 최초로 쓴 원고에서 1300매 정도를 들어냈다. 원고를 들어내고, 출판사쪽과 의견을 주고받고 한 게 1년 걸렸다. 그렇게 해서 4년이 걸렸다."

- 처음 썼던 평전 분량이 이것보다 훨씬 많았다고 들었다. 
"1300매를 들어냈는데 이게 두툼한 단행본 한 권 분량이다. 그 정도를 들어냈다."

- 평전을 쓰는 것보다 줄이는 것이 더 힘들었겠다.
"줄이는 게 힘들었다. 평전기획위원들이 '저자가 줄이는 것은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 있으니까 우리가 들어내주겠다'고 했는데 평전기획위원들이 놀랄 정도로 내가 마구 들어냈다. 처음에 3600매 정도를 썼는데 지금 책으로 나온 게 2200~2300매 정도다. "

- 단행본 한 권 분량을 들어내려면 그 고통이 꽤 있었겠다.
"쓸데없는 것을 많이 썼다는 의미도 있을 거다. 처음에는 줄일 생각 없이 나가는 대로 썼는데 (나중에) 앞부분을 많이 쳐냈다."

- 주로 어떤 부분을 줄였나?
"하도 많이 줄여서 기억도 안 난다(웃음). 핵심 팩트들은 있을 테고, 핵심 팩트에 대한 부연이나 주변을 많이 쳐냈다. 예를 들면 '노 의원 고등학생 1학년 때 성적이 중위권이었는데 그 이후는 바닥이다'이라고 썼다면 줄이기 전에는 '몇 명 중에 몇 등'이라고 그 석차를 다 썼다.  또 하나 예를 들면 노 의원이 고등학교 1학년때 거사를 치렀다는 유인물 사건이다. 유인물 사건을 보면 노 의원이 재수해서 1973년에 고등학교(경기고)를 갔는데, 전해에 유신이 선포됐다. 그때 경기고 학생들의 유인물 살포가 있었는데 그때 걸렸다. 여러 명이 걸려서 지금은 수방사(수도방위사령부)에 가서 수사받았다. 그런 얘기들은 다 뺐다."

- 디테일이 빠진 셈이다.
"그런 측면이 있다."

"부산에서의 탈출이 굉장히 중요했다"
  
서울 마포구 노회찬재단 벽면에 고 노회찬 전 의원이 살아 생전에 찍은 사진이 붙어있다.
 서울 마포구 노회찬재단 벽면에 고 노회찬 전 의원이 살아 생전에 찍은 사진이 붙어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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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회찬 의원에 관한 최초의 평전인데, 노 의원의 '무엇'에 중점을 두었나?
"전기, 평전, 일대기 등 여러가지 성격이 있을 텐데 평전기획위원회 첫 회의에서 어떤 방향에 중점을 둘 것인가를 두고 논점이 형성됐다.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노회찬을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잘 아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길래 초치일관 진보정치를 할 수 있었나? 그래서 일대기적 성격을 강조해서 쓴 측면이 있다. 어떤 사람은 노회찬의 정치, 노회찬의 리더십, 노회찬의 언어를 따로 떼서 본격적인 단행본을 낼 수도 있는데 그것은 내 몫이 아닌 것 같다. 

어쨌든 가족사를 좀 집어넣고 일대기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노회찬 정치의 핵심이나 정신, 이념이 뭔지를 쓴 것이다. 노회찬 정치의 이념과 정신이라고 해도 저자가 평가할 때 이렇다, 이런 게 중심이 아니라 노 의원이 생전에 발표한 글이나 얘기했던 언어(말)를 토대로 평가한 것이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저자의 관점을 많이 안 집어넣으려고 노력했다. 평전기획위원 중에는 저자의 의견이 과감하게 들어가는 게 좋다고 한 분도 있었다. 그런데 여러 가지 팩트들이든 인터뷰든 기록들을 봤을텐데 다 쓸 수는 없으니까 그 가운데에서 선택해서 쓰는 것이다. 그 선택된  것에 이미 어느 정도 저자의 시각이 들어가 있다. '이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라고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들은 가급적이면 줄이고, 노 의원의 삶과 언어, 확인되는 기록들을 중심으로 삶 전체를 재구성해보자, 그것에 중점을 두었다."

- 저자도 평전 서문에서 '노회찬의 정치'보다는 '62년 삶의 여정'을 기록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썼다. 
"그런데 삶 자체가 정치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74년 1월 1일 일기에 정치의 중요성을 얘기했는데 실은 1972년 고등학교 재수할 때부터 굉장히 많은 내적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정치에 뜻을 둔 것 사실이다. 물론 재수할 때나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부터 진보정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나중에 그 길로 가긴 갔다. 생전에 자기는 진보정치가 아니면 정치를 하는 의미가 없다고도 얘기했다. 

그때부터 정치를 하고자 했던 것인데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을텐데, 생전 어느 인터뷰에서 '당신이 고등학교 시절 맑스나 레닌 책도 읽었고 전두환 시절 인천에서 비합전위전당 같은 레닌 노선을 걸었는데 당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 레닌이냐?'라는 질문에 '나한테 가장 많이 영향을 준 정치인은 레닌이 아니라 박정희였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눈앞에 있는 군사독재, 유신정권, 이것이 시대적이고 환경적인 조건으로 작용해 그분이 정치를 선택하는 배경이 됐다. 

주체적인 조건에서는 부산에서의 해방, 탈출이 굉장히 중요했다. '서울의 공기는 자유롭다'고 얘기했던 것처럼 서울에서 느낀 자유 속에서 청소년기에 모색을 했는데, 왜 그 모색이 정치로 갔을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신정권이라는 배경도 있었지만 둘째 외삼촌(원태진)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다. 둘째 외삼촌이 정치를 하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이분의 영향력이 컸다. 또 하나는 노 의원이 생전 인터뷰 때 고등학교 때 반 유신은 '사춘기적 특징으로서의 저항'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그런 점도 있었다고 본다. 그 당시에 고등학생들 중에는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이 아주 적지는 않았으니까. 

개인적으로 많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은 '야망'이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 사람들은 청소년기에 세상에 대해 두 가지를 생각하는 것 같다. 하나는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세계 변화가 아니라 내가 기존 구조의 위로 올라가는 꿈인데 '대통령이 되겠다',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것이 그런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을 엎어버리겠다, 뒤집겠다는 것이다. 

당시 경기고 출신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경기고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계층 상승하는 것이었다.그 중에 소수는 세상을 뒤집어 바꾸는 것에 희한하게 뜻을 같이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노 의원은 고등학교 때 그런 친구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이 평생 가까운 벗이 됐다. 개인의 야망이 아니라 세상을 좋게 바꾸는 쪽으로 자신의 삶을 투신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을 평생 유지한 드문 경우가 노 의원이다.

노 의원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내가 생각해도 희한할 정도로 초심을 지킨 사람이다'. 고등학교나 20대 어디 언저리에서 가진 생각과 원칙이 끝까지 유지됐다. 물론 세상이 많이 바뀌고, (노 의원의) 정치도 비합전위정당에서 합법적 대중정당으로 바뀌었다. 현실이 바뀌니까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대응하다 이렇게 바뀌었지만 목표는 불변하는 측면을 강하게 보인 분이었다."

"1983년 인천으로 간 이후에는 개인적인 삶이 없었다"  
 
1990년대 옛 소련을 방문한 노회찬 의원과 이진경씨(현 서울과학기술대 인문사회교양학부 교수, 지식공동체 수유너머104 연구원).
 1990년대 옛 소련을 방문한 노회찬 의원과 이진경씨(현 서울과학기술대 인문사회교양학부 교수, 지식공동체 수유너머104 연구원).
ⓒ 노회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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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회찬재단의 평전기획위원회도 평전의 지향점을 '운동'이 아니라 '사람'을 보여주는 데 두었다고 밝혔다. 노회찬 의원의 '운동사'가 아니라 노 의원의 '삶과 꿈'에 더 중점을 뒀다는 것이다.
"그렇게 했다. 주변 사람들이 노 의원에 대해 '선당후사(先黨後私)'라고 평가하는데, 그런 측면이 있지만 '선후'라기보다 정당이나 진보정치는 노 의원의 확대된 자아기 때문에 삶과 개인적인 일과 정치와 정당활동을 구분하기 어려운 삶을 살았다. 2000년 초반에 민주노동당 기관지인 <진보정치>에서 노 의원을 인터뷰한 적 있다. 그때는 '지상'(합법적 진보정당)으로 올라온 후였다. 그때 인터뷰하는데 자기는 사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 두렵고 어렵다고 얘기하더라. 그동안 계속 조직 생활만 하고 개인 생활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노회찬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정치적 노선이나 입장도 궁금했지만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일관된 입장을 가지고 사는가? 1983년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인천으로 간 20대 중후반부터 개인적인 삶은 없었다. 본인이 한 얘기 중에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자기가 집안 행사 중에 유일하게 안 빠지고 간 게 자기 결혼식뿐이라고. (웃음)"

- 언급한 것처럼 "노회찬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도 없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노회찬 의원을 아는 것은 '운동'과 '정치'에 가 있고,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라는 물음을 둘러싼 그의 삶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운동을 하고 난 뒤에는 몸에 밴 것인지 굉장히 과묵한 스타일이다. 과묵하고 수줍음을 탄다. 이런 애기를 하면 중고등학교 친구들은 깜짝 놀란다. '회찬이가 그래? 처음 듣는 얘긴데' 가족들은 더 놀라고. 그 과묵함이 기질적인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 어렸을 때는 그런 과묵함과 다른 삶이었는데 운동한 이후에는 과묵함이 몸에 밴  것 같다. 사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 익숙지 않고 두렵다는 표현까지 썼지 않나. 

노 의원이 고등학교 때부터 둘째 외삼촌과 여의도 시범아파트에 살았다. 거기에 고등학교 친구들도 데려오고,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면서 고등학교 수준에서 시국을 논의하기도 했다. 그때 외삼촌이 노 의원과 친구들한테 '보안 교육'을 시켰다. 얘네들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까 고등학교 운동권 비스무리한 것 같으니까 '보안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한 것이다. 예를 들면 '너만 알고 있으라고 한 얘기는 이미 여러 사람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증거를 인멸할 때는 태우는 것이 제일 좋다', 이런 교육을 시켰다. 

인천에서 (노동운동가로) 살 때는 과묵함이 체질화 됐다. 인천 시절 사람들을 인터뷰하면 '까먹는 공부를 해서 기억이 정말 안 난다'고 하더라. 그때만 해도 보안이 너무 중요했으니까. 노 의원과 가장 가까웠던 고등학교 친구이고 진정추(진보정당추진위원회)까지 같이한 사람이 정광필(전 이우학교 교장)이다. 난 그분을 만나면 정말 많은 것들, 노 의원에 대한 보고(寶庫)가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 기억을 못하더라. '왜 그렇게 기억을 못 하냐'고 하니까 '그런 훈련(보안 유지)을 하도 많이 하니까 나한테는 디테일한 기억들이 거의 없다'고 했다."

"슬기로운 이중생활은 어떻게 가능했나?"
 
첼로를 켜는 고등학생 노회찬 의원.
 첼로를 켜는 고등학생 노회찬 의원.
ⓒ 노회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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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얘기다. 삶 자체가 정치라고는 했지만, '인간 노회찬'과 '정치인 노회찬'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힌트가 하나 있다. 노 의원이 자기가 이걸 안 했으면 뭘 했을 거라고 가끔 얘기한 적이 있다. 하나는 생물학 계통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생물학을) 자기가 너무 좋아해서. 노 의원이 부산 산복도로 바로 밑에서 살았는데 위로 올라가면 노 의원이 어렸을 때 뛰어놀던 구봉산이 있다. 내가 평전을 쓰면서 가봤는데, 거기서 조그마한 동물 같은 것을 잡아와서 키우는 것을 너무너무 좋아했다. 자기가 고등학교 때 정치·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안 가졌더라면 이쪽(생물학 계통)으로 갔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또 하나는 자기가 음악의 길로 들어서지 않고, 신춘문예에 응모하지 않은 것을 잘한 일로 본다고 했지만 이것은 그 두 개(음악과 문학)에 관심이 있었다는 얘기다. 글도 잘 쓰고, 음악도 좋아하는데 노래를 썩 잘하지는 않았다. 부모님이 악기(첼로)를 일찍 사준 배경 중 하나가 '너는 노래를 잘 못하니까 악기를 해라'였을 정도다. 음악이나 미술에 대한 감수성은 친탁(아버지쪽)을 많이 한 것 같고, 정치적인 기획이나 전략, 초지일관하는 성정은 외탁(어머니쪽)을 많이 한 것 같다. 

언젠가 '타임머신 타면 어디 가서 뭐 하고 싶냐'고 하면 '난 그거 타고 싶지 않다, 그냥 이대로 갈 거다' 그랬다. 그런데 또 물어보니까 그때서야 하는 얘기가 '구한말로 돌아가서 동학농민군이 돼서 한국근대사를 다시 쓰는 역할을 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소도시에서 초등학교 선생님 되고 싶다'고 하더라. 그분의 얘기로 보면 정치를  안 했으면 글쓰기, 문학, 신춘문예 등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다. 생물학은 얘기하긴 했지만 많이 얘기한 것은 아니고. 부산고에 떨어진 다음에 자기는 고등학교에 안 가고 따로 공부해서 사시를 보겠다고도 얘기했는데 마음에 있는 소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기본 성정이 사회성이 높아서 설사 법관으로 간다고 해도 자신의 일신영달(一身榮達)을 위한 법조 활동은 하지 않았을 사람이다."

- 평전에서 "슬기로운 이중생활"이라는 흥미로운 표현을 썼던데 사실 그 슬기로운 이중생활이 없었더라면 '정치인 노회찬의 삶'이 지속가능하지 않았을 것 같다.
"나도 비슷한 생각이다. 평전에 보면, 바다를 보고 싶다고 해서 술 마시다가 동해안으로 가서 술 마신 적이 있다. 그때가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검거되기 1주일 전인가 2주일 전인가 그랬다. 노 의원이 고등학교 때부터 국회에 들어올 때까지 운동이나 정치를 하면서 같은 표현을 쓰는 것 중 하나가 '70프로의 긴장감'이라는 것이 있다. 70프로의  긴장감 속에 사는 삶, 긴장과 모험적인 삶을 즐겼다고 할까. 

예컨대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어 본다. '목욕탕에 가면 냉탕이 좋으냐 온탕이 좋으냐'고. 자기는 냉탕과 온탕, 온탕과 냉탕 사이에 있는 긴장감을 좋아한다고 얘기한다. 고등학교 때 명동에 백기완 선생 등 재야인사들이 강의하는 곳이 있다. 자기는 거기 강의를 들으러 갔다가 전경들 사이를 빠져 나오는 게 제일 좋았다고 했다. 재야인사들 강의를 듣기 위해서 가는 것이지만 전경들 사이를 걸어갈 때의 긴장감이 좋았다는 것이다. '고삐리'가 그렇게 할 정도로 긴장된 삶을 추구한 측면이 있다.

70프로의 긴장감에다 하나가 더 있는데 뭐냐 하면 '의지에 흔들리지 않는 직업 전투원'이라는 표현이다. 이것은 노회찬식 표현이 아닌데 어디서 나왔을까 찾아보니 조해일의 소설 <왕십리>에 나오는 표현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표현이 마음에 와닿았다. 어떤 사람이 소설에서 용병으로 나오는데 용병은 직업 전투원이니까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전투하는 사람들에게 의지는 냉철한 판단을 방해하는 주관적 요소밖에 안 된다. 

노 의원은 <왕십리>에 나오는 이 표현들을 고등학교 때도 썼는데, 70프로의 긴장감과 직업 전투원이라는 표현은 국회의원이 된 이후에도 썼다. 일반적으로 그런 삶을 살았고, (그런 삶이) 체질화됐다. 중학교 친구들 4총사가 있는데, 그 친구들은 노 의원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운동 등에 관해 물어보면 말을 안 했다고 한다. 그냥 재밌는 얘기만 했다고 한다. 그것이 슬기로운 이중생활의 하나인데 이것이 자기의 숨통을 틔우는 일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슬기로운 이중생활은 예술과 음식 쪽에서도 많이 있었고. 

노 의원이 역사를 접근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다. 시대 전반의 배경보다는 그 역사 속에 나오는 중요한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방식을 좋아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쓴 '노회찬의 잡설'에는 7명의 인물이 나오는데, 중학교 친구와 소크라테스, 차이콥스키, 헤겔, 김일성, 예수, 나폴레옹과 대화하는 식으로 글을 썼다. 역사는 시대별 연대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다양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쟁투의 현장이라고 본 것이다. 자기 스스로 그런 역사 속의 인물들과 대화하는 것은 역사 속에다 자기를 상정하는 것 아닌가 싶다. 

노 의원이 '40대 인생론'을 떠벌리고 다녔다고 하는데 김문수(노동운동가 출신 전 경기도지사) 등이 운동을 하다가 보수 여당이나 보수 야당으로 들어가던 나이가 40대쯤이다. '선배들이 왜 이러나?' 노 의원의 결론은 자기 인생 스케줄에 역사를 가지고 와서 (자기 인생 스케줄에) 맞춘다는 것이었다. 노 의원은 그것이 이해가 안 됐다. 그는 인류가 질적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유물사관을 믿었다. 이분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역사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를 생각했던 것 같다. 과거 민주화운동 경력을 내 정치 경력에 어떻게 활용할까, 이런 게 아니다. 이것이 정치적 실천 속에서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역사 속에 나를 항상 투영시켜 놓고 보고, 자기를 역사 발전의 수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역사 발전의 수단이다'라고 보면 결국에는 내가 역사 발전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노 의원 스스로 내 속에다 역사를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역사 발전에 참여하는 수단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발전의 주체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또 이왕이면(역사발전의 수단이면) 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틈을 안 보이고 곁을 많이 안 내주는 사람"
 
노회찬 의원의 부산중학교 수험표.
 노회찬 의원의 부산중학교 수험표.
ⓒ 노회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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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인간은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라고 한다. 보통 사람들은 그 이중성과 모순을 안고 사는데, 특히 변혁, 운동, 진보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중성과 모순을 더 잘 관리하려고 할 것이다. 노회찬 의원은 음악, 문학, 음식 등을 통한 '슬기로운 이중생활'로 그것을 관리했던 것 같다.
"노 의원이 워낙 말이 많은 분이 아니어서, 평전을 쓰면서 부인이나 중고교 친구들, 같이 운동했던 사람들을 만나서 인터뷰 하면 노 의원의 고민이나 고뇌, 내적 갈등, 어려움 등을 들을 수 있겠지 기대했다. 그런데 그런 얘기는 전혀 없었다. 김지선 선배(노동운동가 출신의 여성인권운동가)도 노 의원한테 가장 큰 불만이 '나도 같이 운동하는 사람인데 왜 어려움을 나한테 얘기하지 않나?' 하는 것이었다. 김지선 선배가 노 의원을 남편으로 선택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이 남자와 결혼하면 운동을 계속할 수 있겠다'였다. 이렇게 동지적인 측면에서 결혼했는데 자기 어려움을 얘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부인한테뿐만이 아니라 친구들한테도 그랬다. 그런 것이 후천적으로 기질화된 것 같다.

보좌관들한테도 말이 없으니까 심지어 '오재영('노회찬의 영원한 조직실장'으로 불렸던 참모)과도 내외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툭 터놓고 얘기하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음식 얘기가 나오면 혼자 신나서 눈이 반짝반짝거리면서 많이 얘기한다. 노 의원과 술을 잘 마시는 대표적인 참모 중 한 명이 김윤철(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인데 술을 같이 마신 지 몇 년이 지나서야 '윤철아'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런 것이 잘 안 되는 것 같다. 

노 의원이 제일 어려웠을 시절에 이근원, 박강호, 최철호 등 산별노조 활동가들을 자주 만났는데 자기들이 후배고, 몇 년을 같이 술을 마셨는데도 '야 인마'(편하게 호칭을 낮추는) 이런 적이 없었다고 하더라. 이렇게 자기 곁을 안 주는 거다. 이런 것들이 당내 선거에도 영향을 좀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회찬이 형', '회찬 선배' 이런 분위가 없었다. 그게 정치적으로는 손해보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가까운 사람끼리의 교제 문화가 있는데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친구들한테 동해안 가고 싶다고 한 것이 인민노련 사건으로 검거되기 1주일 전인가 2주일 전인가 그랬다. 당시 중학교 친구들과 신촌 고깃집에 갔다가 2차로 신촌역 앞에 맥주 마시는 데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서 술 마시다가 노 의원이 '청록파 시인들은 만나면 2박 3일로 술을 마신다는데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들한테는 그렇게 했는데 그 이후 동지들이나 선후배한테는 그렇게 하질 못했다. 틈을 많이 안 보이고 곁을 많이 안 주는 사람이다. 사람들을 다 좋아하는데 묘하게 그런 곁을 안 주는 측면이 있다. 같이 일하던 많은 참모들도 노 의원이 흐트러지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봤다고 하거나 한 번 정도 봤다고 얘기하는 사람이다."

- [인터뷰②]"부모에게 보낸 서늘한 편지, 노회찬 이해하는데 중요" https://omn.kr/24nvp
- [인터뷰③] "노회찬, 죽음이라기보다 자기 삶을 그렇게 정리했다" https://omn.kr/24ny6
 

태그:#노회찬 평전, #이광호, #노회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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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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