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25 12:44최종 업데이트 23.07.25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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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위한 ‘역사정의 시민모금’에 지인 213명을 동참시킨 박동기 남녘현대사연구소 소장이 광주광역시 서구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사무실을 찾아 모금운동 홍보물을 들어 보이고 있다. ⓒ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단순한 돈이 아닙니다. 역사정의를 위한 모금은 제2의 독립운동입니다."

칠순의 역사연구가가 보름 동안 지인 수백 명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정부의 제3자 변제를 거부한 일제 강제동원 피해 원고들을 위한 모금운동이 목적이었다. 보름 만에 그 뜻과 정성에 탄복한 213명이 모금에 참여했다.

'역사정의를 위한 시민모금'(http://justicekeeper.kr)에 팔을 걷어붙인 주인공은 박동기 남녘현대사연구소 소장. 광주광역시에 거주하는 그는 민간인 학살과 빨치산, 숨은 독립운동가 발굴 분야의 저명한 역사연구가로 활동 중이다.

일주일 만에 100명 기부자 명단 들고 사무실 찾아

박 소장이 '역시' 모금을 주관하고 있는 사단법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사무실을 찾은 것은 지난 10일. 모금운동을 권유하고 싶은데,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이를 설명한 홍보전단지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홍보전단지를 챙겨 간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손에는 모금운동에 참여한 100명의 명단과 개인별 입금 영수증이 들려 있었다. 그날은 정부의 판결금 수령을 거부하고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 4명을 응원하기 위한 모금운동이 3억원을 돌파한 날이었다.

"만날 사람들을 정해 놓고 웹 홍보물을 먼저 한명 한명씩 카톡으로 보냈어요. 그리고 다시 전화해 직접 찾아갔죠. 만나면 95%는 참여해 줬어요. 금액은 얼마 되지 않아요. 금액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것이 더 중요하죠."

마침 시민모임 상근자들도 모금 계좌에서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을 발견했다. 며칠 새 은행 'CD'를 통한 입금자가 유독 많아졌기 때문. 1만원부터 10만원까지 금액도 다양했지만 1만원 기부자들이 많았다.
 

박동기 남녘현대사연구소 소장이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사무실에서 213명의 기부자 입금 영수증을 정리하고 있다. ⓒ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칠순 날 113명 기부자 명단 추가로 내민 박 소장

핸드폰 하나면 모든 결제가 가능한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번거롭게 은행 CD기기를 통해 입금했을까라는 궁금증이 박 소장 만나고 나서야 풀렸다.

"말은 쉬워도 얼른 계좌로 입금을 못 하니까, 그 돈을 내가 직접 받아서 대신 송금하겠다고 했죠. 입출금 기기에서 일일이 그 사람 명의로 입금한 뒤, 영수증 사진을 찍어 다시 카톡으로 보내줬어요. 신뢰 문제니까요."

그렇게 100명의 명단을 전달하고 돌아간 지 엿새가 지난 24일 박 소장은 113명의 새로운 명단을 다시 내밀었다. 이날은 때마침 박 소장의 칠순 날이었다. 그는 모금운동에 참여한 지인들의 명단을 마치 생일 선물처럼 귀히 여겼다.

"이런 경험도 처음이네요. 통장 하나가 전부 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름만 찍혀있어요. 통장 면수가 아홉 페이지가 넘으면 통장을 새로 또 바꿔야 하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은행 창구에 가서 다시 새로 바꿨죠. 허허."
 

박 소장이 찾아간 대부분 사람은 흔쾌히 동의했지만, 정치적 색채가 짙다며 고개를 돌리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그렇게 발길을 돌리면 내내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회상했다.

"누구를 도와주면 도와줬지, 내가 누구한테 손 벌리지를 못한 성격이에요. 그런데 이번 일만큼은 나서야겠다 싶었죠. 뜻이 있는 일이고 민족운동이니까요."

박 소장의 뜻에 동참한 이들 중에는 대학 교수와 변호사, 광주 시·구의원, 의사, 노동자, 농민 등 지역과 직업이 다양했다.

이체기 앞에서 대여섯 시간, 은행직원도 고개를 '갸우뚱'

많은 사람을 대신한 송금 일은 만만치 않았다. 100명을 이체하려면 못해도 대여섯 시간은 걸렸다. 일일이 계좌 번호를 입력하고, 한 사람 이체하려면 버튼을 몇 번씩 눌러야 했다. 기다리는 뒷사람이 미안해서 비켜주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기기 앞에서 오래 서 있는 것을 이상하게 본 은행 직원도 박 소장의 스토리를 듣고 나서야 의심의 눈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독감으로 며칠 혹독한 고생을 치른 박 소장은 최근 모금운동이 주춤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나서주면 훨씬 수월할 텐데, 광주라는 지역적 틀에 갇히고 있는 듯한 모습도 아쉬운 대목으로 보였다.

현대사 연구에 몰두해 온 그가 왜 이렇게 모금운동에 의미 두는지를 물었다.

"단순히 돈 모으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에요. 일제 과거사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는 원인은 민족이 둘로 분단돼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된 것도 일제 식민지 때문이구요. 그런데 우리 사회를 아직 식민지가 끝난 게 아니에요. 그 뿌리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잖아요. 가해자의 사죄 한마디 없이 일본 대신 지급할테니 돈만 받으라 하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모욕이죠. 그에 맞서 역사 정의를 지키자는 것이니까, 이것이야말로 진짜 제2의 독립운동이죠."

※ 강제동원 피해자의 용기 있는 투쟁과 함께하는 '역사정의를 위한 시민모금'
모금 계좌 <농협 301-0331-2604-51(예금주 :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또는 페이팔(paypal.me/v1945815). 역사지킴이 가입(https://bit.ly/역시역사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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