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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 충북 옥천군 옥천읍과 이원면을 잇는 4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포도 팝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간판과 좌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무더운 여름, 충북 옥천군 옥천읍과 이원면을 잇는 4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포도 팝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간판과 좌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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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 충북 옥천군 옥천읍과 이원면을 잇는 4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포도 팝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간판과 좌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년 중 대부분 꽁꽁 싸매어 있다 7월부터 9월까지만 열리는 이 좌판은 농가가 직접 포도를 판매하는 곳이다.

많은 포도 농가가 최근 대세 작목인 샤인머스캣으로 전환하면서 4번국도 포도 간판이 열리는 시기도 7월 말에서 8월로 늦어졌다지만 직접 키운 포도를 파는 농부의 마음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을 터. 올해 가장 빨리 좌판의 문을 연 동이면 석화리로 찾아가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더러워서! 내가 직접 팔지!

동이면 석화리에 사는 임일재씨는 포도와 복숭아를 주로 농사짓는다. 그의 좌판은 다른 집보다 여는 시기가 이른데 샤인머스캣으로 품종을 바꾼 다른 농가들과는 다르게 아직도 거봉과 캠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조금 이르게 복숭아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연이은 폭우로 노지 복숭아가 큰 타격을 받아 평소보다 이르게 수확한 것이다. 상태가 좋고 맛을 보장할 수 있는 것만 가져와 상자에 담았다고.

"요즘은 이 근처에서 캠벨을 찾으려고 하면 별로 없어. 우리도 엄청 많진 않아, 일부를 샤인으로 바꿨거든. 작년에 포도 복숭아 축제 때 참여한 캠벨 농가가 대여섯 집밖에 안 됐는데 우리가 그중 하나였어. 샤인은 수확 시기가 늦으니까 그땐 참여를 못 하지. 그래서 재미 좀 봤어. 요즘 캠벨은 없어서 못 파는 경우가 많아."

그는 마을에서 제일 일찍 4번 국도변 좌판 장사를 시작한 사람이다. 28번의 무더운 여름과 장마를 겪어 냈으니 그 세월이 무상하다.

"37살이었나, 그땐 온 마을이 다 공판장으로 납품했단 말이여? 10kg짜리 스티로폼 상자에 납품했는데, 상자당 7만 원 줄 테니까 가져오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돈을 바로 안 주는 거야. 두 번째도 안 주고, 세 번째가 되니까 그제야 돈을 주는데 박스당 5만 원에 주더라고."

젊은 혈기에 폭발한 그는 돈이 든 봉투를 바닥에 집어 던지며 상회와 실랑이를 벌였다.

"아저씨! 우리 동네 포도가 다 이리 오는데 내가 도시락 싸서 어른들 다 여기 못 오게 할 거요!"

하지만 별 소용 없었다. 당시엔 작목반 회장이 마을 공동의 이익을 위해 싸우지 않는 것 같아 서운함을 감추기 어려웠다고.

"마을의 이익을 위해 대표로 상회랑 얘기해야 하는데 안 하시더라고. 수확철이 되면 상회에서 얼마만큼 가져오라고 전화가 오거든? 그럼 항상 주문량보다 많이 가져가자고 하는 거야. 그럼 당연히 상자당 가격을 덜 받지. 어렸을 때 농사짓기 전엔 옥천에서 택시를 몰아서 마을 어르신들보다 정보가 빨랐거든. 그래서 막 따졌는데 어떻게 안 되더라, 어려서 힘이 없었던 거야."

반감과 혈기로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읍내에서 파란 천막을 샀는데, 그것이 4번 국도변 포도좌판의 시작이다. 동이농공단지 진입로에 천막을 치고 포도를 내놨는데 귀신같이 다 팔리는 게 아닌가? 그는 그때 무릎을 '탁' 쳤다고 한다. "아, 그냥 여기서 이렇게 팔면 되겠구나! 뭐 하러 상회 눈치를 봐야 하나?"

그날 따서 그날 판매... 샤인 유행 속 여전한 캠벨 인기
 
4번 국도가 4차선으로 확장되며 자리를 버스정류장 옆으로 옮기고 10년, 그리고 다시 그의 땅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직접 키운 농산물을 판매하고 있다.
 4번 국도가 4차선으로 확장되며 자리를 버스정류장 옆으로 옮기고 10년, 그리고 다시 그의 땅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직접 키운 농산물을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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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의 일가족은 농사와 판매를 직접 하기 시작했다. 4번 국도가 4차선으로 확장되며 자리를 버스정류장 옆으로 옮기고 10년, 그리고 다시 그의 땅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직접 키운 농산물을 판매하고 있다. 오랜 장사로 단골이 많아 굳이 다른 판로를 찾지 않아도 충분하다.

"밤에 전화가 와, '포도 준비해 주세요!' 그럼, 평소보다 빨리 나가서 준비해. 새벽에 그 사람들이 와서 가져가거든. 매일 아침에 따서 여기 가져오니까 신선하지. 보면 지금 별로 없지? 오늘 팔 양만 조절해서 가져오니까. 남으면 안 되거든."

장사는 금요일부터 주말이 가장 잘 된다. 도로변을 따라 차가 꽉 들어차기도 할 정도. 그럴 땐 밭을 쉼 없이 오가며 재고를 바로바로 채워 넣어야 한다.

오랜 단골로 굴러가니 서비스가 빠지면 섭섭하다. 조금씩 더 얹어주거나 직접 키운 호박을 주기도 한다. 밭에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우면 전화로 어디 있냐고 찾는데 그럼 "거기 앉아서 복숭아랑 포도 드시고 계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오랜 장사로 다져진 신뢰 덕분일 것이다. 오랜 고객이 캠벨과 거봉을 찾으니, 그가 샤인머스캣 유행을 좇을 필요가 없듯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제일 중요한 건 철이야. 특히 포도는 신선한 걸 먹어야 해. 요즘 젊은 층에서 캠벨을 별로 안 찾는데 나이 드신 분들은 아직도 캠벨이나 거봉을 좋아하거든. 그런데 샤인이 인기라고 다 그것만 하니까 오히려 우리 집으로 캠벨 찾는 사람이 늘었어. 이것도 유행이지. 돌고 도는 거야. 인생도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싶어."

직판만 15년... 신선함 최대로, 판로 최대로

또 다른 포도 재배 농민 임현재씨는 석화리에서 농사를 크게 짓는 편이다. 상회로 가져가면 오히려 가격을 덜 쳐주기도 하고, 매일 있는 경매에 따라 가격 차이가 심했다. 같은 포도인데 어제는 상자당 2만 원 하던 것이 오늘은 1만5천 원이 되는 일이 잦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좌판에서 직판한 지 한 15년 됐어요. 마을 앞에서 직접 팔면 신선한 걸 바로 살 수 있어 소비자도 좋고, 우리는 안정적인 가격으로 팔 수 있으니까 서로 좋은 거죠. 우리 이름을 걸고 파는 거니까 품질에 신경을 더 썼어요. 그렇게 대전이나 청주에서 단골이 생기고 소문이 나서 계속 장사를 할 수 있던 거죠."

그가 캠벨에서 샤인머스캣으로 작목을 전환한 것은 5년 전으로 다른 농가에 비해 이른 편이다. 한 그루당 수확량만 보더라도 샤인머스캣이 캠벨보다 많은데 송이당 가격 또한 더 쳐주니 지금은 마을 포도밭을 샤인머스캣이 점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엔 많은 비와 이른 추석으로 상인들이 덜 익은 포도를 팔아 재구매율이 떨어져 샤인머스캣 위기설이 돌기도 했는데 그의 경우 출하 시기를 억지로 맞추지 않고 맛만 고려해 판매엔 큰 영향이 없었다고.

"요즘은 농사를 잘 짓는 것만큼 판로를 어떻게 구축하느냐가 중요한 거 같아요. 특히 샤인머스캣 주 고객층인 젊은 층은 인터넷 주문을 선호하니까요. 판로가 다양해지면서 마을 앞에서 파는 양은 예전보다 많이 줄었죠."
 
"요즘은 농사를 잘 짓는 것만큼 판로를 어떻게 구축하느냐가 중요한 거 같아요. 특히 샤인머스캣 주 고객층인 젊은 층은 인터넷 주문을 선호하니까요."
 "요즘은 농사를 잘 짓는 것만큼 판로를 어떻게 구축하느냐가 중요한 거 같아요. 특히 샤인머스캣 주 고객층인 젊은 층은 인터넷 주문을 선호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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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사이 농협 APC(농산물산지유통센터)를 통해 출하하는 양이 많이 늘었다. 지난해엔 70~80퍼센트가량 농협을 통해, 남는 물량은 우체국 쇼핑과 마을 앞에서 직판으로 판매했다. 농협의 경우 출하 시기가 되면 견본을 제출해 품질을 확인받는데 이를 통과 해야만 한다. 출하하는 처지에선 신경이 많이 쓰이지만, 안정적으로 값을 받을 수 있어서 매력적이다.

"농협 APC 같은 경우 기준이 엄격해 납품을 거절당하는 때도 있어요. 올해는 비가 많이 와 복숭아 농가가 납품하기 어려웠다는 얘기가 들리기도 해요. 포도는 하우스 재배니까 상황이 좀 낫죠. 공동선별 공동출하니까 우리가 포장해 납품할 필요 없어요. 플라스틱 상자에 정해진 양만큼 넣어 보내면 알아서 분류해서 판매까지 해주니까 더 좋지요."

지난해엔 출하 시기가 예년보다 빨라 농협 APC 쪽 물량이 많았지만, 올해는 출하 시기가 늦어 우체국 쇼핑 물량이 많을 것으로 예상 중이다. 우체국을 통해 주문이 들어오면 포장해 택배로 소비자에게 배송하는데 많을 때는 하루에 300상자씩 판 적도 있다. 마을 앞 판매도 여전히 병행하고 있지만 예전처럼 많은 물량을 파는 것도 아니고 로컬푸드 직매장으로도 납품하니 판매 걱정이 많이 줄었다.

"포도는 일단 따면 이틀 안에 다 팔아야 해요. 남으면 회수해야 하고요. 그러니까 직판이니 로컬이니 판로를 최대한 확보 해야죠. 평균적으로 보면 농협 APC 쪽으로 반, 나머지 반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피할 수 없는 고령화 걱정... "미련은 없어"

두 사람 모두 고령화가 지금 마을에 닥친 가장 큰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임현재씨는 마을 작목반에서 어린 축에 속하는데 그보다 나이가 어린 이는 단둘뿐이다. 마을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은 대부분 도시에서 직장생활 중이다.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게 마을 주민으로, 또 농민으로 두 사람이 가진 큰 고민중 하나. 

"나이 먹고 하니까 힘들어요. 가장 바쁜 5, 6월에 인력을 구하는데 1년에 2천만 원 정도 쓰나 봐요. 그것도 없어서 못 구해요. 군에서 도시농부를 지원해 주긴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고." (임현재씨)

"요즘 놉(일꾼) 쓰는 것도 힘들지, 일당이 많이 올랐어. 바쁠 때 다 같이 바쁘니 그것도 경쟁이여. 그래도 별 수 있나? 써야지. 포도 가격은 그대로인 거 같은데 농자재 가격도 다 올라서 옛날보다 힘들고. 요즘엔 식구가 허리 아프다고 해서 이것도 오래 못할 것 같아." (임일재씨)

시대가 변하고 기술 또한 발전했다지만 포도 농사 방법엔 변한 것이 없다. 1년 수확이 끝나고 날이 추워지면 전정(가지치기)하고 꽃이 피기 전까지 적심(순지르기)한다. 곁가지와 덩굴손도 정리하고 포도알이 열리면 솎아내기 시작한다. 농가의 사계절은 늘 일이 많지만, 이때가 가장 바쁘다. 솎아내기가 끝나고 병충해로부터 포도를 보호하기 위해 봉지를 씌우기까지 아직도 끊임없는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래도 이젠 미련은 없어. 할 만큼 했고 아들도 다 컸으니까. 여기 앉아서 장사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어. 라디오 듣고, 지나가는 차 구경하고, 하늘도 보고." (임일재씨)

"칠십까지만 하고 말아야지 생각하기도 해요. 고령화 때문에 앞으로 농사지을 사람 없다는 얘긴 동네에서도 많이 나와요. 나이를 더 먹으면 나도 그냥 소일거리만 남기고 그만둘까 하는 거죠. 노후 준비는 다 해 놔서 마음은 편해요. 요즘은 손주 보는 것도 좋고 하니까." (임현재씨)

여름을 대표하는 과일 포도, 새콤달콤한 그 맛이 그립다면 캠벨, 껍질째 먹기 편하고 열대과일의 달콤함을 느끼고 싶다면 샤인머스캣. 마트에서 비싼 가격에 눈을 돌렸었다면, 혹은 선물용 과일이 필요하다면 옥천읍과 이원면을 잇는 4번 국도 옆으로 늘어선 포도 좌판에 한 번쯤 들러 보는 건 어떨까? 밭에서 막 올라온 싱싱한 이야기를 가득 품은 그곳을 말이다.
 
마트에서 비싼 가격에 눈을 돌렸었다면, 혹은 선물용 과일이 필요하다면 옥천읍과 이원면을 잇는 4번 국도 옆으로 늘어선 포도 좌판에 한 번쯤 들러 보는 건 어떨까?
 마트에서 비싼 가격에 눈을 돌렸었다면, 혹은 선물용 과일이 필요하다면 옥천읍과 이원면을 잇는 4번 국도 옆으로 늘어선 포도 좌판에 한 번쯤 들러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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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옥이네 통권 74호(2023년 8월호)
글‧사진 임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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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포도, #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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