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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인도와 중앙아시아 40여 개 나라를 탐방한 위대한 한국인이 있었다. 지금이야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로 7~8시간이면 갈 수 있지만, 당시는 몇 개월 동안 육로와 해로를 거치는 길고 먼 여로였다.

신라의 학승 혜초(704~787)는 당나라 유학 중에 인도·중앙아시아를 여행하고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지었다. 천축국은 지금의 인도, 이곳을 다녀온 여행기라 하겠다. 불법을 연구하고 구도를 위해 불교의 발상지를 찾은 것이다. 일종의 성지순례이지만 그의 여행은 문명기행의 성격이 짙었다.

그는 스무 살 때 중국 광주를 출발하여 해로로 남중국해→벵골만을 통해 인도로 들어갔다. 육로로 동천축→마게타국→중천축→나시크→서천축→북천축→가십마리국→건타리국→람파국→사율국→범인국→토화라국→호밀국→총령진→소륵국→구자국→연기국→돈황을 거치는 수만 리 길이었다.

풀이하면 지금의 사이공→수마트라→말레이반도→인도→티베트→파키스탄→우즈베키스탄에 이르는 여정이다. 그는 가는 곳 마다 그 나라의 정치·사회·문화·풍속·생활사 등을 지켜보고 기록하였다. 북천축국을 찾았을 때, 이 나라의 왕은 300마리의 코끼리를 갖고 있으며 외출할 때 왕과 수령들은 코끼리를 타고 낮은 관리들은 말을 타지만 백성들은 걸어다닌다고 기술하였다.

대식국(大寔國)에서는 왕과 백성들이 똑 같은 옷을 입어 구별이 없고, 식사도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 손에 숫가락과 젓가락을 들었으나 보기에 매우 흉하다고 쓰고, 사람들은 살생을 좋아하고 알라신을 섬기거나 불법을 알지 못한다고 기록했다.
여행 중 고국을 그리는 시도 지었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 바라보니
뜬 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 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땅 끝 동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일남에는 기러기 마져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려 계림으로 날아가리.


혜초의 약력
 

704년(혹은 700년) 신라출생.
719년 당나라에 감. 금강지를 사사.
723년 중국 광주를 떠나 바다로 인도에 감.
727년 11월 안서 도호부 소재지인 구자로 돌아옴.
733년 1월 1일 장안 천복사에서 이후 8년간 금강지와 함께 밀교 경전 연구.
740년 1월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발대교왕경>의 필수와 한역 시작.
741년 중추 금강지 입적. 위 경전의 한역 작업 중단.
773년 10월 장안 대홍선사에서 불공의 강의 수강. 관정도량 등 밀교 의식 주도.
774년 5월 7일 불공 입적. 그의 6대 제자 중 한 사람이 됨.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 작성.
762년~779년 왕에게 <하옥녀담기우표>를 올림.
780년 4월 15일 오대산 건원보리사에 들엉가 5월 5일까지 앞의 밀교 경전을 재록.
그 해 이곳에서 입적.(정수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혜초는 신라로 돌아오지 않고 당나라에서 지내다가 76살에 입적한 것으로 전한다. 그럼에도 성직자로서, 학승으로서, 역사가로서 서역을 방문하고 사회상을 기록한 <왕오천축국전>은 많은 의미를 주고 있다. 한 연구자의 평가다.

첫째, 혜초는 앞서의 선배들과는 달리 해로로 가서 육로로 돌아오는 새로운 인도 여행로를 개척하였다.
둘째, 이 책은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실상을 전해주고 있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세계에서 유일한 기록이라는 점이다.
셋째, 8세기 인도의 정치·사회·문화·언어 등 각 분야의 연구에 많은 자료를 제공해준다.
넷째, 8세기 불교학자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다섯째, 8세기 중앙아시아 지역의 정치와 사회, 국제관계 연구에 중요한 자료는 제공해준다. (곽승훈, <혜초, 왕오천축국전>, <한국사시민강좌 42>)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이자 탐험가인 펠리오가 중국 서북부 감숙성의 돈황(敦惶) 천불동에서 필사본으로 발굴하였다. 한 권의 두루마리로 된 필사본으로서, 책명도 제자명도 떨어져 없어진 총 227개 행(한 행은 17~36자 한 장은 26~28행)의 잔간이다. 227행 중 글자가 없는 완전한 행은 210행이고, 총 글자는 5893자로 한 행은 평균 2801자이다.

펠리오는 발굴된 자료가 신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임을 확인하였다. 우리의 국보 문화재인 이 필사본은 현재 프랑스 파리 국민도서관에 소장되어 귀향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혜초는 분명 '위대한 한국인'이고 그의 서역기행은 거룩한 장거이다. 그리고 그 기록인 <왕오천축국전>은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최고(最古) 서지(書誌)로서 명실상부한 우리의 국보급 진서이자 불후의 고전이다. 혜초는 동양이 배출한 세계인이기도 하다. 동양에서 혜초에 앞서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해로와 육로로 일주한 사람은 없다.

8세기 무렵의 인도와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아랍에 관한 생도하고도 정확한 현지 견문록을 남겨놓음으로써 그의 여행기는 중세 세계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원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혜초와 그의 여행기가 지닌 민족사적 업적한 세계사적 가치를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정수일, 앞의 책)
 

태그:#겨레의인물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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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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