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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1885년 9월 어느날 나는 본국정부로부터 부당한 지시를 받았습니다. 

"저는 안녕합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저의 활동을 지원하거나 아니면 저를 해임시키는 문제를 완전 방치한 채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 매우 울적하답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일을까요? 그런 와중에 우리 정부는 제게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20년 전에 조선인들이 파괴한 제네럴 셔먼호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배상금을 조선으로부터 쥐어짜내라는 지시였지요.

가슴이 답답합니다. 조선이 배상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배상하지도 않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시 조선은 외국 선박의 입항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셔먼호가 조선에 와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요. 게다가 셔먼호 사람들이 총을 쏘아댔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그들이 위해를 가하러 온 줄 알았습니다. 생명 손실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조선 측에 물을 수 없는 일입니다. 셔먼호 사람들은 최초의 침략자들이었으니까요." - 1885. 9. 28 편지


내가 충성을 바치고 있는 자랑스러운 고국으로부터 부당한 지시를 받는 일은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한편 1885년 9월 27일 밤 조선의 외교부서에서 만찬이 있었습니다. 제물포-서울간 전신 개통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최근 러시아의 태도에 대하여 중국인들이 식겁하여 서울과 북경을 전신망으로 연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국왕이 요청한 것이라 하지만 전신망 부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조선인들은 중국이 제시한 비용 140,000불을 받아들인 것 같군요. 공사를 위해 중국 사람들이 몰려왔고 금세 제물포-서울간 공사가 완결되었답니다. 다른 구간도 두 세 달 내에 이루어질 것 같군요.

일본대표는 분개하고 있군요. 이 공사로 조선과 중국의 유대가 공고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외교부에서 개최된 축하 만찬에 저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총 한 자루를 소지한 채 참석했답니다. 귀가하여 잠자리에 들었는데 몸이 아파왔습니다. 통증이 극심하여 살점이 떼어나가는 듯 하더군요. 다음날 아침 식사도 할 수 없었고 종일 우울했지요. 그러나 회복하는 중입니다. 일본에서 창궐하던 콜레라가 수그려 들었지만 우리의 함선에서 5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답니다." - 1885.928. 편지


10월 5일 대원군이 청국에서 돌아 왔습니다. 40명의 청국 해병의 호위 속에서 말입니다. 그날 제물포에는 대원군의 환국을 축하하기 위하여 8천명 가량의 조선인들이 몰려들었답니다. 한편 고종은 남대문에 조성된 단으로 나아가 대원군을 정중히 맞았습니다. 거리는 온종일 흥분한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지요.

항간에 풍설도 난무했답니다. 백성들이 대원군을 받들어 폭동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점 때문에 중국인과 조선 정부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많은 관리들과 백성들이 피난을 떠났고 정부는 개점 휴업상태에 빠졌지요. 그러나 중국인들이 대원군을 철저히 감시하여 실제로 무슨 사고가 발생하진 않았답니다.

대원군은 1882년 청국에 의해 납치되어 청국에서 연금상태로 지내다가 2년여 만에 돌아 온 것인데 그의 귀환은 정국을 아연 긴장시키고도 남았습니다. 그는 수많은 기독교인과 기타 인명을 살상한 잔혹한 폭군이라고 알려져 있었지요.

1882년 그는 왕비를 중심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민씨 세도를 척결하고자 군인들의 반란(임오군란)을 사주하였고 거의 성공할 뻔 했습니다. 그 순간에 중국이 그의 덜미를 잡아 끌고 간 것이었지요. 

민비는 대원군이 환국한 지 불과 이틀 후에 3명을 처단토록했는데 그들은 3년 전 임오군란시 대원군의 반란을 도왔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처단한 것은 분명 대원군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경고였지요. 하지만 사람들의 분노를 더욱 끌어 올릴 따름이었지요.

나는 대원군을 만나러 갔는데 놀랍게도 그가 무척 반색하더군요. 얼마 뒤 그는 행차를 갖추어 답방을 왔고 선물로서 많은 과일과 견과류를 주더군요. 나이가 68세인 대원군은 50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더군요. 그는 마치 철강처럼 강인하고 스마트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중국과 조선정부는 그를 정치로부터 격리시키려고 애쓰지만 그는 너무 활동적이어서 오랫동안 잠자코 있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만일 그가 제대로만 활동한다면 조선을 위해 많은 좋은 일을 할 것 같았습니다.

그는 이 나라에서 강인하고 지적이며 활동적인 성격을 지닌 유일한 인물 같았지요. 기이하게도 국왕은 고령의 아버지와 대적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국왕은 아버지가 문제를 일으킬까 봐 두려워 합니다. 

당시 대원군의 존재는 최대의 근심거리였습니다. 언제라도 난리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중국 총독 원세개는 말하더군요. 그럴만도 했습니다. 민비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대원군을 감금시켜 놓다시피 했습니다.

한편 군졸들이 궁을 지키고 있는데 국왕은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낮에 잔답니다. 밤에는 엄격히 통행이 금지되었구요. 이 나라는 언제라고는 예측할 수 없지만 필시 분할되고 말 것 같았습니다.

서양의 어떤 국가가 개입하여 독립을 유지시켜 준다면 모를까. 실로 관민의 끝없는 모략과 음모, 음습한 분위기에 있어서 조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고요가 유지되고 있었지요.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였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당시 조선에는 세 개의 당이 있었습니다. 즉, 국왕당, 왕비(민비)당, 그리고 대원군당. 조선의 상황은 참담했습니다. 정부 부재상태나 마찬가지였지요. 모든 일을 중국인들이 좌지우지했습니다. 중국은 내놓고 하지는 않지만 무력 혹은 무력 위협을 사용하여 교활한 방법으로 지배합니다. 그게 더욱 나쁘지요.

나는 조선에서 내가 보고 겪고 느낀 것을 훗날 책으로 내야겠다는 생각으로 기록하고 자료를 수집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찍은 사진들 몇몇을 이 편지와 함께 보내드립니다. 제 글보다 사진이 더 조선의 진실을 더 잘 보여 줄 것 같습니다…. 갑신정변 전에 좋은 사진들을 많이 찍었지요. 그러나 난리통에 도난당하고 말았답니다. 더러는 지방 여행중에 잃어버렸지요. 구릉과 강물에서 잃어버렸고 나룻배에서 물에 빠뜨렸지요.

제가 보낸 사진들은 적당한 공책에 붙여놓아 주세요. 꼭 잘 보살펴주세요. 제가 다시금 사진과 사진판을 옹땅 잃어버릴 수도 있어요. 만일 그렇게 되면 제가 훗날 조선에 대한 보고서나 책을 쓸 경우에 아버님이 받으신 사진들이 매우 소중하게 될 겁니다. 편지들도 마찬가지구요." - 1885.9. 28 편지

태그:#조지포크, #대원군, #민비, #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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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만남이길 바래 봅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제2의 코리아 여행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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