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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갑신정변 기밀 보고서가 미국 정부의 실수로 언론에 보도되는 통에 나는 조선의 권문세족의 증오를 샀고 청나라의 야만적인 공격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나는 너무 심란하고 피곤하고 화가 나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답니다. 그래서 12월 21일 서울에서 17마일 떨어진 부평이라는 곳으로 호랑이 사냥을 나갔습니다. 몸이 완전히 녹초가 되었지만 호랑이는 잡지 못하였답니다.

"아버님, 어머님….
돌연 우리 정부가 저의 서명을 부각시킨 보고서를 공표함으로써 조선과 청나라를 들쑤셔 놓았지요. 저는 이곳에서 혈혈단신으로 공격의 화살을 모두 받아야 합니다. 우리 정부의 행동은 비열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군요. 이 시점에서 정부가 제 보고서를 공표한 것은 여지껏 저에게 가해온 모욕과 고통에 더하여 결정타를 날린 거나 다름없지요. 그게 끔찍한 과실인지 아니면 기획된 계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여태 미국의 공직자로서 조선인들로부터 받아온 신망을 결정적으로 상실토록 만들었답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제 당장 먹고 살 직장도 없는 가운데 일종의 추방자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지요(그러나 제 양심엔 걸림이 없답니다.)
 -1886.12.31 편지


보고서를 조지 포크가 언론에 공개했다는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진실을 알고 있는 국왕은 관리들을 내게 보내 조선에 남아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관리들에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조선 외교부서가 취한 행동이 청나라의 폭압 때문임을 알기에 그 일로 조선인들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또 조선인들에 대하여 억하 심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관리들이 제 나라 왕의 뜻을 거슬러 청나라의 지시대로만 행동하는 한 결코 조선을 위해 일할 수 없습니다."

휴가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던 1월 17일 왕이 보낸 관리가 은밀히 찾아 왔습니다.  조선에 남아 달라고 하면서 민영익이 다음 달에 귀국하니 그와 함께 개혁 조치를 추진해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국왕의 뜻이라면 내 삶의 반이라도 내주고 싶은 심정이지만 신하들이 청나라를 섬기는 한 복무할 수 없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이곳은 정치 정세가 점점 어지러워지고 있답니다. 심각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곧 나가사키로 갈 겁니다. 그곳에서 Birch영사의 객으로 한 달 간 머물 예정이지요. 시간을 좀 보내면서 방도를 찾아 보겠습니다. 지금이니 말씀입니다만 록힐이 오기 전엔 건강이 정말 나빴답니다. 그가 온 뒤로 기력을 회복하였답니다. 슈펠트 제독은 록힐의 부임이 저의 생명을 구했다고 말한답니다."
-1887.1.18 편지


나는 1월 24일 한양을 떠나 제물포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영국 부영사와 사흘을 지낸 후 1.27일 Heigo-Maru호에 올랐지요. 배 위에서 긴 편지를 썼습니다. 나의 생명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심정으로.

"1887.1.29. 조선, 부산 S.S. Heigo-Maru호 선상에서
아버님, 어머님…. 
만화경 같은 제 삶에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상상할 수 없군요. 오직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지금 제가 휴가중이라는 것, 조선의 국왕이 저와 연락을 할 것이며 장래 언젠가 저를 조선으로 초빙할 거라는 사실 뿐이지요. 우리 정부가 저를 이렇게 망가뜨린 데 대하여 강력한 항의 편지를 쓸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뭔 소용이 있겠을까 하는 생각에 그만 두고 말았지요. 공사관을 떠난 후로 저는 몸이 훨씬 좋아졌답니다. 저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세요.…."


1월 31일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Birch영사 집에 묵었습니다. 버치 영사는 총각인데 입안의 혀처럼 싹싹했습니다. 오랜만에 안락한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지요. 그러던 중 2월 21일 왕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곧 조선으로 돌아와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는 조선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지난 달 21일 국왕으로부터 군사 수석 교관이 되어 달라는 정식 요청을 우리 공사관을 통해 받았답니다. 또한 측신들이 저에게 편지를 보내와 하루 속히 조선에 돌아와 일을 맡아 달라고 하고 있답니다. 한편 바로 이 시간에 세 통의 편지가 익명으로 이 곳 신문에 실렸습니다. 슈펠트 제독과 저를 맹비난하고 있군요. 

슈펠트 제독이 조선에서 지날 달 21일 여기로 왔답니다. 얼마전에 조선 외교부가 저를 비난하자 슈펠트 제독은 조선정부에 그 비난을 철회하라고 요청했으나 조선 정부가 아무 조치를 위하지 않자 조선을 떠나온 거랍니다.  

저는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0일 정오 여기에서 출항하여 제물포로 갈 겁니다. 암굴로 뛰어드는 모험이랍니다. 모든 것이 장막에 가려져 있지요. 제가 다시 조선 행을 감행하는 것은 하늘을 우러러 떳떳하다는, 오직 그 이유 때문이고 또 제가 섬기는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려는 까닭입니다. 저는 해군 무관 자격으로 공사관에 복귀하려 합니다. 차후에 훌훌 벗어나면 국왕을 위해 복무할지도 모릅니다. 

여기 온 후 20일 정도 소화불량이 심했답니다. 2월 25일 시마바라의 옛 마을로 정처 없는 유랑길을 떠났습니다. 밤에 산을 오르다가 길을 잃었지요. 가까스로 마을을 찾으니 새벽 2시였습니다. 깔끔한 일본 여관에 들었는데 친절하게 대해 주더군요. 다음 날 여관을 나섰지요. 그렇게 사흘 만에 나가사키의 숙소로 귀환했답니다. 몸이 거뜬했답니다. 지난 2년 간 어느 때 보다도 좋더군요. 지금 저는 원기 왕성합니다. 

아버님, 어머님, 제가 늘 걱정을 끼쳐드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든 제가 정도를 걷고 있음을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정도를 걷고 양심을 지켜나간다면 이 세상에서 혹은 내세에서라도 보상을 받을 것임을 믿으신다면, 저 때문에 괴로워 하시지 않을 겁니다. 그러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설령 최악의 상황이 닥치더라도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회피하지 않을 겁니다."
-1887. 3.8 편지


나는 3월 10일 정오에 나가사키 항을 떠나 조선으로 향했습니다. 조선 바다가 보이자 나는 문득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는 걸까? 마법에라도 걸린 것일까? 무엇이 나를 이렇게 조선으로 흡인하고 있는 것일까?" 3월 13일 어둡고 위험한  조선 땅에 발을 다시 들였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왕은 제가 즉시 신식 군대를 맡아 주기를 원하고 있답니다. 저는 신중한 입장입니다. 그 자리를 맡고 나면 청나라인들과 러시아인들로부터 집중 공격의 타깃이 될 게 분명하고 생명이 위험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만일 우리 정부의 보호를 믿을 수 있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건 전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지난해 6월 이래로 국무부에 저의 장래를 묻는 편지를 거듭 보냈지만 여태 가타부타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신임 공사 딘스모어DINSMORE가 곧 부임할 것 같습니다. 희소식입니다. 저는 푹 쉬어서 아주 건강하답니다. 하루에 열 다섯 시간에서 열 여덟 시간을 잡니다. 그래도 더 자고 싶답니다. 식욕도 좋구요."
- 1887.3.27 편지

태그:#조지포크, #고종, #슈펠트, #원세개, #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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