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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인의 12.12 군사반란 관련 신군부 인사들의 육사 기수, 당시 계급, 생존 여부 및 안장정보 그리고 좌측 원이 유학성, 우측 원이 김윤호
 34인의 12.12 군사반란 관련 신군부 인사들의 육사 기수, 당시 계급, 생존 여부 및 안장정보 그리고 좌측 원이 유학성, 우측 원이 김윤호
ⓒ 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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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신군부 반란에는 3명의 선배가 함께했습니다. <서울의 봄> 영화 속에서도 그들의 모습은 잘 드러났었는데요.

수도군단장 차규헌(육사 8기)을 모티브로 한 현치성(배우 전진기) 중장, 1군단장 황영시(육사 10기)를 모티브로 한 한영구(배우 안내상) 중장,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정훈 1기, 육사 8기 대우)을 모티브로 한 배송학(배우 고 염동현) 중장이 바로 그들입니다.

전두광의 선배임에도 그에게 쩔쩔매는 모습이 한심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12월 14일 촬영된 위 사진에는 12.12 군사반란에 등장하지 않았던 육군보병학교장 김윤호(육사 10기) 소장도 보입니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12.12 반란 당시 최규하 대통령에게 연행 재가 요청을 했던 인물은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대장 외 2명이 더 있었습니다. 제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 육군특수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에 대한 연행을 함께 요청했습니다.

수도권에 있는 사령부입니다. 여기에 제3군사령부 예하 군단인 1군단장과 수도군단장이 반란군 지휘부에 함께 하였고, 특전사령부 예하 여단인 1, 3, 5공수 여단장들이 반란에 함께 하였기에 이건영 3군사령관과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예하 부대를 반란군 방어에 활용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소장이었던 전두환과 하나회 세력은 선배들을 후원자로 끌어들이면서 육사 11기가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고, 혁명의 명분을 가져가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두환, 노태우와 선배 4인방은 이들은 반란 이후 6인위원회를 구성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장악하여 국정에 개입하고, 군부를 개편해 신군부 집권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이들은 2022년 황영시를 끝으로 모두 사망하였고, 유학성(장군1묘역 2호), 김윤호(장군2묘역 232호)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대법원 판결 10일 앞두고 현충원 온 유학성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2호에 안장된 유학성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2호에 안장된 유학성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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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1묘역 2호에 안장된 유학성은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가장 높은 곳, 볕 잘 드는 자리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국방부 군수차관보였던 유학성은 전두환보다 선배(정훈1기, 육사8기 대우)로, 중장이었습니다.

반란 당시 30경비단에 반란 지휘부로 있으면서 장태완 장군을 반란군으로 회유하다 호되게 욕먹는 장면이 영화 <서울의 봄>과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연출되기도 하였습니다.

유학성은 반란 이후 이건영 제3야전군사령관 자리에 앉았습니다. 5·18 이후, 6월 대장으로 진급하고 전두환에 이어 중앙정보부장과 초대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지냈습니다. 1985년부터는 제12, 13, 14대 국회의원으로 권력을 누렸습니다.

1993년 3월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에서 유학성은 60억 원을 신고해 군 출신 의원 중 1위로 집계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 100억 원 이상 축소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군인과 공직생활로 모으기에는 어마한 재산입니다.

1995년 12월 19일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14대 국회를 통과하면서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하여 12.12 군사반란과 5.17내란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유학성 또한 1996년 1월 17일 구속수감 되고 이후 반란죄와 내란죄가 인정되어 1996년 8월 26일 징역 8년 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항소했습니다.

12월 16일 항소심 선고에서는 징역 6년으로 감형되고, 19일 건강상의 이유로 구속 집행정지로 풀려나 불구속 상태로 상고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97년 4월 3일 지병으로 사망한 그는 7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습니다.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5조 제5항 제3호 가목과 나목에 의하면 내란모의참여, 반란모의참여의 죄를 범하여 금고 1년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고 그 형이 확정된 사람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었을까요?

그는 1심과 2심에서 유죄를 인정받았지만, 상고심 선고 전에 사망하였습니다. 피고인 전원 상고심이 기각되어 2심 형이 확정된 것을 볼 때 유학성 또한 사망하지 않았으면 항소심 대로 징역 6년 형이 확정되어 현충원 안장 자격이 박탈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망인에 대한 공소가 불가하기에 공소가 기각되었고 유죄가 확정되지 않아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 유학성과 함께 재판을 받았던 전두환의 선배 차규헌과 황영시는 대법원 상고심이 확정된 이후 사망하여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죽어서도 후배 전두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2005년 현충일을 앞둔 6월 1일 전두환씨는 부인 이순자씨와 함께 유학성의 묘를 찾아 참배하고 헌화하였습니다. 그리고 화환을 5일 후인 현충일에 발견한 시민들은 분노하여 그 화환을 파손하고 치워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관련 기사: 전두환의 '12·12 쿠데타 동지' 몰래 참배 작전 http://bit.ly/2n9gXD)
 
대전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서 장인인 이규동 장군 묘소와 유학성 전 의원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 (2005년)
 대전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서 장인인 이규동 장군 묘소와 유학성 전 의원의 묘소를 참배하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 (2005년)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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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와 민주노동당 회원, 대학생 등 100여 명이 2005년 6월 6일 오전 대전국립묘지 장군 제1묘역내 김창룡, 유학성 묘소 앞에서 이장 촉구 집회를 연 가운데 군 관리병과 사복 경찰들이 묘소를 둘러싸고 접근을 막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민주노동당 회원, 대학생 등 100여 명이 2005년 6월 6일 오전 대전국립묘지 장군 제1묘역내 김창룡, 유학성 묘소 앞에서 이장 촉구 집회를 연 가운데 군 관리병과 사복 경찰들이 묘소를 둘러싸고 접근을 막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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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직후 모셔진 선배, 김윤호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232호에는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한 또 한 명의 전두환 선배가 있습니다. 당시 육군보병학교장 김윤호가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김윤호는 소장으로 전두환과 계급은 같았지만, 육사 10기로 전두환보다 선배였습니다.

한 기수 선배이지만, 육군사관학교가 11기부터 4년제로 바뀐 것을 고려하면 소위 임관은 만 4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12월 12일 30경비단에 있지 않았던 김윤호는 12.12 관련 재판을 피할 수 있었고, 이곳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
   
김윤호는 12.12 군사반란 당시 30경비단에 모이지 않았기에 영화 <서울의 봄>에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안사에서 작성해온 <제5공화국 전사>에 따르면 전두환은 12.12 군사 반란 이전에 황영시, 김윤호와 만나고, 군 개혁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그리고 반란 직후인 13일 새벽 5시에 반란군에 합류하여 6인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1966년 주미 대사관 공사를 지내고 베트남 파병을 거치며 영어에 능통한 군부 내 미국통이었습니다. 미 국무부 '비밀 해제 문건'에 따르면, 김윤호는 1980년 1월 26일 글라이스틴 대사와 만나 12.12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고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습니다. 이에 미국 또한 반란을 묵인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 신군부는 군 장악뿐만 아니라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232호에 안장된 김윤호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232호에 안장된 김윤호
ⓒ 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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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뒷수습에 성공한 김윤호는 출셋길을 달렸습니다. 중장으로 진급하여 황영시를 이어 1군단장을 지내고 1년도 되지 않아 대장으로 진급하여 제1야전군사령관이 되고 또 1년 만에 대한민국 국군 의전 서열 1위인 합동참모의장이 되었습니다.

예편 이후에도 대한석탄공사와 한국가스공사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다 2013년 1월 12일 사망하였는데, 12.12 관련 재판을 받지 않은 그는 15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무덤 232호 바로 앞 255호에는 공수여단장 가운데 유일하게 반란에 맞섰던 윤흥기 장군이 잠들어 있습니다. 진압군 바로 머리 위에 반란군이 누워있는 형상입니다.

전두환 신군부의 반란 이후 육사 8~10기 선배들은 대부분 예편되었습니다. 반란에 가담하여 신군부를 도왔던 차규현, 유학성, 황영시, 김윤호는 모두 대장까지 영전하였으며, 전두환, 노태우와 함께 6인위원회를 구성하여 국정을 장악했습니다.

예편 이후에는 장관, 안기부장, 국회의원, 공사 사장 등을 역임하며 부귀영화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학성과 김윤호는 죽어서도 국립현충원에 모셔지는 영광을 누리며, 각각 정승화 총장, 윤흥기 장군 인근에 잠들어 죽어서도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듯한 씁쓸한 국립대전현충원의 모습입니다.

[참고 자료]
-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5조 제5항 제3호.
- 보안사령부, <제5공화국 전사> 3권, 1982.
- 서울고등법원 1996. 12. 16. 선고 96노1892 판결.
-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태그:#서울의봄, #1212, #반란, #전두환, #대전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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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기획홍보팀장, 유튜브 대전통 제작자, 前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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