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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전에 치러진 순천의 왜교성 전투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후시미(伏見城)에서 사망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일본군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는데, 이때 왜교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탈출을 계획한다. 이를 제지하려는 조명연합군이 왜교성을 일곱차례 공격했으나 결국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의 소극적인 대응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후 명나라의 육군이 철수했지만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璘)과 함께 왜교 앞바다와 장도 일대를 지키며 일본군의 탈출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유키나가의 뇌물을 받은 유정과 진린이 퇴로를 열어주자며 이를 승인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대장은 화친을 말해서는 안되고 원수 왜적을 놓아 보낼 수 없다(大將不可言和, 讎賊不可縱遣)"며 강하게 반발하였다(이분의 <행록>).

11월 17일 저녁 사천에 주둔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남해에 주둔한 야나가와 시게노부(平調信)가 수백 척의 전선으로 출동하자, 이순신과 진린은 야간 출동을 준비했다.(선묘중흥지) 이튿날 오후 6시에 사천의 요시히로와 남해의 소 요시토시(宗義智), 부산의 데라자와 마사나리(寺澤正成)와 다카하시 무네마스(高橋統增) 등이 연합한 일본선 500여 척이 노량 일대에 집결하였다(<日本戰史 朝鮮役本編>). 이때 출동한 명나라의 전선은 <난중일기>에는 "백여 척", <섬호집>에는 "130척", 제갈원성(諸葛元聲)의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에는 "3백여 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18일 밤 10시 경 이순신은 선두에서 조명연합군을 이끌고 출항하여 조선 수군은 노량해협 우측인 남해의 관음포(觀音浦)에 주둔하고, 명군은 해협 좌측에 있는 곤양의 죽도(竹島)에 주둔하였다. 이때 일본선은 사천 남해 수로에서 노량을 지나 한창 순천 왜교를 향하고 있었다.(난중잡록)

19일 자정에 이순신이 배 위에서 "이 원수를 제거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此讐若除, 死卽無憾)"라고 하늘에 기도한 뒤 출동했는데, 진린 부대가 뒤를 따랐다. 그후 노량에 도착한 조명 연합군은 일본선 5백여 척을 만나 아침까지 큰 격전을 벌였다. 노량해전의 발생시간에 대해서는 안방준의 <노량기사>에는 '어둔 새벽'으로, 진경문의 <섬호집>에는 '자정'으로 되어 있다.

한창 혼전을 벌일 때 진린의 부하가 사천의 일본군을 살육하자, 일본군들이 이순신의 전선을 포위하여 진린이 포위를 뚫고 들어가서 구출했다. 일본군이 또 진린의 배를 포위하고 공격하려 하자, 진린의 아들 구경(九經)이 몸으로 막다가 적의 칼에 찔려 피를 많이 흘리기도 하였다.(재조번방지) 조명연합군이 장작불을 일본선에 던져 불태우자, 마침내 일본선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 남해 관음포(觀音浦) 항구로 들어갔다. 그러나 일본군은 뒤로 돌아갈 길이 없어 반격하였는데, 여기에 맞선 조명군과 일본군간의 치열한 육박전이 벌어졌다.(선묘중흥지, 난중잡록)

그때 이순신은 직접 북채를 잡고 북을 치고 일본군을 추격하다가 적의 포병들이 배꼬리에 엎드린 채 일제히 쏜 탄환을 맞았다. 이순신은 눈을 감으며 "전투가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고 말하고는 운명하였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이순신이 직접 북채를 잡고 지휘하여 일본군을 추격하며 죽이다가 적의 포병이 배꼬리에 엎드려서 이순신에게 일제히 발사하여 이순신이 탄환을 맞고 인사불성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순신의 마직막 임종을 지켜본 사람은 맏아들 회(薈)와 조카 완(莞), 종 금이(金伊) 3명였다. 이순신의 심복였던 송희립도 그 현장에서는 이순신의 사망 소식을 몰랐다. 그때 회(薈)와 완(莞)이 곁에서 소리를 죽이고 말하기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망극도 하다. 만약 죽음을 드러내면 온 군이 놀라서 동요할 것이고 저 적들이 기회를 틈타 시체도 온전히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아직은 참고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소" 하고서 방안으로 시체를 안고 들어갔다. 그후 독전의 깃발은 계속 휘날렸다.(이분, 행록)

한편 이탁영(李擢英)의 <정만록(征蠻錄)>에는 "이순신이 조카 이완에게 내가 죽었다는 말을 군중에 알리지 말고 나의 병법대로 싸우라"고 유언했다고 되어 있다. 이완이 그말대로 일본군을 공격하여 대패하게 했다는 내용이다. 이완이 독전하여 승리하게 했다는 기록은 실제 김육의 <신도비명>, 최유해의 <행장>, 이식의 <시장>, 송시열의 <노량묘비> 등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한편 편장(褊將) 손문욱(孫文稶)이 이순신의 죽음을 숨기고 독전했다는 기록도 있다.(자해필담)

이로써 노량해전은 이순신과 진린이 일본군의 머리 9백급을 베고, 일본선 2백 여척을 분멸하는 전공을 세움으로서 조명연합군의 대승으로 끝이 났다.(난중잡록, 백호전서) 그후 시마즈 요시히로는 남은 병력 50척으로 도망가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이 한창일 때 몰래 예교에서 배를 띄워 묘도 부근으로 나가 남해의 평산보(平山保)를 거쳐 대마도로 건너 갔다. 남해에 남아 있던 왜적들도 남해 미조항으로 나가고 요시토시(義智)도 수습하여 함께 갔다. 그때 명나라 제독 유정은 화염에 휩싸인 왜교로 달려 나갔으나 왜교성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난중잡록, 섬호집)

*참고문헌 :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여해, 노승석 역주)
              <임란시기 최대의 국제전 순천 왜교성전투와 노량해전> 논문

태그:#노승석, #이순신전사, #노량해전, #난중일기, #왜교성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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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학자. 문화재전적 전문가. 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자문위원(난중일기). 현재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 문화재청 현충사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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