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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안재성, 이동순, 손호철, 황광우, 박동기, 노성태
 왼쪽부터 안재성, 이동순, 손호철, 황광우, 박동기, 노성태
ⓒ 황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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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7일은 조선공산당 창당 99주년을 맞이하는 날이었다. 이날 광주에서는 원경 스님의 일대기 <한 스님>의 출간에 즈음해 작가 손호철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의 자리가 마련됐다. 주최하는 단체도, 주관하는 단체도 없었지만, 대화의 마당에 80여 명을 웃도는 시민들이 모여 원경 스님과 스님의 아버지 박헌영 선생을 회고했다.

정찬경 성악가가 저음의 바리톤으로 '부용산'을 부르면서 이날의 향연은 시작됐다. 노래 '부용산'은 지리산 빨치산들이 가장 즐겨 불렀던 노래다. 잊힌 이 노래를 원경 스님이 살아 생전 자주 부르면서 오늘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손호철 작가는 '눈물 젖은 두만강'과 '황성옛터'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었다. 1928년 감옥에서 나온 박헌영은 두만강을 건너 소련으로 탈출했는데, 이때의 풍경을 소재로 해 '눈물 젖은 두만강'이 작곡됐다는 것이다. 가사에 나오는 '그리운 내 님'이 박헌영 선생이었다니... '황성옛터'라는 가요도 일제 치하에서 떠돌던 지하운동가들의 비애를 담은 노래라는 것이다. 박방원씨가 '황성옛터'를 구슬프게 불러줬다. 역사와 음악이 결합한 문화의 새 공간이 연출되고 있었다.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유명한 가수 김정구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유명한 가수 김정구
ⓒ KBS유튜브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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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 나라에 사상의 자유가 있는가

애시당초 이 자리는 조선공산당 창당 99주년을 기리고자 기획됐다. 조선공산당의 이름이 너무 무거운 이름이었을까? 박헌영 선생은 아직도 금기의 인물인가? 행사를 주관할 단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박정희가 유포한 유령은, 반공주의는 아직도 우리의 의식을 깊게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과 박헌영 선생을 기념하는 이가 대한민국에서 1000명도 안 된다면 과연 이 나라는 온전한 민주주의의 나라일까? 과연 이 나라에 사상의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조선공산당이 어떤 조직이었던가. 역사의 백척간두에 서서 일제와 온몸으로 싸운 독립투사들의 결집체였다. 이분들이 없었다면 1930년 이후의 역사는 친일의 행적밖에 없는 부끄러운 역사가 될 뻔했다. 이재유·이현상·이관술 등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일제에 항거한 이분들이 있었기에 조선인은 민족의 자존을 지킬 수 있었다.

조선공산당은 상해 임정과 함께 독립투쟁을 떠받친 두 개의 기둥이었다. 안창호·이승만 등 독립투쟁의 원로들이 상해 임정을 이끌던 당시, 젊은 독립투사들은 상해 임정이 혁명운동의 사령탑이 되길 바랐다. 상해 임정을 혁명조직으로 개조하는 시도가 물거품이 되면서 젊은이들은 조선공산당으로 몰려들었다.

1925년 4월 17일, 서울의 아서원에서 깃발을 올렸다. 젊고 씩씩한 독립운동가들은, 외교나 청원이 아닌, 혁명적 투쟁으로 일제를 몰아내자고 정당을 창당했다. 그 이름이 조선공산당이었다. 조선공산당은 함께 혁명운동을 수행하는 형제 조직으로 '고려공산청년회'를 두고 있었다. 박헌영은 고려공산청년회의 1차 지도부를 대표했다.
 
"1926년의 6.10운동과 1929년의 광주학생사건, 원산총파업은 모두 조선공산당이 지도해 일으킨 독립투쟁이었습니다." - <정판사조작사건>, 560쪽, 이관술의 최후 진술에서
 
이관술은 불굴의 정신으로 투쟁한 독립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1946년 5월, 미군정은 있지도 않은 화폐 위조 사건을 조작해 이관술을 체포했고, 조선공산당의 목을 조였다. 영문도 모른 채 구속된 이관술은 법정에 나와 위와 같이 증언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 대시위의 앞장을 선 이기홍 선생도 같은 맥락의 증언을 남겨놓았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강화됨에 따라 우리의 항일운동도 지하로 들어가면서 전국적인 체제를 갖추고 조직적으로 강화됐다. 1925~1926년경에는 전국적인 지도조직이 결성돼 노동자·농민·청년·학생 등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원산 총파업, 인천과 부산 노동자의 총파업이 그 예다. 1928~1929년경에는 전국지하조직의 전남지부가 조직돼 각 분야의 항일운동을 지도했다." -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학생독립운동이었다>
 
이기홍 선생이 언급한 '전국적인 지도조직'은 바로 조선공산당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조선공산당 전남지부가 결성된 것은 1928~1929년경이었고, 조공 전남지부의 지도 아래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고 회고한 것이다.

1928년 조선공산당 4차 지도부가 들어섰다. 이때 3차 지도부에서 전남 도책을 맡던 김재명이 4차 지도부의 중앙으로 올라갔고, 4차 지도부의 전남 도책을 장석천이 맡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으로 확산한 이가 장석천인데, 그는 조선공산당 전남의 도책임자였다. 장석천의 지도를 받으며 청년부의 책임을 맡은 이가 다름 아닌 장재성이다. 김재명-장석천-장재성으로 이어지는 계보는 조선공산당의 중앙과 전남, 그리고 청년부로 이어지는 지도선이었다.
 
"소화 4년(1929년) 4월 2일경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투숙하고 있는 한성여관에서 차재정과 회합하고,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가 거의 검거되었으므로 전라남도를 책임지어 달라'고 하는 말을 듣고, 나는 전남 책임자로 됐다. 광주로 돌아와서 5월 말경 광주청년회관 안에서 나승규를 만나고, 조선공산당을 수습, 재조직하자고 권유했다. 5월 20일경에 장재성이 학생부의 책임을 지기로 조직했다." - 신문 조서 약술
 
우리는 장석천과 장재성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제2의 3.1운동'으로 평가되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알고 보니 조선공산당의 지도하에 전개된 투쟁이었다면,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조선공산당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박헌영 선생의 신원을 염원하며

1942년 박헌영은 광주에 왔다. 그는 왜 광주에 왔을까? 지금까지 작성된 박헌영 자료들은 한결같이 검거망을 피해 박헌영이 은신하려 광주에 왔다고 기술했다. 그런데 혁명가에게 투쟁의 중단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하루도 혁명을 생각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그는 혁명가가 아니다. 과연 박헌영은 은신하기 위해 광주에 온 것이었을까?

광주에 온 박헌영은 벽돌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다고 한다. 하루의 고단한 작업을 끝낸 후 과연 박헌영은 무엇을 했을까? 누군가를 만나 혁명운동을 추진했을 것이다. 이관술의 여동생 이순금이 광주의 박헌영과 연락을 했다고 한다. 박헌영은 광주에서 활약하는 젊은 독립운동가들을 비밀리 접촉했을 것이다. 원경 스님이 만든 <만화 박헌영>은 당시 광주지역에서 윤도형, 고항, 조주순 등이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었고(6권 280쪽), 박헌영은 이들을 만났다고 기술했다(6권 342쪽).

당시 광주에는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개업한 의사가 있었다. 김범수 의사다. 김범수의 손녀 김행자씨의 회고에 의하면, 김범수는 해방 전 광주에서 활약하고 있던 박헌영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비밀 조직원 조주순이 김범수의 사위였으니, 김범수가 딸에게 주는 생활지원금이 누구에게로 갔을지 쉽게 짐작이 간다.

<만화 박헌영>에서 "공장주 이득윤은 자기의 감정이나 의사를 드러내지 않는 고상한 품격의 박헌영의 정체가 자못 궁금해 여러모로 그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으나 끝내 알지 못했다."(6권 339쪽)고 기술했다. 하지만, 벽돌공장 사장 이득윤의 의식적인 보호가 없었다면 박헌영의 공장 생활은 몇 달을 지속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득윤은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 동맹의 동맹원이었다. 그의 보호가 없었다면 혁명운동의 지도자가 공장에서 은신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황광우 작가님, 제 시아버지가 박헌영 선생과 함께 벽돌공장에서 작업했대요. 눈빛이 총명한 분, 젊잖은 분으로 박헌영 선생을 기억하셨어요."
 

이날 '작가와 대화'의 자리에 온 한 광주 시민의 전언이다. 박헌영의 발자취는 이렇게 광주 시민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김범수의 사위 조주순은 박현채의 집에서 박헌영을 만났다고 한다. 박현채가 누군가? 1970년대 민주화운동을 이끈 분이자 <민족경제론> 저자다. <박현채 평전>에 의하면 삼촌 조주순은 화순에 있던 박현채의 집에서 박헌영과 만났다(29쪽). 박현채는 삼촌들의 틈 사이에서 시국담을 들으면서 '소년 투사'로 성장했다(31쪽). 그러니까 박헌영-조주순-박현채 이런 인연의 실을 타고 한국의 사회주의운동은 이어온 것이다.

이날 전남대 의대에 다니는 대학생 다섯 명이 '역사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방문했다. 갓 고교를 졸업한 순진무구한 새내기 대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물었다. "그러면 박헌영 선생에게 영향을 준 사회주의자가 또 있었나요?" 나는 답해 주었다. "그분이 여운형 선생이야. 박헌영과 주세죽은 여운형 선생을 주례로 모시고 혼례를 올리거든..."

'작가와 대화'의 자리는 기념사진으로 마감됐다. 기억은 사라져도 사진은 남는다. 우리는 박헌영 선생의 신원을 염원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한 스님> 작가 손호철과 대화
 <한 스님> 작가 손호철과 대화
ⓒ 황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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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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