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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무역위원회의 산업피해 판정

경제가 나빠지면 미국은 공격적인 무역정책에 의존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공정무역(fair trade)란 말은 사실상 80년대 말 미국이 공격적 무역정책을 취하면서 자유무역(free trade)대신 내세운 말입니다(물론 요즘은 공정하고 자유로운 무역이라는 표현을 씁니다만). 그것이 미국의 힘이죠.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말씀 드리겠지만 1980년대 미국의 무역적자가 급증했을 때 생겨난 이 정책기조는 상품이 국경을 넘을 때(관세나 수출보조금 등)뿐 아니라 생산과정 또는 조건 자체도 문제로 삼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정부의 산업정책이나 노동조건, 그리고 환경기준도 앞으로 무역분쟁의 대상이 된다는 얘깁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것은 철강부문입니다. 지난 6월 부시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6명의 무역위원회 패널이 조사를 시작했는데 오늘(23일) '산업피해판정'이 내려졌습니다. 패널은 33개 철강회사 중 12개가 값싼 수입품 때문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이 12개 회사는 미국 철강의 79%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레오 제러드 미 철강노동자 대표는 "긴 여정의 첫 대승"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들이 주장해온 대로 미국 철강산업의 위기가 내부의 어떤 문제 때문이 아니라 정부보조금과 불공정 무역관행에 힘입은 수입품 때문이라는 판정이 내려졌으니 '커다란 승리'라고 표현할 만한 거죠.

앞으로 위원회는 11월에 이해당사국들의 의견을 들은 뒤 12월19일 행정부에 나름의 조치를 권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2월19일까지 부시행정부는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 결정합니다. 대체로 수입쿼터와 관세, 또는 이 둘을 조합한 어떤 조처가 내려질 겁니다.

과연 미국 철강업계는 지금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1998년 이래 25개의 철강기업이 파산신청을 했고 제3위인 베들레헴 철강회사가 지난 주에 26번째 주인공이 됐습니다. 미국업계에 따르면 그 동안 2만5천개 이상의 일자리가 줄어들었으니 노동자들로서도 손놓고 있을 일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또 오늘은 미국 1위의 철강업체 유에스 스틸이 3분기에 1800만 달러(약 200억 원)에 이르는 순 손실을 보았다고 발표됐고 월스트리트는 유에스 스틸의 주가가 20센트에서 60센트 정도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문제는 현재의 주문 상황으로 봐서 4분기에도 더 나빠질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미 철강업계로서는 외부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고 바로 이런 상황에서 무역위원회의 산업피해 판정이 내려진 겁니다. 여기에 미국의 정치상황도 일조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부시는 2000년 대선에서 철강업체 소재지인 미시간, 뉴욕, 펜실베니아에서 패배했고 오하이오와 웨스트버지니아에서는 겨우 이겼습니다. 또 30만에 이르는 은퇴 철강노동자들은 부시의 동생이 주지사로 있는 플로리다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 모로 미국 철강업계의 이해가 강하게 반영될 수 밖에 없겠죠.

AP통신에 따르면 현재 미국은 브라질, 칠레, 러시아, 그리고 일본 등에서 철강을 수입합니다. 이 목록에 끼지는 않았지만 한국도 주요 철강 수출국 중 하나입니다.

한국 철강협회 관계자는 "미 행정부가 업계의 요구대로 97년 이전 3년의 실적을 기준으로 수입쿼터를 채택할 경우 대미 철강수출은 작년보다 100만 톤(42%)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참고로 반도체와 달리 우리 철강의 대미수출은 작년 7월 기준으로 국내 생산의 4.5%, 전체 수출량의 15% 정도입니다).

쉽게 미국 뜻대로 판정이 나지는 않을 듯

그러나 그 '긴 여정'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우선 미국 내의 반대가 만만치 않을 전망입니다. 당장 철강소비산업 연합행동의 존 젠슨회장은 "이번 결정은 미국의 철강소비산업에 잠재적인 재앙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관세가 부과되든 아니면 쿼터가 설정되든 미국의 철강 가격은 상승할 것이고 자동차에서부터 냉장고까지 비용 압력을 받게 될 겁니다.

현재 미국의 철강노동자는 7만5천 명이지만 철강을 소비하는 10만여 기업에 고용된 인원은 128만 명에 이릅니다. 과거에 반도체에 대한 덤핑 판정이 컴퓨터 업계의 반발로 무산된 사례로 볼 때 이번에도 마찬가지의 반발이 예상됩니다.

둘째로 미국 산업의 위기가 수입품 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철강협회의 주장대로 미국의 유에스스틸 게리 제철소 노동자 한 명이 840톤을 생산하고 신일철의 기미쓰 제철소는 3370톤을 생산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생산성이 네 배나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수입품 때문에 위기가 왔고 더구나 보조금이나 덤핑 때문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또한 미국 철강산업의 위기가 시작된 98년 이래 미국의 철강수입은 계속 감소하고 있었고 올 1-8월에는 30%나 감소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수입이 곧바로 위기의 원인이 됐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현재 아프간 공격에 대해 UN이 무력하듯 국제기구가 어떻게 미국의 뜻을 막을 수 있느냐는 얘기는 크게 보아 맞습니다.

그러나 WTO 자체가 미국의 경제력이 약화됐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1943년 당시 미국은 상설 국제기구(ITO)의 설치에 반대하고 그저 협정(GATT)만 체결했었습니다. 힘이 월등한 쪽에서 제도란 귀찮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WTO가 일정한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최근 WTO는 한국산 철강파이프 제품에 대한 미국의 세이프가드 조치가 WTO협정에 위배된다는 판정을 내린 바 있습니다. 더구나 이번에는 미국의 조사방법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고 새로운 기준을 설정하도록 명시하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희망을 갖게 합니다.

앞으로 경제침체의 장기화에 따라 미국의 공격적 무역정책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으로 보입니다. 경제에서도 아프간 공격 때처럼 미국 편을 들지 않으면 테러리스트를 편드는 것이라고 오만을 부릴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수입은 테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테러는 모든 사람을 공포에 몰아넣지만 수입은 적어도 단기적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한 나라만 짚어서 공격할 수도 없을테지요(물론 수퍼 301조는 나라를 대상으로 합니다만).

"이번(아프간 공습) 작전의 메시지 중 하나는 우리가 선택한 시기에 언제든지 우리가 원하는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라는 리처드 마이어스 합참의장의 말이 떠오르는데요. 이런 식의 전략을 경제에서도 구사하려 든다면 아마 미국은 외로운 강자가 되고 말 겁니다.

제발 우리의 정치권과 언론이 여태 그런 것처럼 '미국이 하는 건 대충 다 옳은 것'이라는 식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만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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