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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닮은 듯 하면서도 다른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 농업을 대하는 두 사람의 자세는 확연히 다르다. 사진은 2005년 6월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장면.
ⓒ 연합뉴스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과 미국의 부시 대통령. 이 두 사람은 '진보'와 '보수'라는 다른 정치적 노선을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표방하며 대통령 지위에 올랐다.

하지만 이 두 대통령은 여러 면에서 놀랄만큼 유사한 면을 보여주었다. 두 대통령 모두 (사실이야 어떻든) '서민' 이미지를 강조하며 대중들의 지지를 얻었고, '바보(idiot)'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잦은 말실수로 구설수에 올랐다.

한 때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누리다가 임기 중반 이후 최저의 지지율을 기록하는 인기없는 대통령으로 전락한 것도 유사하다. 이로 인해 두 대통령 모두 정책을 추진하는 데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4월 2일 보도에서 부시와 노무현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로 인해 양국 모두에서 한미FTA 비준이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공통점은 두 사람의 업무수행 방식일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은 모두 '독선적 국정운영'으로 비판받고 있다. 이러한 정치 스타일로 인해 한국과 미국 모두에서 '민주주의의 실종'을 우려하는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높다(반대여론에 귀기울이지 않는 대통령의 태도를 '뚝심'이나 '결단'으로 평가하는 보수언론이 있다는 점과 그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도 유사하다).

닮은 꼴의 두 대통령, 전혀 다른 농업관

이처럼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은 여러 면에서 '닮은 꼴'이지만, 두 사람은 전혀 상반된 모습도 가지고 있다. 바로 농업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리고 이 차이는 한미FTA가 타결되던 날, 가장 극적으로 드러났다.

청와대 홈페이지는 한미FTA 타결소식으로 도배되어 있다. 반면에 백악관 홈페이지에는 협상 타결에 관해 단 하나의 글이 올라와 있을 뿐이다. 이는 타결 뒤 부시 대통령의 유일한 FTA 관련 발언이기도 하다. 전문을 인용한다.

"한국과 자유무역협정을 타결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미-한 자유무역협정은 미국의 농업·목축업·제조업, 그리고 서비스업 종사자 여러분들께 더 나은 수출의 기회를 마련해줄 것입니다. 더불어 미국의 경제성장과 국내에 더 나은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고, 미국 소비자들에게 더 싸고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줄 것입니다. 이 협정은 미국과 한국의 협력적 유대를 강화할 것입니다. 이 두 나라의 유대는 아시아의 안정과 번영에 큰 힘이 되어왔습니다.

무역법(Trade Act)에 의거, 저는 협정서명 최소 90일 전까지 의회에 통지하게 됩니다. 미 행정부는 의회와의 협력하에 협정 비준을 위한 적절한 법적절차를 밟게 될 것입니다.

조지 부시 드림."


미국정부와 협상단이 농산물 수출 기회 확장을 한미 FTA의 핵심 의제로 삼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협정 타결 후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제조업자와 서비스업자에 앞서 농민들과 목축농가에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물론,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 역시 협정타결 직후 대국민담화에서 농민들을 언급하기는 했다.

"FTA로 인해 양극화가 더 심화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농업과 제약 분야가 어려워진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일이고, 이미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으므로 별도로 얘기할 일입니다."

'만반의 대비' 했다면서, 타결 뒤에 피해 추산

ⓒ 강인규
노무현 대통령은 협상 타결 직후인 3일 정부부처의 장관들과 농어민 피해 대책을 논의한 바 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개방으로 어민들의 큰 피해가 예상된다는 해양수산부장관의 보고에 명태와 민어 조업 어민들의 수가 얼마나 되며, 그중 한국인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700명"이라고 대답하자, "700명의 어민이 피해를 보는 것을 두고 어떻게 엄청나다는 보고를 할 수 있느냐"고 격노했다고 한다. "피해만을 나열하지 말고 제대로 된 경쟁력 강화대책을 내놓으라"는 것이 대통령의 요구사항이었다.

"이미 만반의 대비를 했다"는 정부가 타결 뒤에야 부랴부랴 장관들을 모아 예상되는 피해를 추산하는 것도 기이하지만, "피해만 나열하지 말고 제대로 된 경쟁력 강화대책을 내놓으라"고 나무랐다는 것은 더 납득하기 어렵다. 피해추산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타결 이전에 "만반의 대비"를 할 수 있었으며, 이미 만반의 준비가 끝났음에도 "제대로 된 대책"을 장관들에게 요구했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700명의 어민이 피해를 보는 것을 두고 어떻게 엄청나다는 보고를 할 수 있느냐"는 대통령의 발언이다. 이는 "경쟁력 없는 농업은 '시장 원리'에 따라 도태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현 정부의 위험한 농업관과 철학부재를 드러낸다.

농축수산물 개방으로 피해를 입을 농어민의 수는 700명 정도가 아니지만, 그 정도의 피해는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는 대통령의 인식은 심각하다. 한국의 국회의원과 장관의 수를 모두 합해도 해양수산부 장관이 밝힌 명태 조업어민의 1/3밖에 되지 않는다. 만일 이들이 모두 도산할 위기라도 정치권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일까?

한국정부는 농업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밖에 되지 않으며,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6.4%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누누히 강조해 왔다. 그렇다면 '고작 6.4%밖에 안 되는' 농민은 시장논리에 따라 도태되어도 좋은 것일까?

노무현 대통령은 3월 20일 "농산품도 상품으로서 경쟁력이 없다면 앞으로 농사를 더 못 짓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더 나아가 "전통적으로 향수가 깃든 감상적 농업을 포함해서 우리 농업은 다 유지할 수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관세를 낮추기 위해 자국의 농민을 희생시킨 한국정부와 달리, 미국정부는 자국의 농민을 위해 관세를 희생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무엇 때문일까? 미국의 농업비중이 한국보다 크기 때문일까?

700명 어부 버리는 노무현의 '뚝심'

▲ 도시 속에서 농부들과 신선한 농산물을 만날 수 있는 '농부시장(Farmers' Market)'. 주정부나 시의 후원 속에서 매주 열린다. 사진은 위스콘신주 매디슨시의 농부시장으로, 매주 토요일 주정부 청사 앞 도로를 차단하고 그곳에서 농부들이 노점을 운영할 수 있게 해 준다.
ⓒ 강인규
미국이 대량으로 농축산물을 수출하고 있고, 의회에 강력한 발언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흔히들 농업이 미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농업이 미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한국의 1/3도 안 되는 0.9%에 지나지 않는다. 농업종사인구는 더 낮아서, 농업·임업·수산업 종사자를 모두 더해도 0.7%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의 1/10 수준이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6.4%도 아닌) '0.7%밖에 안 되는' 농·임·수산업 종사자들을 위한 정책에 힘을 쏟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농업 관련 종사자들의 이익을 충실히 대변하는 정치인들 때문이다. 만일 이들이 농업종사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그들의 표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농업종사자들의 조직화된 소통구조와 로비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농림부 관리가 일방적으로 농산물 개방을 결정한 후 농민을 설득하는 일은 미국에서 상상할 수 없다.

미국이 농업을 중시하는 다른 이유는 농업이 단순히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사회적 혜택을 베푼다는 점을 잘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미 정부에서 발간한 <미국 경제 개관 Outline of the US Economy>은 미국이 (한국과 마찬가지로) 농업을 기초로 발전해 온 사실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농업을 단순한 산업분야로 다룰 수 없는 이유는 "'국민들을 먹여 살리는' 은인인 동시에, "근면·개척·자급자족이라는 사회적 미덕을 몸으로 보여주는 스승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농업을 존중하는 미국의 전통은 미국인들의 삶 속에 깊이 배어있다. 그 한 예로 미국의 거의 모든 주에는 연례 농업축제인 '스테이트 페어(State Fair)'가 있다.

대도시 외곽에 오직 이 행사를 위해 마련해 놓은 '스테이트 페어 공원'에는 매년 여름마다 농민들이 소·양·돼지·토끼·닭·오리 등을 데리고 나와서 품평회 및 전시회를 연다. 도시에서 가족단위로 방문한 수 많은 방문객들은 동물을 구경하고, 직접 양털을 깎고 젖을 짜면서 즐거워한다. 신선한 우유와 주스, 아이스크림, 그리고 갓 만든 생크림을 얹은 '크림 퍼프'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한국의 '직거래 장터'에 해당하는 '농부시장(Farmers' Market)'도 그렇다. 뉴욕·시카고·로스앤젤레스·밀워키 등의 대도시에는 어김없이 한 주에 한 두 번씩 농부시장이 열린다. 주정부 청사를 비롯한 관공사 근처에 주로 열리는 이 직거래 장터는 도시인이 농민을 직접 만나 신선한 과일과 야채를 사는 기회뿐 아니라, 그들의 사이에 대화의 다리를 놓아준다.

당선 초엔 "희망 드리겠다"더니, 임기 말엔 "농민들 염치없다"

▲ 2002년 12월 민주당 대선후보 시절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 서귀포시 거리유세에서 선물 받은 감귤을 들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부터 농업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후보시절과 당선 초기만 해도 부시 대통령 못지 않게 농민들에게 열정적으로 관심을 표명하곤 했다. 그는 당선 직후인 2002년 12월 21일,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보통사람들의 사회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말하며, "농어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드리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그는 더 나아가 농림부 장관을 임명할 때 농민들의 의사를 묻겠다고 약속한 바 있으며, 중요한 정책 결정에 앞서 농민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농정협의회'를 구성하겠다는 구체적인 공약을 제시하기도 했다.

"먼저 농림부 장관을 임명할 때 농민들이 인정하는 사람으로 할 것이며, 중요 정책 결정에 있어 농민들이 참여하는 '농정협의회'를 구성하겠습니다." (2002. 6. 4)

노무현 대통령은 늘 '원칙'과 '철학'을 강조해 왔다. 그렇다면 약속대로 농림부 장관 임명에 앞서 농민들의 의견을 경청했는가? FTA와 같이 농민들의 삶을 뒤바꿀 '중요한 정책 결정'에 있어 "농정협의회를 구성해" 그들의 입장을 듣고 반영하고 있는가? 그러나 농민에게 "새로운 희망을 드리겠다"던 대통령은 농축산물 개방에 피해를 우려하는 농민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염치도 없다. 한미FTA 하면 또 돈 내놓으라고 하고, 한중 하면 또 내놓으라고 하고,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두고 봐라, '6%'의 힘이 정치를 바꾼다

▲ 한미FTA 협상이 타결되자, 2일 제주도 농민들이 '한미FTA 졸속협상 무효! 도민 생존권 사수 투쟁선포' 기자회견을 열고 감귤을 태웠다.
ⓒ 제주의 소리
한국의 정치인들이 농민들에게 보여 온 태도는 피땀 쏟으며 대한민국을 먹여살려 온 은인에 대한 타당한 대접이 아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스스로 알아서 농민의 필요에 귀를 기울일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농업의 '비경제적 혜택'이나 '철학' 등으로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아예 생각하지도 말자. 차라리 통관중인 미국산 쇠고기에 대고 광우병 유무를 물어보는 게 낫다.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그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요구하는 것과 표로 심판하는 것 뿐이다. 농민들이 가련한 (그리고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 두려운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지 않는 한 그들은 농촌의 현실에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을 것이다. 한미FTA타결은 그동안 거짓과 오만으로 농민을 호도하고 무시해 온 정치권을 심판하고 그들에 대한 의사전달의 통로를 마련할 절호의 기회다.

우리나라의 농어민 인구는 300만명이 넘는다. 이는 지역을 대표하는 지방자치 의원이나 국회의원은 물론, 대선 결과를 좌우할 수 있는 유권자층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불과 50여만표 차이로 당선되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농촌지역에서 표를 얻은 공무원들이 FTA에 대해 보인 태도에 주목하는 것이다. 특히 농림부나 해양수산부에서 적을 둔 사람들 가운데 FTA를 지지한 인사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 정부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아무런 방비 없이 시장을 개방하면서 (정권은 바뀌어도 그들은 바뀌지 않았다) '더 이상의 개방은 없다'는 말로 농민을 우롱해 왔다. 우루과이 라운드 때도 '만반의 준비가 되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던 정부다. 그런 그들이 이번에는 "준비가 안 되었던 그 때와는 다르다"고 항변한다. 정말 염치도 없다.

농촌의 혜택을 입고 자란 정치인들이 너무나 쉽게 잊는 사실이 있다. 이는 모든 유권자들이 꼭 기억할 사실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농부의 딸이며 아들이라는 것이다.

태그:#한미FTA, #농업,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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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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