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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선을 18세기 사람들은 '책쾌' 혹은 '서쾌'라 불렀다. 집 거간꾼, 즉 오늘날 부동산 중개인에 해당하는 사람을 '집쾌'라고 불렀으니 책쾌라 불리었던 조신선은 책장수요, 책을 가지고 다니며 팔았으니 방문 판매원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한양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책을 팔았다고 한다. 붉은 수염을 휘날리면서 책의 임자를 찾아 늘 뛰어다녔다고 한다.
 
정조 때, 박제가나 정성기 등이 서책의 원활한 보급을 위하여 책을 찍어내는 곳과 책을 취급하는 사서를 설치하자는 주장을 했다. 영조 때는 한양 서소문에 이인석과 박섬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약계책방'이 있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박고서사'라는 책방이 생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활성화되지 못하고 조선시대 책의 보급은 책쾌들에게 의존했다.
 
당시의 책쾌들은 책을 싼 보따리를 들고 다니거나, 나귀에 싣고 다니며 팔았는데 조신선 만은 소맷부리와 가슴에 넣고 다니며 팔았다고 여러 사람의 글에 나타나 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그의 소맷부리와 가슴에서 나온 책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조신선의 몸에서 한 권씩 나오는 책이 방안 가득 쌓일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책이 있는 한 책을 팔러 다니겠다"

책쾌 조씨가 <합강>전질을 가지고 왔다. 헤아려 보니 <휘강(徽鋼)>이 30책, <속강(續鋼)>이 14책, <휘강발명(徽鋼發明)>이 4책으로, 합하여 48책이었다. 환약 먹기를 중지하고 그 값으로 이것을 사려 한다. 먼저 <월강(越鋼)>값을 지불했다. - 1784년 10월 10일

조선 후기 책벌레로 소문난 유만주의 <흠영(欽英)>중 어떤 날의 일기이다. 조신선이 어떤 책을 팔았는지를 알 수 있고, 먹던 환약을 중지하고서라도 책을 사보는 책벌레 선비의 책 욕심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조신선이 가슴에 품고 온 책이 최소한 48권이라는 것도 나타나 있다. 하지만 유만주의 일기에 나타난 48책은 약과다.
 
조선의 역대 국왕과 신하들 간의 국사처리에 관련된 고사나 명사들의 기행, 기문을 수록한 <금계필담(錦溪筆談)>에는 조신선이 책을 파는 장면을 인상 깊게 묘사하였는데, 그는 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한 질을 몸 어딘가에 숨기고 다니면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언제든 그 자리에서 한 권씩 꺼내 놓았다고 적고 있다. 조선에서 간행된 <자치통감강목>이 80책이나 100책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보면 놀랄만한 일이다. 
 
이런 조신선은 우리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인들에게는 대단한 인기인이었다. 그리하여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당대의 내로라하는 명사 3인(정약용·조수삼·조희룡)이 각각 전기 한 권씩을 쓸 정도요, 만날 때마다 화재 주인공으로 삼을 정도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역사 인물들이 흠모했지만 우리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 대단히 재미있는 사실이다.
 
유만주가 조신선을 만난 것을 기록한 대목은 대단히 흥미 있다. 그는 일개 책장수인 조신선과의 만남을 날마다 혹은 며칠 간격으로 기록했는데 어떤 책을 가지고 왔고 어떤 책을 샀는지, 책값으로 얼마를 지불했는지 그리고 흥정 과정은 어떠했는지 등을 세세히 적고 있다. 그래서 조신선에 대해서는 물론, 책을 둘러싼 그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나 책을 두고 흥정하는 풍경을 맘껏 엿볼 수 있다.
 
책이 귀했던 시절, 우리 조상들은 어떤 경로로 책을 구해 읽었을까? 주로 어떤 책들을 읽었으며 책값은 얼마나 되었을까? 등 지금과는 전혀 다른 책문화가 궁금했는데 이 책을 통하여 그 풍경을 맘껏 만날 수 있었다. 책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 만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기대해도 좋을 법하다.
 
10명의 주인공 중 유독 조신선에 대한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다. 따지기 좋아하고 계산 잘하는 실용주의 대가인 다산 정약용마저 조신선의 이야기만 나오면 귀를 쫑긋거려 무엇이든 알고 싶어 하고, 도대체 나이가 몇인지 가늠을 못해 어리둥절해 할 만큼 말이다.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이 그를 좋아한 이유는 그가 신선일지도 모른다는 것과, 책판매와 관계된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알려지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행적 때문이 아니라, 책장수로서 누구에게든 책으로 공평했다는 것과 누가 책을 원하면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달려가 읽고 싶은 책을 최대한 빨리 읽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여러 문헌에서 만나는 책장수 조신선은 천민과 양반을 구분하지 않고,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을 가리지 않으며, 벼슬아치나 소학을 읽는 어린이나 부녀자를 가리지 않고 있다. 그러다보니 관청과 양반가, 천민촌이나 저잣거리를 동틀 무렵무터 밤까지 달리고 있다. 게다가 책을 통하여 한 집안의 흥망성쇠나 한 사람의 삶을 볼 줄 아는 경지에까지 이르고 있다.
 
또한 자신을 거친 책이면 훤히 꿰뚫고 있어서 누군가 슬며시 떠보기라도 하면 제자백가는 물론 이런 저런 책들까지 속시원히 들려주었다고 한다. 어지간한 학문의 경지에 오른 학자들까지 그 앞에서는 아는체를 하지 못할 정도였다니, 책을 팔기 위해 숨은 노력을 마다않는 최고의 출판 마케터라는 생각이 든다. 책속 나머지 주인공들도 이에 못지않다.
 
조선 최고의 열정가들
 
▲자신의 뜻을 꺾으려하자 아예 자신의 눈을 찔러버림으로써 결코 굽히지 않을 것임을 밝힌 화가 최북 ▲하기 싫은 연주를 하느니 차라리 거문고를 부숴버리고 만 김성기 ▲급료보다 장인으로서 특별한 자존심이 더 중요했던 최천약▲청나라와 왜국으로 갈 수만 있다면 노비가 되어도 좋다는 여행가 정란▲종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시인이 되고자 십 년 동안 밤을 새운 천민 시인 이단전▲바둑기사가 되려고 마음먹은 순간 오직 바둑만 두어 조선 최고의 국수가 된 보성출신 정운창.
 
벼루 조각가라는 취미를 살리면서 수학과 천문학에 20년 젊음을 바치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가 자수에도 일가견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활 만드는 기술자 김성기는 타고난 음악 '끼'를 주체하지 못하고 최고의 악사가 되어 왕실의 종친이나 선전관 등을 제자로 두는가 하면, 유박은 양반 신분으로 원예가로서 그 명성이 자자하다.
 
역사는 주목하지 않았지만 한시대의 인기인들이요, 한시대의 문화를 이끌었던 전문가들이다. 이 정도라면 근엄한 신분의 나라인 조선시대 최고의 열정가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가 거의 주목하지 않은 이들에게 우리는 왜 관심을 두어야 할까? 이들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고 얻어야 할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다른 시대를 산 사람들이지만, 이들에게서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전문가의 원형을 찾는다면 무리일까?
 
저자 안대희는 이야기꾼답게 재미있게 주인공과 그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따라서 이 책의 재미는 어떤 날카로운 교훈이나 다짐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에 조건 없이 도전하여 일생을 건 사람들 이야기와 이들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그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 사회의 풍경을 자세히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역사가 주목하지 않은 분야의 프로페셔널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의 직업을 보면 여행가, 바둑 기사, 춤꾼, 만능 조각가, 책장수, 원예가, 천민 시인, 과학기술자 등 역사 교과서는커녕 자유롭게 서술한 역사책에서도 한 줄 소개가 되어 있지 않는 분야의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는 분야에서 자기 인생을 개척한다는 것이 그 시대에는 우리가 추측하기보다 훨씬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중략)…그동안 몰라서 망각하고 있던 옛 전문가들을 통해서 역사와 문화, 인물과 사회의 새로운 원형과 상을 창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 책을 내는 글 중에서
 
[참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서점은 '회동서관'이다. 위치는 현재의 조흥은행 본점자리. 1897년에 고제홍이란 사람이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포목가게를 서적상으로 업종을 바꾸어 '고제홍서사'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그의 아들 고유상이 24세인 1907년에 사업을 이어 받아 회동서관으로 바꾸고 서적판매보다 출판업에 비중을 두었으며 문구류까지 취급하였다.
첨부파일
x9788958621744.jpg

덧붙이는 글 | <조선의 프로페셔널>(안대희 지음/휴머니스트/2007년 4월/1만 9천원)


조선의 프로페셔널 - 명인, 영혼을 불사르다

이수광 지음, 시아출판사(2012)


태그:#서평, #책동네, #휴머니스트, #안대희,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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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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