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팬들은 8개 구단을 원합니다." 17일 야구회관 앞에 모인 야구팬들은 8개 구단 운영을 강하게 주장했다.

▲ "야구팬들은 8개 구단을 원합니다." 17일 야구회관 앞에 모인 야구팬들은 8개 구단 운영을 강하게 주장했다. ⓒ 이호영

위기에 처한 프로야구를 위해 야구팬들이 거리로 나섰다.

현대 유니콘스 야구단은 지난해부터 극심한 자금난으로 존속이 위태로운 상황까지 이르렀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그간 인수자를 찾기 위해 꾸준히 애썼지만 농협·STX·KT로의 매각 무산으로 쓴 잔을 마셔야 했다.

이에 야구팬들은 더 이상 방관자의 입장에 서기를 거부했다. 울산에 사는 박정현씨(28·대학생)는 12일 네이버에 '유니콘스에게 희망의 뿔을(cafe.naver.com/again00unicorns)'이라는 이름의 카페를 개설하고 야구팬들의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한명 두명 모이기 시작한 카페는 야구팬들의 관심을 업고 불과 6일 만에 4600명을 돌파했다. 조직도 체계도 불분명했지만 야구단을 살리기 위한 열정 앞에서는 큰 제약이 되지 않았다. 박씨는 15일 서울에 올라와 기자회견에 참석했고 카페 회원들과의 간담회를 통해 구체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은 촉박했다. 18일 8개 구단 사장단들이 모이는 KBO 이사회에서 '7개 구단으로 간다더라'는 설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서명운동과 모임이었다.

 

박씨는 카페 회원들과 논의 끝에 KBO 이사회 하루 전인 17일 강남, 명동 등에서 시민들의 서명을 받기로 결정하고, 서명운동이 끝나면 오후 5시부터 도곡동 야구회관 앞에서 야구팬들의 모임을 열기로 했다. 해당 공지는 16일 밤 10시 24분에 까페 게시판에 올라왔다.

[17일 오전 11시] 강남구 도곡동 야구회관 앞 서명운동

 
이 정도면 괜찮을까? 서명운동은 현수막 걸기에서부터 시작됐다.

▲ 이 정도면 괜찮을까? 서명운동은 현수막 걸기에서부터 시작됐다. ⓒ 이호영

동장군의 기세는 매서웠다. 아침부터 살을 에는 강추위가 엄습해왔다. 서울의 출근길 온도는 영하 11℃까지 내려갔고 좀 나아졌다는 오전 11시에도 영하 7℃로 추위는 여전했다. 설상가상으로 바람까지 불어 체감온도는 영하 11.3℃까지 내려갔다.

이렇게 추위에 무방비로 나서야 할 입장이었건만 하나 둘 모인 사람들의 얼굴은 결코 어둡지 않았다. 야구팬들은 준비해온 현수막을 펼치며 분주히 서명운동을 준비했다.

현장에서 만난 카페 운영자 박정현씨는 "어제 현수막과 피켓을 준비하느라 바빴다"며 "여러 사람이 모인다고 하니 경찰과 논의도 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강남·명동에서 서명을 받아줄 분들을 모았고 KBO에서도 적극 협조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그 옆에는 임시 책임자로써 연락처를 남긴 현대 유니콘스팬 유정목(37·프리랜서)씨도 있었다. 컴퓨터 관련 개발 업무를 하고 있다는 유씨는 남양주에서 아침부터 서둘러 나섰다고.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8개 구단으로 가야한다"며 "구단들이 자선단체가 아닌 이상 각종 규제완화로 적자를 줄여야 한다"고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한편 한화 이글스를 응원한다는 조정대(29)씨는 "직장 상사분들께 양해를 구하고 나왔다, 지역색이 강한 직장의 특성상 KIA 타이거즈팬이 많은데 말씀드리니 흔쾌히 허락해 주시더라"며 야구팬으로서 책임의식을 느껴 나섰다고 말했다.

 

이어 조씨는 "많은 야구팬들이 동참해 주시길 기대한다, 서명도 서명이지만 5시에 많은 분들이 오셔서 8개 구단 팬들의 힘을 보여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17일 오후 1시] 중구 명동 CGV 앞 서명운동

 
명동 한복판에서 명동에서는 많지 않은 인원이 있었지만 열띤 서명운동이 진행됐다.

▲ 명동 한복판에서 명동에서는 많지 않은 인원이 있었지만 열띤 서명운동이 진행됐다. ⓒ 이호영

점심 시간 명동의 거리는 매우 분주했다. 그 곳도 자발적으로 참여한 야구팬들 몇 명이 서명운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연락처를 남긴 곽범수(29·자영업)씨는 두산 베어스 팬이었다. 집이 목동이어서 가장 가까운 명동을 택했다는 곽씨는 "프로야구의 위기를 가만히 볼 수 없어 나섰다"며 "프로야구에 계속 8개 구단이 참여하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이어 "현장의 반응도 좋다, 대체로 서명에 참여하겠다는 분이 많아 수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시민들의 시선은 따뜻했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는 "KT가 안 산다면서? 얼마면 돼?"하고 농담을 건네기도 했고 한 야구팬은 서명운동을 진행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음료수를 건네며 "힘내라"고 격려했다.

명동은 유독 싸늘한 바람이 많이 불어 더욱 추웠지만, 서명운동에 스스로 나선 야구팬들의 열정은 강추위를 녹이기에 충분했다.

[17일 오후 2시 30분] 강남역 6번 출구 앞 서명운동

 
사람많은 강남 강남역 6번 출구 앞에서는 많은 야구팬들이 모여 서명운동을 실시했다.

▲ 사람많은 강남 강남역 6번 출구 앞에서는 많은 야구팬들이 모여 서명운동을 실시했다. ⓒ 이호영

강남은 점심이 훨씬 지난 시각에도 불구 많은 시민들이 있었다. 접근성이 좋기 때문인지 이 곳에 나온 야구팬들은 더욱 많았다. "프로야구를 살립시다"하는 외침을 들은 시민들은 바쁜 와중에 멈춰 서명을 해줬다.


경기도 시흥에서 사는 임석(20·대학생)씨도 서명운동을 돕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공지사항에 연락처를 남겼던 임씨는 "아무래도 방학이다 보니 좀 여유가 있었다. 집에서 있는 것보다 나서서 뭔가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날씨가 매우 춥지만 '추운데 고생한다'는 격려 문자가 오고 직장에서 동료들의 서명을 받아 온 야구팬들도 있어 보람차다"고 전했다.

야구팬들은 취재를 하는 순간에도 계속 모여들고 있었다. 특히 강남은 10명이 넘는 야구팬들이 계속 모이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명운동을 도왔다. 그 가운데는 서울이 아닌 수원·인천에서 사는 야구팬들도 많았다.

임씨는 "지역을 뛰어넘어 일찍부터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셔서 감사하다"며 "외부에서 우리가 하는 일을 이상하게만 안 봤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도 이야기했다.

[17일 오후 5시] 야구회관 앞 모임의 시간

 
고사리 손도 서명에… 할머니와 같이 나선 어린이가 서명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 고사리 손도 서명에… 할머니와 같이 나선 어린이가 서명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 이호영

오후 5시, 약속했던 야구팬들의 모임 시간이 다가오자 야구회관 앞은 붐비기 시작했다. 모인 사람들 만큼이나 구성원도 다양했다. 현대를 비롯해 두산·LG·롯데 등 다양한 팀의 유니폼은 행사의 성격만큼이나 절묘하게 잘 어울렸다.

이 시각 서명운동은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5시 이후는 본격적인 서명운동보다 화합의 장에 더욱 가까웠지만 서명용지를 찾는 사람들의 손놀림은 꾸준히 이어졌다. 명동과 강남역에서 서명운동을 펼치던 야구팬들도 모여들어 현장은 더욱 활기를 띄었다.

[17일 오후 6시] 호소문 발표

"야구팬들의 염원을 외면하지 말아주세요." 박정현씨(가운데)가 야구팬 대표로 '8개 구단 유지'에 대한 호소문을 낭독하고 있다. 연예인 야구단 조마조마의 만화가 박광수(왼쪽)씨도 자리했다.

▲ "야구팬들의 염원을 외면하지 말아주세요." 박정현씨(가운데)가 야구팬 대표로 '8개 구단 유지'에 대한 호소문을 낭독하고 있다. 연예인 야구단 조마조마의 만화가 박광수(왼쪽)씨도 자리했다. ⓒ 이호영

현장은 '야구를 살리자'고 모인 8개 구단 팬들과 언론사 취재진들로 북적였다. 당초 계획과는 달리 보다 빠른 6시에 호소문 낭독이 이어지면서 분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카페 운영자 박정현씨는 "프로야구 출범 이래 지금까지 노력해온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며 운을 띄웠다. 이어 "우리는 그간 프로야구팬으로써 할 일을 다 했는지 진지한 자기 성찰을 하고 있다"며 "다가올 2008 시즌이 8개 구단으로 운영되어 보다 뜨거운 야구팬들의 환호로 그라운드가 가득차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 자리에 섰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야구팬들은 500만 관중 시대를 함께 열어갈 동반자인 KBO와 7개 구단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한 발자국 물러설 수 있는 여유를 가졌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이렇게 힘든 때 프로야구의 발전을 위해 함께 나아갈 기업이 있을 경우 진심으로 지지하겠다"고도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박씨는 "추운 날씨 속에서도 이 뜻깊은 자리를 함께 해 주신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박씨가 호소문을 모두 낭독하자 현장을 찾은 많은 야구팬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일부 야구팬들은 촛불을 켜고 프로야구의 발전을 기원하기도 했다.

한편, 현장에는 연예인 야구단 조마조마에서 활약 중인 만화가 박광수씨도 동참했고 스포츠 케이블채널 MBC-ESPN의 이순철 해설위원도 눈에 띄었다. 이 위원은 "이렇게 야구팬들이 나서주셔서 감사하다. 촛불 집회를 연다니 동참하고 싶어서 나왔다"고 전했다.

[17일 저녁 8시] 부분적 해산

현대 서포터스들의 응원가 열창 현장에 모인 야구팬들은 현대 응원가를 부르고 단합을 외치며 해산했다.

▲ 현대 서포터스들의 응원가 열창 현장에 모인 야구팬들은 현대 응원가를 부르고 단합을 외치며 해산했다. ⓒ 이호영

밤이 서서히 깊어지자 사람들은 귀가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많은 인원이 모이기는 했지만 체계는 많이 부족했다. 시선이 집중되기 보다는 따로 따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연출됐다.

이를 두고 카페 운영자 박정현씨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박씨는 "우리가 이곳에 모여서 무슨 특별한 일을 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야구팬들이 서명운동에 자발적으로 동참하고 한 곳에 모여 뜻을 같이 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며 "그 과정과 결과가 조금 세련되지 못할 수는 있지만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고도 밝혔다.

이후로도 퇴근하고 현장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은 간간히 이어졌다. 박씨와 일부 사람들은 9시까지 남아 의견을 같이한 야구팬들을 맞았다. 그리고 9시가 넘어서자 이들은 철수했고 자정이 넘도록 서명을 정리하고 다음날 계획을 세우느라 고심했다.

[18일 오전 8시] 6185명이 만들어낸 기적

 
믿을 수 없는 숫자 6185명의 야구팬들이 프로야구를 살리기 위해서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 믿을 수 없는 숫자 6185명의 야구팬들이 프로야구를 살리기 위해서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 이호영


다음날인 18일 오전 8시 20분, 야구팬들이 KBO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 서명운동을 진행했던 조정대씨가 들어왔고 바빠서 오늘에서야 오게 됐다는 김의호(33·회사원)씨도 자리했다. 카페 운영자 박정현씨는 전날 수고했던 LG팬 몇 명이 오고 나서야 현장에 도착했다. 김씨는 운영자 박씨에게 "정말 고생이 많다"고 격려의 말을 건넸다.

박씨는 "전날 받았던 서명을 정리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말했다. 이어 "어제도 2시간 밖에 못자서 정신이 없다"며 "더구나 오늘은 방송이 2개나 잡혀 있어 잘 할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한편 박씨가 가져온 서명록에는 믿을 수 없게도 무려 6185명의 이름이 있었다. 17일 5시간여 진행한 거리서명에서는 모두 1816명이 이메일은 213명, 팩스는 1483명이 참여했고, 다음 온라인 서명은 모두 2673명이 나섰다. 짧은 시간에 벌어진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야구팬들이 야구회관 로비에 자리잡는 사이 출근한 신상우 KBO 총재는 야구팬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격려하기도 했다. 야구 원로인 김양경 일구회 회장도 "젊은 후배들이 이렇게 힘을 모아줘서 고맙고, 앞으로 야구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18일 오전 10시] KBO 이사회에 서명록 전달
 
"야구팬들의 마음입니다." 신상우 KBO 총재(가운데)가 박정현씨(오른쪽)를 통해 서명록을 건네받고 있다.

▲ "야구팬들의 마음입니다." 신상우 KBO 총재(가운데)가 박정현씨(오른쪽)를 통해 서명록을 건네받고 있다. ⓒ 이호영

KBO 이사회를 찾은 박씨는 신상우 KBO 총재에게 6185명의 서명이 담긴 서명록을 전달했다. 신 총재는 서명록을 받고 "우리 야구팬들이 스스로 프로야구를 위한 마음을 담아 여기에 서명을 했다"며 "8개 구단 사장분들은 모두 박수를 보내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 8개 구단 사장들은 박수로 화답했고 박씨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추위 속에서 발로 뛰고 서로 격려하면서 있게 한 실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18일 오전 11시] 서명록 전달, 그 후

끊이지 않는 섭외전화 집회와 서명운동을 이끈 박정현씨는 서명록 전달 이후에도 방송국의 섭외전화를 받았다.

▲ 끊이지 않는 섭외전화 집회와 서명운동을 이끈 박정현씨는 서명록 전달 이후에도 방송국의 섭외전화를 받았다. ⓒ 이호영

야구팬들은 야구회관 로비에서 KBO 이사회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다 잠시 식사를 하러 이동했다.

이 자리서 박씨는 "시간이 촉박했지만 계획했던 일을 해내서 기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야구팬들이 스스로 나서서 참여했다는 점이 큰 의미가 있다. 이 일에 참여해주시고 성원해주신 모두에게 감사하다"고 전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해준 것이었을까? KBO 이사회는 '2008 시즌을 8개 구단으로 운영하겠다'는 결정을 했고 KBO에 현대 매각 전권을 위임했다. 야구팬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좋은 결과를 내는데 큰 영향을 준 것이다.

하일성 KBO 사무총장은 이사회를 마치고 "인수 기업을 다시 물색하겠다"며 이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국 야구의 위기만은 막아야 한다'며 거리로 나선 그들에게는 추위도 불가능도 없었다. 그저 한줄기 희망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희망은 이제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덧붙이는 글 | 현대 야구단에 대한 궁금증, 제보 받습니다. 
http://aprealist.tistory.com 
toberealist@nate.com

2008.01.18 18:46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현대 야구단에 대한 궁금증, 제보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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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유니콘스 프로야구 서명운동 유니콘스에게 희망의 뿔을 박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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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동작구위원장. 전 스포츠2.0 프로야구 담당기자. 잡다한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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