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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쐈다. 갈대밭 사이 농로를 벗어나 앞질러가던 차에서 어느새 총구가 쓱 나왔다. 처음엔 웬 지팡인가 싶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쌀쌀한 지난 21일, 큰고니들은 저 멀리 겨울 호수 가장자리에서 마치 작은 눈덩이처럼 날개에 머리를 묻은 채 잠자고 있었다.

 

'저렇게 빨리 달리면 새들이 놀랄 텐데….' 총구를 내민 차량은 더욱 속력을 냈다. 노랑부리저어새 세 마리가 날아올랐다. 싸늘한 검정색 총구가 인공습지 수면을 향해 수평으로 조준됐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앞 차에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속도를 줄이더니 순간 타당! 소리와 함께 불꽃이 일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호수에 있던 새들이 연기처럼 솟구쳐 날았고, 차에 있던 이들은 연달아 타당! 타당! 총을 쐈다.


앞차 운전수는 우리 차를 봤는지 다시 속력을 냈다. 그런데도 총구는 여전히 팽팽한 상태로 호수를, 아니 호수의 철새들을 겨누고 있었다. 고흥호 둑을 두 대의 차량이 질주했다. 차 소리에 놀란 새들이 정신없이 흩어졌다.

 

눈앞에서 사람들이 총에 맞고 쓰러졌던 기억이 났다. 언제더라? 아 5·18! 갑자기 한기가 들고 목이 말랐다. 앞차는 서행하더니 우측으로 차를 붙였다. 그러나 여전히 총구는 밖으로 나와 있었다. 우리가 바짝 차를 세우자 그들은 유턴해 처음 왔던 농로 쪽으로 쏜살같이 도망쳤다.

 

고흥호 수놓던 수천마리 새들은 어디로...


우리는 20분 전에 고흥호에 도착했다. 이틀째 내린 비로 질퍽이는 농로를 지날 때만 해도  기대에 부풀었다. 한 달 전, 아니 10일 전만 해도 수천마리 희고 검은 새들이 고흥호를 수놓았다. 그러나 이날 고흥호는 텅 비었다. 쇠백로 노랑부리저어새 큰고니들은 하얀색이라 한눈에 들어오는데 호수는 온통 흐린 물빛뿐이었다. 호수 안쪽에 검정물체들이 떠있었다. 물닭인 줄 알고 자세히 보니 여기저기에 설치된 어망들이었다.

 

그 많던 새들은 어디로 갔나? 호수를 따라 느리게 차를 몰았다. 여전히 불법 어구들이 물속에 잠겨 있었다. 가까운 앞쪽에서 노랑부리저어새 세 마리가 주걱모양의 부리를 물 속에 박고 좌우로 저으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이 새는 무릎이 잠길 정도의 깊이에서 작은 물고기와 수서곤충을 잡아먹는다. 10일 전만 해도 호수 가장자리는 그나마 수심이 낮아 이 친구들은 좀 더 안쪽에서 먹이활동을 했다. 그러나 이날은 수심이 더 깊어져 이 친구들의 활동공간이 둑과 맞닿은 비좁은 곳으로 축소됐다.

 

더 가까이 다가가자 노랑부리저어새는 머리를 들고 경계했으나 날아가진 않았다. 이 좁은 영역마저 버리고 떠나면 더 이상 먹이를 찾을 길이 없다. 수시로 들락거린 차량 때문에 좀처럼 뚝 가까이에서 놀지 않는데, 이 새들은 지쳐 있었다. 차가 지날 때마다 오늘도 아마 수십 번은 날아갔다 다시 왔을 것이다. 
 
그곳을 한참 지나도 그 많던 청둥오리나 검은머리흰죽지, 물닭들도 안 보였다. 다행히 호수 끝 가장자리에 큰고니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뚝 가까이에는 다시 노랑부리저어새 10여 마리가 있었다. 이 친구들 역시 차가 지나가도 날아가지 않았다. 큰고니들 무리 빼고는 호수 한 바퀴를 다 돌도록 새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철새들의 '낙원'이라 불리던 고흥호... 그 고흥호 맞나?

 

오후에 경남 거제도에서 '초록빛깔사람들' 주관으로 학생들이 조류탐사를 오기로 했다. 또 모 방송국에서 오기로 했다. 올 겨울에만도 경상도 지역의 학생들이 고흥호의 철새를 보러 벌써 세 번째 오는 것이다. 오늘은 비까지 내리는데 왕복 6시간 차를 타고 학생들이 온다. 그런데 새들이 거의 없어졌다.


우리는 허탈한 심정으로 다시 고흥호를 돌기로 했다. 그러다가 사냥꾼들이 마구잡이로 총을 쏴대는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사냥꾼들의 총질은 오늘만이 아닐 것이다. 분노와 무력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고흥호는 철새들의 낙원이었다. 깨끗한 물과 따뜻한 기온, 거기에다 각종 어패류 갈대 등 풍부한 먹이가 있었다. 또한 새들이 활동하기에 적당한 정도의 낮은 수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 높이가 낮아 호수 가장자리에는 넓은 뻘밭과 갈대밭이 드러났고 호수 중앙 여러 곳에 모래섬이 있었다.

 


고흥호는 천연기념물 등 법적으로 보호하는 새만도 15여종이나 된다. 특히 멸종위기종 1급으로 분류된 노랑부리저어새의 최대도래지다. 2007년 1월 노랑부리저어새 130여마리가 고흥호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러나 지난 12월 고흥호를 찾은 노랑부리저어새는 70여마리로 줄었다. 수심이 높아 새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든 까닭이다. 작년 겨울에는 5마리의 재두루미가 찾아왔는데  올 겨울에는 2마리만 왔다. 큰고니 역시 300마리에서 150마리로 줄었다.

 

하지만 지난 21일, 다시 찾았을 때 노랑부리저어새는 14~15마리 뿐이었고, 2마리 있었던 재두루미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나머지 수천마리 새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것은 수심이 높아진 탓만은 아니다. 물닭  등 그 많던 잠수성 조류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진즉부터 여러 번 고흥군청에, 고흥호의 시급한 철새보호조치를 요청했다. 그러나 고흥군은 그때마다 변명하더니 결국 악의적으로 철새들을 쏴 죽이고 쫓아내는 만행을 방치한 것이다. 


고흥군은 올해 고흥지역을 사냥허가지역으로 지정했다. 덕분에 주민들은 가까운 들과 산에서 곧잘 총소리를 들어야 했다. 사냥꾼들에게는 드넓은 들판보다는 수천마리 철새들이 모여 사는 고흥호가 '황금어장'이었을 터이다.

 

함평군은 먹황새 한 마리 위해 매년 물을 빼건만...

 

며칠 전에도 우리는 고흥호만이라도 사냥금지구역으로 지정할 것과 낚시나 불법어업을 단속할 것을 요청했다. 또 철새보호를 위해 올 겨울철만이라도 고흥호 수위를 낮춰줄 것을 간청했다.

 

이와 관련 고흥군은 "고흥만은 현재 간척개발사업이 진행중으로 공사중인 지역에 수렵 금지지역 지정은 할 수 없다"며 "우리 군에서 수렵허가를 받은 330명에겐 고흥만 주위에서 수렵을 금지하도록 공문을 발송했다"고 밝혔다. 이어 "민간 야생동물 보호위원(4명)이 고흥호 주변 불법 수렵행위를 단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낚시나 불법어업 관련 "현재 불법 설치된 각망 24통에 대해 지난 14일자로 자진 철거하도록 계도 중에 있으며 앞으로도 홍보 및 단속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고흥군은 "인공습지의 선량한 관리"라는 이유로 수위조절을 거절했다. 겨울철 농업용수로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철새가 살 수 없을 정도로 수위를 높여 관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고흥군의 설명은 "댐의 침식을 예방하기 위해 장기간 일정 수위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근 지자체만 봐도 고흥군의 원칙은 궁색하기 그지없다. 함평군은 2002년부터 대동댐에 도래하는 먹황새(천연기념물 제200호) 한 마리를 보호하기 위해 겨울철에는 매년 물을 빼서 먹이공간을 제공해 주고 있다. 덕분에 먹황새가 유유히 상공을 비행하는 모습을 보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철새들,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흥호의 높아진 수위는 노랑부리저어새의 서식공간을 좁히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예년에는 호수 가장자리 개펄이 드러나 있어, 보트를 이용한 낚시행위나 불법어망 설치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는 수위가 높아지면서 불법어구가 곳곳에 설치돼 새들을 함정에 빠뜨렸다. 또한 이들의 차량이 밤낮으로 드나들며 새들을 위협했다. 거기에다 사냥허가지역으로 지정까지 했으니 철새들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지금 여러 지자체가 생태환경을 보전해 관광자원화 하고 있다. 그러나 철새도래지를 관광화 하는 곳은 몇 군데 없다. 철새가 오는 것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따뜻하고 깨끗한 자연환경을 알고 일부러 찾아와 준 철새의 행운을 이렇게 걷어차 버리는 지자체가 또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고흥생태문화모임( http://cafe.daum.net/jireongi )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고흥호, #철새탐조, #노랑부리저어새, #천연기념물, #고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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