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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를 앞두고 준비 중인 춤판이 하나 있다. 춤의 소재는 위안부 할머니. 일제에 유린당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역사를 몸짓을 통해 표현하겠다고 춤꾼들이 나선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역사는 두 말 하면 잔소리일 만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자존심이다. 어린 나이로 일제에 끌려가 이역만리 타향에서 모진 고초와 치욕을 겪었던 할머니들의 역사는 지나간 과거사의 일로 단순히 치부될 수 없는 민족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꽃은 피어 웃고 있고>는 바로 이들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창작 춤판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춤의 대상으로 삼은 데는 그분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달래주려는 의도와 함께 가슴 아픈 역사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연극이나 영화 등과는 달리 춤으로만 표현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역사는 유장함과 비장함이 섞이며, 고통의 역사를 더 강렬하게 전달해 준다. 매주 수요일 어김없이 일본대사관 앞에 모여 항의하는 그분들의 모습이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될 우리네 슬픈 역사의 한 단면으로 다가온다.

 

지난 5일과 9일 두 차례에 걸쳐 연습장을 찾아 공연 현장을 지켜봤다.

 

소리와 극으로 결합된 춤, 위안부 할머니를 이야기 하다

 

"그냥 춤이 아니야. 살풀이 하면서 그 느낌이 나와야 되잖아. 그 부분에선 내면의 연기가 나와야지."

 

춤꾼들의 연습 열기가 뜨거운 대학로의 한 연습장. 두 대의 에어컨은 무용지물인 듯 열기를 식히지 못했다. 땀에 흠뻑 젖은 사람들은 잠시 한숨을 돌리다 다시 마루 위를 정신없이 휘저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공연에 출연자들이나 스태프들 모두 마음이 바빠 보였다. 그 사이 총연출 김진환 선생의 지적이 이어진다. 단순한 춤이 아닌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이 춤사위에 배어나오도록 해 보라는 이야기였다. 

 

 

태평양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전쟁을 합리화하고 조선인들의 수탈을 정당화하는 일본군. 어린 시절 천진난만하게 뛰놀던 소녀들을 덮쳐오는 군국주의의 마수. 극도의 공포와 학대 속에 일본군에게 유린당한 채 이역만리 전쟁터에서 생을 마감하는 여인들. 그들의 영혼을 달래는 살풀이. 혼례를 치르지 못한 마음을 위로해 주는 의식 등등.

 

모든 것이 춤으로만 표현되는 <꽃은 피어 웃고 있고>에는 일제 강점기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과 그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려는 상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리랑의 선율에 맞춰 형상화 시킨 내용들은 비장함마저 안겨준다.

 

사물놀이와 영상, 짧은 대사 등이 곁들여진 탓에 <꽃은 피어 웃고 있고>는 단순한 춤이 아닌 춤극이라고도 불린다. 우리 민족의 춤을 소리와 극으로 결합시켰다는 의미다.

 

이 작품은 2004년 국립극장에서 초연됐다. 지금껏 5차례 공연을 올렸고, 지난해에도 8.15를 앞두고 공연을 펼쳤다. 올해는 3.1절에 나눔의 집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모시고 공연이 이뤄졌으며, 이번 8.15 공연이 두 번째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각색된 덕에 내용이 많이 보강됐다고 한다. 초연 때와 비교해 전혀 다른 작품이 됐다는 것. 조명을 돕고 있는 상명대 이성호 교수는 "분량이 늘어났고 내용이 추가되면서 이야기 구조가 강해졌다"고 말하고 이제는 "제목을 바꿔도 될 만큼 작품이 새로워졌다"고 덧붙였다.   

 

"당신 좌익이야? 빨간색 좋아해?"

 

 

역사가 춤으로 만들어진 데는 춤꾼들의 특별한 노력이 배어있다. '김진환한국춤예술원' 예술감독 김진환 선생과 상임 안무가 임응희 선생 부부가 그들이다. 우리의 정서가 깊게 담긴 한국춤을 통해 역사를 재인식하고, 민족의 뿌리 의식을 되살릴 수 있기를 바라는 춤꾼들의 의지가 춤으로 나타난 것이다.   

 

작품의 총연출을 맡고 있는 김진환 선생은 특별하면서도 특이한 춤꾼이다. 199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0호 학연화대무 이수자로 선정되었으며, 국립국악원 파견강사로 러시아, 카자흐스탄, 호주 시드니, 일본 고베 등에서 재외동포를 위한 강습을 지도하기도 한 실력있는 안무가로 꼽힌다. 

 

그는 어렵게 인식되는 춤을 최대한 쉽게 만들려고 애쓴다. 그가 공연하는 춤에는 현실인식이 담겨 있다. 반제·반봉건 민중 항쟁이었던 동학혁명을 소재로 한 국악오페라에 주연으로 나섰고, 독립운동가 시인 이육사의 생애를 춤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춤에 의식을 담아낸다고나 할까? 

 

간혹 춤이 아닌 막춤을 공연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만 그는 우리춤을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우리 고유의 정서와 이야기를 춤으로 담아내려는 노력은 춤꾼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그의 전력과도 관계가 있다. 조선대에 재학 중이던 80년 5월 광주의 소용돌이 와중에 군대에 끌려갔고, 복학이 안돼 우여곡절 끝에 다시 들어간 세종대는 그의 춤 인생에 전기를 만들었다.

 

김진환 선생은 대학시절 최고 권위가 있는 동아 콩쿠르에서 승무살풀이 부문 금상을 수상할 만큼 무용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무용천재였다. 그는 춤뿐만 아니라 풍물에도 능수능란한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다.

 

뛰어난 재능 덕분에 학내 풍물패 동아리 민속연구반의 사부가 됐지만, 그 재주는 학내 집회에서 더 요긴하게 쓰였다. 시위현장에서 빛을 발하며 학내 운동권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결합한 것이다. 결국 이 때부터 '무용과 운동권'은 무용계에 제대로 찍히고 만다. 혹자는 이를 '최대 운동권과 최대 춤꾼의 만남'이라고도 표현했지만, 그 덕분에 오랜 시간 대학원 진학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지금도 무용계는 그를 마뜩찮아 하는 반응을 보인다. "돈 되는 공연을 해 봐라." "당신 좌익이냐?" "빨간색 좋아하냐?" 등등 역사의 아픔을 다루려는 춤꾼의 태도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춤을 통해 역사의 진실을 알리려는 태도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결연해 보인다. 위안부 할머니의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요즘, 춤으로서나마 그 이야기를 계속 알려나가고 싶기 때문이다.

 

전태일 이야기도 춤으로 만들고 싶어

 

 

그의 부인 임응희 선생 역시 마찬가지.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로 작품을 구상하고 춤으로 만든 것은 사실 그의 노력이었다.

 

"처음에는 한센병이나 광주항쟁을 주제로 춤을 만들어 볼까 했어요. 그러다가 여자로서 표현력의 한계를 느껴 위안부 문제를 선택했습니다."

 

임 선생은 난해하고 어려운 춤보다는 이해하기 쉬운 춤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전태일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을 만큼 춤에 의식을 담고 싶어 한다. 그랬기에 2003년 구상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형상화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할머니들은 공연 때마다 찾아와 그의 손을 꼭 붙잡고 연신 고맙다면서 눈물지었다. 또한 작품을 지켜 본 관객들도 의미 있는 시도이며 위안부 역사를 잘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그런 분위기에 고무된 듯 임 선생은 이 공연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춤극'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계속 내용을 보충하고 새로운 장면을 넣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더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완성도 높고 작품성이 커야 한다는 것이다. 

 

"공연을 보시면서 우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이제는 가슴을 시원하게 해 드리고 싶어요. 자긍심이랄까 힘을 넣고 싶은 것이지요, 진취적 힘을 넣으면서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일부 내용을 보강했습니다."

 

특히 임 선생은 올해 일본 공연을 기획하고 있는 중이라 내용의 일부분을 수정했다고 말했다. 마지막 부분, 일본 천황이 사죄하는 장면을 일부 바꾼 것이다. 천황 대신 들어간 것은 부토춤을 형상화 시킨 인물. 부토춤은 전후 허무주의의 경향 속에 나온 일본을 대표하는 춤이다. 그것을 일본으로 상징화 시켜 엎드려 사죄하는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일본 사회가 천황을 거론하는 부분에 매우 예민하더라고요. 천황이 고개 숙이는 장면 때문에 일본 공연이 어렵다는 반응이었어요. 그래서 그 부분을 일본 공연을 위해 조정했습니다. 바꿨습니다. 어차피 일본에서 공연할 수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에도 꼭 공연할 생각입니다."

 

일본 공연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살고 있는 나눔의 집에서 더 적극적이라는 임 선생은 독도에서도 이 공연을 펼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높은 라인이 있어야 한다는데, 아직 못 만난 것인지 생각만 갖고 있다. 그는 독도 공연의 소망을 이렇게 말했다.

 

"독도에서 하면 아마 배 위에서 해야 할 것 같은데, 공연만 할 수 있게 허락 해주면 모든 것은 저희가 다 알아서 할 테니 판만 벌여 주셨으면 좋겠어요."

 

위안부 할머니의 아픈 역사 잊혀지게 할 수 없어

 

<꽃은 피어 웃고 있고>는 판을 열어주는 곳이면 어디든 갈 생각이다. 8.15일 전후로 공연을 잡지 않는 것은 장소만 열어 주는 곳이 있다면 어느 곳에서든 특별공연을 할 생각이기 때문이다.

 

지난해는 8.15 남북 공동 행사 때 공연이 잡혀 있었지만 북측이 참가하지 않으면서 대회 자체가 취소돼 무산되는 아쉬움이 있었다.

 

적어도 위안부 할머니들의 역사만큼은 잊혀지게 할 수 없다는 이들의 각오와 다짐이 이 작품을 항상 열어 놓게 만드는 것이다.

 

열정적으로 펼쳐지는 춤사위 하나하나에 할머니들의 한과 일본에 대한 분노가 깊게 스며들어 있듯이.

 

춤극 <꽃은 피어 웃고 있고>는 '반전 평화를 외치는 8.15 특별기획공연'이라는 이름으로  8월 12일~13일 저녁 7시 30분. 수지에 있는 용인 여성회관에서 공연된다.


태그:#위안부 할머니, #꽃은 피어 웃고 있고, #8.15, #춤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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