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장에서 만난 희수와 병운의 모습

경마장에서 만난 희수와 병운의 모습 ⓒ 영화사 봄


제법 추운 겨울의 토요일, 눈화장이 도드라지는 여자 한 명이 경마장을 들어선다. 그녀의 이름은 희수(전도연 분)다. 1년 전에 헤어진 남자친구를 찾아나선 것이다. 이유는 떼인 돈 350만원을 받기 위해서다. 희수는 서른을 훌쩍 넘겼다. 애인도 없다. 직장도 없다. 통장 잔고도 바닥이다. 완전 노처녀 백조이다.

경마장의 로비에서 한 남자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병운(하정우 분)이다. 병운은 1년 사이 결혼을 했었고 두 달 만에 이혼했다. 이런저런 사업을 벌였다가 실패했고 빚까지 졌다. 이젠 전세금까지 빼서 여행가방을 들고 다니는 떠돌이 신세다.

<멋진 하루>는  떼인 돈을 받고자 하는 희수와 그 돈을 구하고자 하는 병운의 하루를 보여준다. 1년 전엔 애인 사이였던 그들이 오늘은 채권자와 채무자가 되어서 길지 않은 하루를 함께 보낸다. 다시 만난 그들에게는 '불편한 하루'만이 허락된 것이다.

불경기 서울의 단면들을 보여주는 영상들

희수는 생활고에 찌든 것처럼 보인다. 화장은 '전투적으로' 한 것이 도드라지고, 말투마다 신경질과 예민함이 보인다. 이미 파산한 병운은 되려 여유로와 보인다. 말도 행동도 다 천연덕스럽고 더이상 잃을 게 없는 자의 느긋함마저 보인다.

희수와 병운은 하루짜리 '동행'을 하면서 병운과 관계된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 중소기업 여사장, 술집 나가는 여자, 구청 단속반 여직원, 싱글맘 등. 모두 희수에게 갚기 위한 돈을 빌리기 위해서다.

이들을 만나는 에피소드들에는 불경기 서울의 단면들이 어렴풋하게 등장한다. 중소기업 여사장은 돈을 빌려주면서 요즘 기업들의 어려움을 암시한다. 술집에 나가는 병운의 '엑스동생'은 불황 속의 호황인 유흥산업 종사자의 상황을 어렴풋하게 보여준다.

병운의 스키 코치 시절 제자였던 구청 단속반 여직원의 등장도 불경기 서울의 도로 풍경을 짐작케 해준다. 병운의 초등학교 동창 싱글맘은 불황 속에 어렵사리 살아가는 외로운 여가장의 존재를 보여준다.

<멋진 하루>의 카메라가 훑고 지나가는 자리자리마다, 불경기 속 도시의 사람들의 풍경이 마치 그 자리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등장하는 인물들도 각각 어느 이름모를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 같다. 영화는 희수와 병운, 병운과 주변 사람들의 관계에 집중하지만 본의 아니게 2000년대 초 서울을 휩쓴 불황의 풍경도 보여준다.

재회한 연인, 그러나 다시 사랑을 말할 여력이 없다

희수가 병운을 찾아간 곳은 용산의 어느 후질그레한 실내경마장이다. 희수는 병운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말한다. "돈 갚아." 희수는 병운의 안부를 물을 여력조차 없다. 다 귀찮고 돈만 받으면 사라지겠다는 심보다.

병운은 오랜만에 만난 희수가 반갑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이미 빈털터리가 된 병운은 희수에게 자신 있는 태도를 조금도 보이지 못한다. 과연 그들에게도 사랑했던 때가 있었을까?

영화는 흔한 플래쉬백조차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다. 희수와 병운이 사랑했던 때를 보고 싶어하는 낭만적인 기대는 전혀 충족되지 않는다. 영화의 크레딧이 오를 때가 돼서야 그들의 첫 대면 장면이 몇 컷 등장할 뿐이다.

2008년 서울이라는 공간은 재회한 연인이 추억을 회상할 여유도 없다. '내가 만약 그녀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병운은 자신의 현재의 여자들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그건 희수의 "돈 갚아"라는 말의 대답이다. 병운에게는 더이상 사랑이 거할 장소는 없다.

희수는 방어적이다. 그 방어적인 태도는 타인에게는 되려 공격적으로 보인다. 그래도 할 수 없다. "난 매일 매일 치열하게 살아도 모자라" 지금의 그녀 앞에는 그 어떤 것보다 받을 돈 350만원이 중요하다. 생활은 희수에게 추억 이상의 것을 강제한다.

<멋진 하루>가 말하려고 하는 것과 그 바깥들

영화는 집단적 무의식을 담아낸다. 이윤기가 이별 후 재회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지만 그 영상에 그 바깥의 것들이 담기는 것들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별과 재회의 연애공식조차 사회적 공간이라는 범주에 '포섭'되고, 집단적으로 공유되는 무의식을 반영한다.

1년 전에 헤어진 희수와 병운이 겪은 트라우마는 단지 이별의 상처만은 아니다. 그건 사업의 실패, 직장에서의 '탈출', 결혼의 실패 등 또 다른 개인적인 트라우마와 복합적으로 얽혀 있고, 거기에는 사회의 '운동'이라는 고정함수값도 작용한다. 이건 마치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고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관념을 환기한다.

<멋진 하루> 내내 희수는 병운의 시선을 회피하고 말을 자른다. 상기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기억의 연상작용은 뭔가를 자꾸 떠올리게 한다. 희수는 그것이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하철 안에서 희수는 눈물을 흘린다.

그 기억은 단지 희수의 것만은 아니다. 서로 길항작용(拮抗作用)이 되려면 희수는 자신의 기억을 병운과 공유하던가 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영화의 말미에서 희수는 다시 혼자의 세계로 침잠한다. 이것은 이윤기가 이해하는 '여자의 초상'이다. 트라우마에 연연하고, 궁극적으로 '개인'의 세계로 침잠하는 캐릭터는 이미 전작 <여자, 정혜>에서 등장한 바 있다.

<멋진 하루>에서 보이는 인물들의 모습은 단지 연애공식으로만 환원되지 않으려는 '집단적 무의식'이 어떻게 표현될 수도 있는가를 보여준다. <멋진 하루>의 여러 인물들은 때론 희수의 투사된 상이며, 때론 '집단적 무의식'의 투영이다.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멋진 하루>의 인물들은 희수의 다른 면면을 반영하고 또 표출한다. 그리고 영화의 안팎으로 서로서로 구성되는 무의식적 공감대는 단지 '대타자'로 호명되지 않을 사회라는 것에 대한 의미를 구성한다.

개봉영화 멋진하루 이윤기 전도연 하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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