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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금주법이 시행중이던 1920년대 후반에는 불안한 대공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은 겨우 걸음마 단계에 있었고, 아동들은 중노동의 대가로 형편없는 임금을 받고 있었다. 시민의 권리가 축소되는 만큼 공권력은 주체할 수 없이 비대해지고 있었다. 

그러한 시대 배경을 무대 삼은 <체인질링(Changeling)>은 하나뿐인 자식-월터-를 잃어버린 크리스틴 콜린스(안젤리나 졸리)라는 젊은 어머니의 신산스런 삶에 초점이 맞춰 있다. 불법과 폭력이 자행된 당대 전반적으로 경직돼있던 시대 상황은 직설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대신 프로덕션 디자이너 제임스 J. 무라카미가 재현한 로스앤젤레스 거리를 달리는 전차 밖의 풍경에선 을씨년스런 기운이 느껴지고, 톰 스턴이 흑백 영상으로 잡아낸 인물들은 차갑고 어색하게 굳어 있다. 광원 또한 극도로 절제되었다. 장면이나 컷들의 미장센은 교과서적이다. 미니멀한 전통드라마의 작법에 충실하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출답다.

이 영화에서 경찰은 진실 추구와는 전혀 다른 메카니즘에 따라 활동한다.그 결과 외아들을 잃어버린 엄마의 모성은 철저히 유린된다.
▲ 경찰의 '성실한' 언론플레이 이 영화에서 경찰은 진실 추구와는 전혀 다른 메카니즘에 따라 활동한다.그 결과 외아들을 잃어버린 엄마의 모성은 철저히 유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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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질링>에는 감동적이고 오싹한 소재와 매력적인 인물들이 넘친다. 정열적으로 일하는 워킹우먼이 애지중지하는 아홉 살 난 아들의 실종, 살아 돌아온 아이에게서 사라진 아들과 다른 신체적 특징이 밝혀지면서 드러나는 경찰의 졸렬한 음모, 라디오 설교를 통해 LAPD의 치부를 폭로하는 복음주의 장로파 목사(존 말코비치), 조직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멀쩡한 사람도 정신병원에 처넣을 수 있는 존스 반장(제프리 도노반), 조폭과 다름없는 경찰조직 내에서 맡은 바 직분을 올바르게 수행하려 노력하는 민완형사 레스터 이바라(마이클 켈리), 그리고 스무 명의 아이들을 닭장에 가둔 뒤 차례차례 도살한 희대의 연쇄살인마 고든 노스코트(제이슨 버틀러 하너). 시나리오 작가인 마이클 스트랙진스키는 놀랍게도 이 모든 이야기들을 실종 사건과 관련해서 한데 다 집어넣었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이 스크립트를 고든이 캐나다에서 도주하는 장면을 빼곤 거의 그대로 영화로 옮겨놓는데 성공했다.

<체인질링>은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때와 장소를 밝혀주면서 그토록 황당무계한 공권력의 억지와 어미 된 자에게 닥친 시련이 실화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사실에 기초해 이야기를 재구성했다는 뜻일 터이다. 그러나 사실과 진실은 겹치면서도 또 서로 다른데 보통 사실은 객관성에, 진실은 주관성과 통한다. 어쩌면 객관적인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미스터리를 다룬 실화 그 이상의 감정적 증폭을 일으킬 수 있다. 때문에 최대한 관련 자료를 섭렵한 뒤 사건의 인과관계에 따라 시퀀스, 씬, 컷을 배치해서 가공스런 사건의 비밀에 접근하는 탐색과 모험의 즐거움을 관객에게 대리 체험토록 한 것이리라.

그런데 진정 놀라운 것은 140여 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영화를 보고 나서도 관객들은 결국 월터가 어떻게 됐다는 것인지 잘 가리사니가 잡히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쩌면 진짜 월터를 봤을지도 모를 연쇄 살인범 고든마저 처형 당일 크리스틴과 만난 자리에서 담배 있으면 달라는 둥하며 교수형 당하기 직전의 횡설수설을 되풀이할 뿐이다. 월터의 실종 7년 후, 크리스틴은 와인빌 닭장 연쇄살인 사건의 생존자인 소년에게서 윌터 콜린스라는 이름의 소년이 닭장을 부수고 탈출할 때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경찰은 사건 현장 부근을 조사한 결과 월터의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한다. 소년의 말이 맞는다면 경찰은 여론 재판이 두려워 월터의 사체 흔적을 은폐한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여기까지 오면 월터가 어떻게 됐는지는 사실 별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년의 조사가 끝난 뒤 경찰서 앞에서 이바라 형사가 크리스틴에게 감동적인 눈길을 보내며 건넸던 말을 떠올려보자. '아직도 월터가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 질문에 크리스틴은 미소를 지으며 오늘 일로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고는 그 자리를 총총히 떠난다. 이 영화는 결국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까. 영화의 논리를 따르자면 '희망'이란 불가지로 가득 찬 세계에서 환난에 처한 인간이 믿고자 하는 '신념'이 된다. 영화 종반부에 이르러 월터의 생사는 이제 소망의 차원으로 넘어가버렸다. 그렇다면 그 많은 이야기들은 월터의 실종과의 연관성만을 추측할 수 있는 자료에 불과했단 말인가… 도대체 '바꿔치기 된 아이'는 어떤 지시를 받고 크리스틴의 아들 노릇을 하려 했던 것일까.

또한 경찰은 고든이 도망치는 월터를 총살한 시신을 찾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그 흔적을 말소해 버린 것일까. 혹자는 이 영화의 주제는 그런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굴의 모성을 감동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A True Story'를 강조하고 있던 영화가 실제의 사실을 추구하는데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음으로써 정신병원의 야만적인 전기 충격 장면조차 리얼리티가 떨어져 내러티브의 맥락에서 벗어난 이미지의 충격만이 머리 속에 잔상처럼 남을 뿐이다. 

법은 경찰과 맞선 어머니의 모성 편을 들어주지만 실종당한 아이까지 돌아오게는 못한다. 수사 시기를 놓친 경찰 때문에 발생한 피해는 어머니에게 회복하기 쉽지 않은 상처로 남는다.
▲ 법정에 선 고독한 어머니 법은 경찰과 맞선 어머니의 모성 편을 들어주지만 실종당한 아이까지 돌아오게는 못한다. 수사 시기를 놓친 경찰 때문에 발생한 피해는 어머니에게 회복하기 쉽지 않은 상처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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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을 다룬 영화 <밀양>은 자식의 죽음을 겪음한 여인의 각성에, <그놈목소리>는 유괴범의 정체 규명에 플롯의 초점이 맞춰졌다. 그런데 실화 <체인질링>은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인가? 월터의 살신성인인가. 아니면 월터의 생사 여부를 이해의 지평선 저 너머에 던져둠으로써 용기와 희생이란 미덕에 아련한 신화적 효과를 부여하려 한 것일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미국의 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호평해 마지않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식 미니멀리즘의 완성품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는 아마도 엄격한 사실의 추구보다는 엉터리처럼 돌아가고 부조리하며 폭력이 유일한 해결책인 세상에서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의 가치와 그것을 외면하지 않는 시민의 용기를 전달하려 했던 듯하다. 그런데 영화 초반에 크리스틴이 월터에게 '먼저 싸움을 시작하지 말아라, 그러나 일단 싸움을 시작했으면 끝을 보아야 한다'고 일러주는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지?

오히려 <체인질링>의 전체 테마가 진실 추구라는 싸움판에서 감독과 작가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초연한 거리두기 때문에 여러 서브플롯들의 상호 인과성은 모호함과 암시의 차원 속으로 실종해 버리고, 그런 만큼 안젤리나의 졸리의 스타 이미지가 내세워지면서 '모성'이 강조된다. 후반부로 갈수록 졸리의 클로즙업이 눈에 띄게 늘어난다. 그런 만큼 객관적 진실에 접근해야 할 실화의 미덕이 부각되지 못한 아쉬움이 못내 남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계간지 <쿨투라> 2009년 봄호에 실렸던 글을
약간 수정하여 다시 올린 글입니다.



태그:#클린트 이스트우드, #안젤리나 졸리, #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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