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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이었습니다. 뜻하지 않게도 어머니랑 제가 모노드라마 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판단에는 어머니가 완승입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진작 깨어 있었나 봅니다.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제 무릎을 어머니가 와락 잡아 흔들었습니다.

"지리산 할아버지가 오리야. 어서, 어서 가자."

꿈을 꾸셨든지 아니면 혼자 깊은 상상을 하고 계셨던 듯싶습니다(어머니께서는 치매로 고생하고 계십니다). 어머니 생신여행을 지리산으로 갔다가 어머니가 반한(?) 백발의 멋진 할아버지 얘기를 하신 겁니다. 오늘은 학교에 강의도 나가야 하고 잡지사에 원고도 보내야 하지만 저는 대뜸 어머니 손을 마주잡고 반색을 하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래요? 정말요? 아유 잘 됐네요. 가요 우리. 지리산 가요."
"그래도 전화 해 보고 가야 안 되건나?"

연락도 없이 가는 무례를 저지르고 싶지 않은 어머니 마음이 읽혔습니다. 저는 바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습니다.

전화기를 자신만만하게 건네 받으신 어머니. 목소리도 우렁차게 전화통화를 하신다.
▲ 전화 전화기를 자신만만하게 건네 받으신 어머니. 목소리도 우렁차게 전화통화를 하신다.
ⓒ 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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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잡수신 어머니께 들리라고 큰소리로 얘기를 했습니다. 지리산 할아버지한테 극진하게 안부를 여쭌 다음에 용건을 말했습니다. 이른바 전화기를 이용한 모노드라마를 연출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눈이 많이 와서 차가 못 간다고요?"
"그러면 언제요?"
"눈이 왔어도 살살 조심해서 가면 안 될까요?"
"어머니가 오늘 꼭 가고 싶어 하시는데 어떡해요."

제 연극이 제법이었나 봅니다. 제 말 한마디 한마디에 어머니 표정이 꿈틀꿈틀 했으니까요. 계속 전화통화가 이어지고 있는데 어머니가 한쪽 눈을 껌뻑이며 내 무릎을 꼬집었습니다. "이기... 눈치 엄씨. 전화 끄너!"하고 안타까운 듯이 제 귀에다 속삭였습니다.

그렇잖아도 전화를 끊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띠띠띠띠 하는 수화기 이탈음이 계속 내 귀를 괴롭혔거든요. 이 소리가 어머니에게 들리면 큰 낭패가 될 것이고요. 전화기를 내려놓은 저를 어머니가 야단을 쳤습니다.

"지리산 할아버지가 나중에라도 몬 오게 하믄 오짤락꼬 그래? 오지 말라카믄 안 가야지. 이기 지 생각만 하지 남 생각은 손톱만치도 안 해야 시방."

전화기 선이 분리 되어 있습니다.
▲ 전화기 전화기 선이 분리 되어 있습니다.
ⓒ 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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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임 할머니 연출의 제2탄 모노드라마가 바로 시작되었습니다.

"순이가 모 심을 때 같이 온닥캤는데 오락캐라."
'순이'는 올해 쉰 살인 서울 사는 제 여동생입니다.
"순이가 온다고 했어요?"
"그래. 접 때 그랬어. 오늘 모 심는데 오락캐야."

어머니는 오늘이 모심는 날인가 봅니다. 나는 전화해서 순이가 올 수 있는지 물어 보겠다고 하고는 전화기를 들었지만 계략(!)이 떠오르지를 않아서 '에라 모르겠다'하는 심정으로 어머니에게 수화기를 넘겨버렸습니다. 전화기 선은 분리시킨 채였습니다. 이때부터 휘황찬란한 어머니의 모노드라마가 시작되었습니다.

"순이가? 그래. 나 에미다."
"애들도 잘 있다고? 그래. 문서방은?"
"벌쌔 출근했어? 아이구 부지런해야. 문서방은 어딜 가나 부지런해야."
이렇게 안부를 극진히 딸과 주고받으신 어머니는 본론을 꺼내셨습니다.
"순아. 그란대 말이다. 너 오늘 모심는데 올 수 익껀나?"

이 대목에서 저는 조마조마했습니다. 순이가 내려 온대더라고 하면 어쩌나 하구요.

전화기 연결 짹이 분리되어 있다.
▲ 전화기 전화기 연결 짹이 분리되어 있다.
ⓒ 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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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출근한다고? 그라믄 몬 오건네?"
휴우~ 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모심는 거야 어찌어찌 놉을 해서라도 심구믄 돼지 머. 출근해야 된다카믄 출근부텀 해야 한 되건나."
"나도 갈끼냑꼬? 내가 가 봐야 안 되건나. 희식이가 혼자 오찌 하건노. 내가 가서 모춤이라도 아사 줘야지."
"찌랄하고 있다. 내가 오찌 그 멀리 서울 가노. 니가 와야지."
"인자 끊어."

어머니가 전화로 내 모든 걱정을 다 해결하신 겁니다. 근데 내가 잊고 있던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마저도 해결하셨습니다.

"머락꼬?"
"느그 오래비야 돌아서믄 변덕이라서 봐야 알지."
"모를 심을지 콩을 심을지 내가 오찌 아노."
"모 안 심는닥카믄 나는 팥이나 가릴란다."

모를 심기로 한 오늘도 이렇게 물려버리신 것입니다. 모를 심으려면 아직도 보름은 지나야 하거든요. 여기까지입니다. 구성도 그렇고 발성도 그렇고 효과도 그렇습니다. 아주 완벽한 모노드라마였습니다. 현실을 치유하는 영성드라마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연출한 연극이 단막극이라면 어머니 작품은 중편드라마였습니다. 나는 모른 척하고 물었습니다.

"머락캐요? 순이가 온대요?"

어머니가 아주 소상하게 통화 내용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아까 전화하실 때보다 살이 붙고 뼈가 생겨서 줄거리는 더 풍성했습니다. 두 편의 연극으로 이 아침이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우리 모자의 연극 어때요? 공연하면 보러 오실래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행복한 노년>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치매, #노인,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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