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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시 월곶IC에서 방산대교를 건너 신천IC 방향으로 나아가다, 망재산 고개를 넘기 전 쌍용저수지 인근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방산동이 나옵니다. 그 길 따라 능어리고개 너머 비좁은 방산가마터길로 약 700m 정도 나아가면 국가사적 제413호인 시흥방산동청자-백자요지가 나옵니다.

 

 

 

시흥방산동청자-백자요지는 한반도 중부지방에서 최초로 청자요업을 시작한 가마의 하나로 추정되는 가마터입니다. 1997년, 1998년, 2002년 세 차례에 걸쳐 해강도자미술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청자와 백자를 생산했던 대형전축요(벽돌로 축조한 가마) 1기와 도기를 구웠던 지하굴식 소형등요 1기가 발견되었습니다.

 

발굴조사 결과 9-10세기경 도자기를 굽던 시설로 밝혀졌고, 원래 전통적인 지하굴식 소형등요를 이용하여 도기를 생산하였는데, 새로운 가마기술인 전축요를 가진 중국의 장인 집단이 도래하면서 청자와 백자를 생산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합니다.

 

 

 

발굴조사시 청자와 백자 초기의 것들로 문양이 없는 무문청자와 중국 월주지방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해무리굽 청자를 비롯한 여러 자기 유물이 나왔다 합니다. 또한 도자기를 구울 때 티가 자기 표면에 내려앉는 것을 막기 위해 덮었던 갑발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들은 용인 서리 고려백자 가마터의 가장 아래층과 황해도 원산리 청자 가마터에서 나온 유물과 매우 비슷합니다.

 

'봉화'라는 음각명문이 새겨진 받침대도 출토되었는데, 이는 요업 초기에 중국 절강성 봉화 출신의 도공들이 도래하여 참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곳에서 생산된 청자와 백자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으로 운반되어 왕실, 중앙귀족, 승려층 등 당시 고급 수요층에 공급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청자가마 남쪽 10m 지점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가마도 찾아냈는데, 통일신라 이후 계속해서 자기를 구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청자-백자의 발생시점을 추정할 수 있는 의미 깊은 가마터는 도자사 연구 분야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합니다.

 

그런데 지난 1996년 6월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지 13년이 지났는데도, 가마터 코앞에는 알 수 없는 공장들이 난립해 있습니다. 특산물인 포도밭보다 비좁은 길과 마을 곳곳에는 영세공장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방산동 일대는 개발제한구역으로도 지정된 곳이 많은데도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국가사적 주변의 개발행위는 문화재보호법에 의해서도 제한을 받는데 말입니다. 대체 '생태-문화도시'를 외치는 시흥시는 어떻게 문화재를 관리하는지 참 답답했습니다. 골프장에 포위된 인천 경서동 녹청자도요지가 떠오르게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뉴스와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방산동가마터, #청자백자요지, #문화재, #개발제한구역, #시흥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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