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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잠긴 목장 위로 보트가 지나가고 있다.
 물에 잠긴 목장 위로 보트가 지나가고 있다.
ⓒ 호주국영 abc-TV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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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만의 대홍수였다. 끝 간 데 없는 호주 퀸즐랜드 밀밭이 비에 젖었다. 호주에서 키우는비육우의 40%에 해당하는 퀸즐랜드 소들이 비에 젖었다. 무엇보다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퀸즐랜드 농민들의 마음이 비에 젖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게다가 강물이 그렇게 빨리 불어날 줄 몰랐다. 내 평생의 추억(memory)과 애완견을 한순간에 잃었다. 내 인생이 사라진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계속된 혹독한 가뭄 때문에 키우던 양을 사살하면서 견뎌냈다. 그런데 이번 홍수로 모든 게 사라졌다. 홍수만 아니었다면 축산 부채를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결국 부채 액수가 늘어나서 앞날이 캄캄하다."

"10년 만에 충분한 비가 내려서 대풍작이 예상되는 시점에 대홍수가 났다. 올해 작황이 워낙 좋아서 얼마 전부터 곡물을 거둬들이는 꿈을 꾸던 중이었다. 이건 10년 가뭄보다 더 큰 재앙이다."

비에 젖고 물에 잠긴 크리스마스

위에 소개한 코멘트들은 호주국영 abc-TV 현장 인터뷰에 응한 피해 농민들의 탄식이다. 크리스마스 며칠 전부터 추적이던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지면서 대재앙이 시작됐다. 급기야 집이 물에 잠기고 도로가 유실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크리스마스는 호주에서 가장 큰 명절이다. 각지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모여서 오순도순 지내는 시즌이다. 더욱이 크리스마스 연휴는 새해까지 열흘 가까이 이어진다. 그런데 퀸즐랜드 북부 거점도시인 타운즈빌로 가던 더글라스 스턴(36)은 고향집 코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도로 위에 세워진 '도로 봉쇄(Road Closed)' 표지판과 맞닥트린 것. 그는 "시드니에서 출발해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왔는데, 부모님이 계신 고향집 수십 킬로미터 앞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다. 내 평생에 이렇게 우울한 크리스마스는 없었다"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퀸즐랜드 지역의 홍수사태는 크리스마스를 지나고 2011년 새해를 맞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비가 계속 오는 건 아니지만, 집중호우로 인하여 강물이 계속 불어나서 강과 인접한 40여 개 중소 도시가 침수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도로 봉쇄 표지판이 세워진 홍수 피해 지역.
 도로 봉쇄 표지판이 세워진 홍수 피해 지역.
ⓒ 호주국영 abc-TV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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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가뭄에 이어 덮친 50년 만의 대홍수

2009년 크리스마스 즈음의 퀸즐랜드 지역은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10년 연속 이어진 가뭄 때문에 대지가 타들어갔던 것. 농민들은 늘어나는 부채 때문에 파산 선언을 하는가 하면, 야반도주를 하는 농가도 적지 않았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특별지원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말라비틀어진 밀밭에서 자살하는 농민이 속출했다. 양을 키울수록 손해가 커져, 농민들은 총으로 양들을 사살해야 했다. 그로 인한 트라우마(trauma, 마음의 상처) 때문에 정신과 전문의를 찾는 농민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2010년에 들어서면서 충분한 강수량으로 농민들은 활기를 되찾았다. 밀과 사탕수수 등의 작황이 워낙 좋아서 오랜만에 '풍년가'를 부를 것으로 기대됐다. 일손부족으로 적기 수확을 놓치면 안 된다고 조바심을 내던 차에 대홍수가 발생한 것이다.

퀸즐랜드 북부 지역 출신의 봅 카터(무소속) 의원은 "지난 10년간 자살한 내 친구들의 모습이 자꾸 꿈에 나타난다"면서 "가뭄이 1~2년 일찍 해소됐다면 호주 농촌이 지금처럼 처연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장탄식을 했다.

카터 의원은 이어서 "특히 호주-미국 FTA 때문에 파산할 수밖에 없었던 사탕수수 재배 농민들과 낙농업에 종사한 농민들의 원망 어린 눈을 잊을 수가 없다"면서 "오죽하면 내가 '농촌당(Country Party)'으로 불렸던 국민당을 탈당해서 무소속으로 남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물에 잠긴 목장에 갇힌 소들.
 물에 잠긴 목장에 갇힌 소들.
ⓒ 호주국영 abc-TV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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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갇힌 소떼가 몰려다니는 모습.
 물에 갇힌 소떼가 몰려다니는 모습.
ⓒ 호주국영 abc-TV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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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El Nino)'와 '여자아이(La Nina)'의 저주

그렇다면 왜 호주에서 이렇듯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발생하는 것일까? 호주 기상학자들은 '엘니뇨(El Nino)'와 '라니냐(La Nina)'의 영향으로 분석한다.

엘니뇨와 라니냐는 1950년대 이후 대기와 해양의 관측기술이 발전하면서 알게 된 태평양 연안과 적도 중앙부의 기상변화를 칭하는 용어다.

엘니뇨란 스페인어로 '남자아이(The child)' 또는 '아기 예수'를 의미하며 적도 부근에서 남미해안으로부터 중태평양에 이르는 넓은 범위에서 해수면 온도가 지속적으로 높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그 결과, 어떤 해는 해수의 온도가 평소보다 5~6℃나 상승해서, 페루와 에콰도르에는 평소보다 40배에 가까운 폭우가 내렸고 적도 부근의 서태평양 지역인 필리핀, 인도네시아, 호주 등은 예년에 비해 훨씬 적은 강우량을 기록해서 가뭄사태가 발생했다.

반면에 스페인어로 '여자아이'를 뜻하는 라니냐는 적도 무역풍이 평년보다 강해지면 서태평양의 해수면과 수온이 평년보다 상승하게 되고, 찬 해수의 용승 현상 때문에 적도 동태평양에서 저수온 현상이 강화되어 나타나는 엘니뇨의 반대현상이다. 

"호주는 지구에서 벌목을 가장 많이 한 나라"

2009년 9월, 시드니 시내에 위치한 '토털환경센터(Total Environment Center)'의 제프 엔젤 소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는 기자에게 "호주의 환경재앙은 자연재해라기보다는 인간이 만든 재앙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호주의 석탄 수출을 반대하는 그린피스 선박.
 호주의 석탄 수출을 반대하는 그린피스 선박.
ⓒ 토털환경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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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 소장은 "19~20세기의 '양모 붐' 때문에, 목장 개발을 구실로 호주는 지구에서 벌목을 가장 많이 한 나라였다. 지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대자연은 그 나름대로 질서를 갖고 있다.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모든 생명은 자연에 순응하면서 개체를 보존하고 있다. 인간만이 자연을 파괴하면서 재앙을 자초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당시 시드니 일대에 불어 닥친 빨간색 '먼지 폭풍(dust storm)'에 대해서 엔젤 소장은 "사람들은 아무리 큰 재앙이 닥쳐도 천재지변이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인간이) 중병에 걸린 자연이 몸부림치게 만들었다"면서 2009년 12월에 코펜하겐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당사국 총회에 큰 기대를 걸기도 했었다.

한편 그린피스 등의 호주 환경단체들은 "이산화탄소를 만들어내는 화석 연료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다. 그게 석유와 석탄인데, 호주는 전 세계 석탄 수출 1위 국가다. 연례행사로 찾아오는 자연재앙들인 산불, 가뭄, 홍수 등의 피해를 자초한 감이 없지 않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자연재해에 넋을 잃은 '여왕의 땅(Queensland)' 농민들

2011년 벽두부터 홍수에 시달리고 있는 퀸즐랜드는 식민지 개척시대에 '영국 여왕의 땅'이라는 의미로 이름이 붙은 곳이다. 또한 사시사철 이어지는 맑은 날씨 때문에 '태양의 주(Sunshine State)'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런 일화도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이 퀸즐랜드를 방문했는데 연일 비가 쏟아졌다. 그러자 피터 비티 주 총리는 "선샤인 주에 오신 여왕을 환영합니다. 지금 비가 오고 있지만, 그래도 여기는 여왕 폐하의 선샤인 주입니다"라는 환영사를 했다.

2011년에도 퀸즐랜드에는 연일 비가 내리고 있다. 지구 북반구 여러 나라의 혹한과 남반구에 속한 호주의 대홍수로 2011년 새해맞이가 어수선하다. 한국에서 구제역이 맹위를 떨치면서 축산농민들이 울부짖는 동안, 밀 수확기를 맞은 호주농민들은 물에 잠긴 대평원을 바라보면서 넋을 잃었다.

그런데 호주 동북부에서 발생한 대홍수의 영향은 농축산 농가의 피해와 생태계 질서 파괴로 끝나지 않는다. 퀸즐랜드주 정부는 잠정 피해액수를 50억 호주달러 이상으로 집계했지만, 세계 경제에 끼치는 파장은 그보다 훨씬 클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홍수로 떠내려가는 캥거루.
 홍수로 떠내려가는 캥거루.
ⓒ 호주국영 abc-TV 시청자 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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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중국·일본·인도 철강생산업체 긴장

이번에 홍수가 발생한 지역은 제철용 석탄인 점결탄(coking coal)의 주생산지다. 게다가 호주는 전 세계 점결탄 수출량의 절반 이상(54%)을 차지하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점결탄을 주로 수입하는 한중일과 인도 등의 제철업계가 입을 타격은 불을 보듯 뻔하다.

가격폭등은 차치하고라도 우선 물량확보에 차질이 생겨서 큰 혼란이 일어날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6일 오후, 호주국영 abc-TV는 "점결탄 수출항구인 맥케이가 막대한 피해를 봐서 현재 하역작업이 불가능하고 복구 작업 또한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한편, 호주 기상전문가들은 퀸즐랜드에서 출발한 큰물이 호주의 젖줄인 머레이-달링 강줄기를 따라서 뉴사우스웨일즈(NSW)주와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SA)주로 흘러가기 때문에 강 범람으로 인한 피해가 계속 발생할 것으로 예상한다.

퀸즐랜드에서 발원한 큰물이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남쪽의 바다로 빠져나가는 데 2~3개월 정도 걸리기 때문에 강 주변의 피해 발생이 몇 달 동안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는 것. 해당지역은 호주 전체 농산물 생산량의 70% 이상을 감당한다.

홍수가 발생한 퀸즐랜드 중부와 북부는 프랑스와 독일의 국토를 합쳐놓은 것만큼 넓은 지역이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석탄 주 생산지이면서, 그 피해를 고스란히 당하는 농축산업의 심장부이기도 하다. 2011년 호주의 신년 화두는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기'다.

수재민 구조에 나선 경찰관들.
 수재민 구조에 나선 경찰관들.
ⓒ 호주국영 abc-TV 회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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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난리 중에 낚시하는 남성들.
 물난리 중에 낚시하는 남성들.
ⓒ 호주국영 abc-TV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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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홍수, #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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