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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무릎을 베고 아이는 잠들고

 

낮 12시 27분,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중국 기차는 어김없이 정시에 출발한다. 모든 것이 느리고 느긋한 중국에서 기차의 출발과 도착만은 정확하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오래전, 중국 여행길에서였다. 백두산 근처 이도백하(二道白河)에서 밤 기차를 탔다. 다음날 오전에 장춘(長春)에서 귀국하는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이었다. 흐릿한 불빛 아래 기차는 마치 낡은 과거의 시간 속으로 흐르듯 천천히 움직였다.

 

'내일 제시간에 장춘역에 도착할 수 있을까? 만약 조금이라도 늦으면 비행기를 탈 수 없을 텐데….'

 

나는 조바심에 밤잠을 못 이루고 뒤척였다. 모든 것이 만만디(慢慢的)인 중국이라 기차도 당연히 늦을 거라는 지레짐작을 하고 조바심을 친 것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기차는 정확하게 예정된 시간에 장춘 역에 도착했다. 오히려 비행기가 제시간에 출발하지 않고 몇 시간을 꾸물대는 경우는 많았어도 지금까지 열 차례가 넘는 기차 여행에서 시간을 지키지 않은 경우는 보지 못했다.

 

지금은 많이 바뀌어 비행기가 먼 거리 이동의 대표적인 운송 수단이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중국에서는 기차가 주요 교통수단이다. 그러니 서로 연계되는 다른 교통수단과의 연관성을 고려해서 도착 시간을 충분히 확보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배낭을 내 자리에 던져 놓는다. 잉워(硬臥), 딱딱한 침대의 중간이다. 벽 한 면에 세 개의 침대가 상, 중, 하로 배치되어 있고, 맞은 편도 마찬가지다. 가격은 아래가 가장 비싸고, 위가 가장 싸다.

 

발판을 딛고 내 자리로 올라가 한숨을 돌린다. 마치 전쟁을 한 판 치른 것 같다. 춘절이 멀지 않아서인지. 기차 대합실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복잡했다. 줄을 서긴 했지만, 조금만 틈을 주면 사람들은 마구 새치기를 했다. 남자들은 너나없이 담배를 피워 물고 있어 복잡한 대합실은 연기로 자욱했다. 거기에 다른 열차가 몇 분 간격으로 개찰을 하고 있어, 자칫하면 내가 탈 기차를 놓치기 십상이라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기차는 쿤밍에서 광저우(廣州)까지 가는 336차(次)다. 내가 가는 곳은 싱이, 구이저우성(貴州省)이다. 운남성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도시이고, 쿤밍에서는 약 5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니,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5시간을 멀다고 느끼지 않는 것은 이곳이 중국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야 서너 시간 걸리면 너무 먼 거리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이틀, 사흘 밤을 기차 안에서 잠자며 이동하는 형편이니 다섯 시간은 그저 가까운 이웃인 셈이다.

 

'이제야 마음이 여행 모드로 바뀐 것 같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본다. 기차는 석림(石林)을 지나 쿤밍의 동쪽 방향을 향해 달린다. 귀주성 가까이에 들어섰는지, 터널이 쉴 새 없이 나타난다. 귀주성은 산이 많고 평지가 좁은 곳이라더니, 그래서인지 터널을 벗어나면 이내 또 터널이다. 

 

 

터널에 들어서면 어두운 창밖으로 한 사내가 꺼칠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본다. 눈이 퀭하게 들어갔고, 머리는 다 벗겨져 뒷머리만 겨우 남아 있는 그 사내. 나는 그 사내를 바라보며 아득하게 흘러가버린 세월의 갈피를 더듬는다.

 

청춘은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이제는 중년의 사내가 청춘의 자리를 대신해 남아 있다. 그러다가 터널을 벗어나면 사내는 어느새 사라져버리고 만다. 생이란 그렇게 잠시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흘러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나는 막막한 기분에 잠겨 잠시 눈을 감는다.

 

얼마가 지났을까? 눈을 뜨고 바라보니, 아래칸 맞은편에 어린아이가 나를 보고 빙긋이 웃는다. 아이 곁에서 아빠가 아이를 어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다. 서너 살이나 되었을까? 

 

"몇 살?"

 

내가 아이를 보며 묻자 아이는 대답은 하지 않고 아빠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세 살이에요."

 

아빠가 대신 대답을 한다. 선하게 생긴 얼굴에 몸이 호리하다. 옷은 오래 입어서인지 낡고, 청바지는 군데군데 하얗게 보풀이 일어 있다.

 

"이름이 뭐야?"

 

내가 다시 아이에게 물었지만 아이는 여전히 제 아빠만 바라본다.

 

"장위징(張宇晶)입니다."

 

이번에도 아빠가 대신 대답을 하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품이 아이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것 같다.

 

"장위징. 장위징."

 

그제야 내게 대한 경계심이 좀 풀렸는지, 아이는 나를 향해 제 이름을 거듭 종알거린다. 그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다.

 

"어느 나라에서 왔습니까?"

 

내 말투만 듣고도 자기네 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아빠가 조심스레 묻는다.

 

"한국이요."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이를 향해 또박또박 되풀이해 이야기한다.

 

"한국에서 왔대. 한국."

 

그러나 아이는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 모르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나는 짐을 뒤져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내 아이 사진을 한 장 찍어 준다. 인화지에 제 모습이 차츰 나타나기 시작하자 아이의 표정이 놀람에서 기쁨으로 바뀐다. 아빠도 환하게 웃으며 아이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사진을 보느라 정신이 없다. 몇 번이나 내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그의 얼굴이 순수하다.

 

사천성(四川省) 네이지앙시(內江市)가 고향이라는 그들은 구이양(貴陽)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한단다. 고향으로 가는 길이라서일까? 두 부자의 얼굴에 들뜬 표정이 어린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대상이다. 복잡한 자본 중심의 사회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고향은 언제나 돌아가 노후를 보내야 할 유토피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회지의 많은 사람들은 퇴직 후의 낙향을 꿈꾼다. 그것이 비록 꿈으로만 남을지라도.

 

그러나 젊은 세대에게는 고향이 없다. 그들은 돌아가 꿈을 심고 살 고향 따위는 필요 없다. 사람도 휘황한 불빛도 없는 시골 생활은 무서워서 싫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지금의 40대 이상의 부모들은 대개 도회지로 유입된 유이민 출신이거나, 아니면 그 자신이 유이민이다. 그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농경 집단의 후예인 셈이다. 그러나 그 이하의 세대들은 보모나 본인들이 대부분 도회 생활에 익숙하다. 그들은 상업자본주의의 후예인 셈이다. 상업자본주의 세대에게 고향은 도회지이지 농촌이 아니다. 그래서 명절이라도 돌아갈 고향이 없고, 필요하지조차 않다.

 

이제 우리 사회는 농경의 흔적조차 찾기 힘든 상업자본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나 같은 농경 부족은 뿌리내릴 곳이 없다. 허공에 뜬 삶, 제 땅에서조차 이방인이 되어버린 사람이 이렇게 여행길에서 만나는 또 다른 자신의 과거 같은 풍경을 나는 두 부자의 모습에서 찾는다. 그래서인가? 두 사람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애잔해진다.

 

잠시 생각에 젖어 있다 아이를 보니, 끄덕끄덕 졸고 있다. 좁은 침대에서, 아빠는 무릎을 굽힌 채 잠이 들었고, 아이는 그런 아빠의 무릎을 베고 졸음에 젖어 있다. 더없이 평안해 보이는 그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잔잔해진다. 고향 같은 느낌이 그 풍경 속에 어려 있다.

 

안개에 젖은 구이저우

 

기차는 때때로 기적 소리를 비명처럼 지르며 달린다. 험한 산길을 달리느라 힘이 드나 보다. 창밖으로는 안개가 짙다. 안개는 산을 감싸고 기차를 따라 흐른다. 안개 사이로 파스텔화처럼 비탈밭이 놓여 있다. 산을 따라 좁고 부드럽게 밭둑을 만들어놓은 풍경이 잔잔하다.

 

달리면 달릴수록 터널은 끝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나는 아득함에 젖어 의식의 끈을 잡았다 놓았다를 반복한다. 기차도 흐르고 내 의식도 흐른다. 옆 칸에 탄 일행들은 술을 마시는 지 떠들썩하다. 그들의 말소리조차 안개에 젖은 듯, 내 의식 저편에서 아련하게 들려올 뿐이다.

 

차창에는 여전히 한 사내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들여다본다. 마치 윤동주의 시처럼 나는 그 사내가 불쌍해진다. 세상에 대한 꿈도, 자신의 삶에 대한 의지도 다 버린 그. 낯선 땅, 낯선 풍경 속에 그는 버려진 것처럼 놓여 있다. 아, 삶이란 낯선 길 위를 헤매는 나그네 같은 것 아닐까.

 

기차가 천천히 싱이 역에 도착한다. 어디 아득한 다른 세계에 발 딛는 것처럼, 나그네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기차에서 내려 역 밖으로 나선다. 싱이다.

 

역사를 나서자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마구 달려든다. 목청을 높여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가만 들어보니 자기 차를 타라는 것이다. 택시 기사도 있고, 중빠(미니 버스) 기사도 있다. 심지어 시내버스 차장도 우리 일행에게 달려들어 자기네 차를 타라고 손짓 발짓이다.

 

"완평린까지 얼마요?"

"80위안. 싸다."

 

택시 기사가 우리를 자기네 차로 잡아끈다. 네 명에 80위안이면 한 사람당 20위안, 괜찮은 가격이다 싶은데, 운남에 사는 후배가 지인에게 전화를 해 보더니 바가지란다.

 

"택시 한 대에 20위안이면 간대요. 거기다 완펑린에는 마땅한 숙소도 없다는데요."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 사이, 역 광장으로 안개가 점점 짙어진다. 어둑발도 내리기 시작한다. 마음이 괜히 급해진다.

 

미친듯이 달리는 버스,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기에

 

"그냥 버스 타고 시내에 가서 하루 묵고 내일 아침 일찍 완펑린으로 갑시다."

 

내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이번에는 버스가 시내 중심가로는 가지 않는 노선이란다.

 

우리가 망설이자, 버스 기사가 걱정 말고 시내까지 데려다 주겠단다. 노선을 바꾸면서 우리를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 친절일까? 알고 보니 우리 일행 이외의 손님이라야 서너 명뿐이라 그런 것이란다.

 

우리가 타자 버스는 쏜살같이 역 광장을 벗어난다. 큰길로 나선 버스는 미친 듯이 속력을 낸다. 기사는 무엇에라도 쫓기는 사람처럼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아댄다. 나도 모르게 앞 의자를 꽉 움켜쥘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앞에 다른 차나 사람이 있으면 경적을 마구 울려댄다. 마주 오는 차에도 어김없다. 마치 세상에 나만 존재하면 되고, 나머지는 다 꺼지라는 소리 같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이렇게 차를 몰까?' 

 

그런 나의 심정이 이상한 것일까? 차에 탄 중국 사람들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무표정하다. 그저 우리 일행만 얼굴을 찌푸리고, 인상을 긁고 앉아 있다.

 

한참을 달리던 차가 멈춘다. 목적지인 시내라고 하기에는 너무 한적하다. 내리려고 짐을 챙기자 기사가 아니란다. 함께 탔던 중국 사람들만 내려 앞에 서 있는 다른 버스로 옮겨 탄다. 우리를 시내로 데려다 주기 위해 원래 노선으로 가는 사람을 다른 버스와 연결시켜 주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시내버스도 대절 버스처럼 탈 수 있다!"

 

일행 중 누군가가 놀라는 말투로 중얼거린다.

 

중국식 변기다 보니 일어설 때 무릎이 '우두둑'

 

시내에서 버스를 내려 먼저 식당으로 간다. 하도 버스가 요동을 치며 달려서인지, 배가 제법 고프다. 여행, 특히 배낭여행에서는 잘 먹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잘 먹는다고 해서 고급 음식을 먹는다는 뜻이 아니다. 무슨 음식이든 가리지 않고 잘 먹어야 오랜 여행을 견뎌낼 수 있다는 말이다.

 

길은 어둡고 날씨는 춥다. 영하는 아닌 것 같은데, 바람이 날카롭게 옷깃을 파고든다. 일행 중 한 명이 길을 걷다가 하수구에 빠진다. 온갖 생활하수가 넘쳐났는지, 악취가 장난이 아니다. 마치 우리나라 60년대의 풍경을 보는 것 같다. 오래전의 시간 여행을 떠난 것처럼 아득하다.

 

저녁을 먹고 난 후, 숙소로 간다. 식당에서 소개해 준 빈관이다. 빈관 직원이 차를 몰고 와 우리 일행을 태우고 도착한 곳은 조그만 모텔이다. 이름은 하이위빈관. 이름은 '바다의 보석'이지만, 낡고 허름하다.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아 로비에는 냉기가 감돌고 있다.

 

방에 들어서 온풍기를 켜보니 그래도 더운 바람이 미지근하게나마 나온다. 화장실은 전형적인 중국식이다. 좌변기가 아니라서 쪼그리고 앉아 볼일을 봐야 하는 변기라 일어설 때는 무릎에서 우두둑 소리가 난다.

 

짐을 풀어놓고 나자 그냥 잠을 자기에는 아쉽다. 여행지에서 밥 먹고 바로 자는 것은 여행의 중요한 알맹이를 하나 빼먹는 일이다. 일행들과 함께 어두운 밤거리로 나선다.

 

숙소를 지나 골목골목을 걸어 도착한 곳은 허름한 '샤오카오(燒烤)' 집이다. 샤오카오는 꼬치구이를 말한다. 온갖 꼬치와 두부, 부추에 돼지꼬리까지 진열해놓았는데, 의자는 유치원생에게나 맞을 것 같은 앉은뱅이다. 쪼그리듯이 앉아 꼬치구이에 맥주를 마시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제법 빗줄기가 거세다. 사람들은 내리는 빗줄기가 별것 아니라는 듯, 우산도 없이 길을 걸어 다닌다.

 

샤오카오 집의 행복

 

이방의 땅에서, 빗줄기에 마음을 적시며 먹는 꼬치구이는 쓸쓸하면서 아름답다. 꼬치구이집 아들인 듯, 잘 생긴 아이가 제 아빠 옆에서 일을 거들고 있다. 엄마는 국수를 말아내고, 아빠는 연탄불 위에 꼬치를 굽는다. 엄마 일손을 거드는 아리따운 아가씨도 있다.

 

그 아가씨가 연방 아이의 볼을 꼬집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예뻐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다. 종업원인가 해서 물었더니. 아이의 누나란다. 나이 차이가 제법 나 보인다. 늦둥이 동생이라 더 예쁜가 보다.

 

일가족이 손을 더해 꾸려가는 작은 꼬치구이집의 행복이 빗줄기 속에서 넘쳐 흐른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까지 행복해진다. 행복은 이렇게 전염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가족 뒤로 하염없이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행복이란 많은 것을 가져서 생기는 것이 아님을, 서로를 아끼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너무 크고 많은 것을

혼자 가지려고 하면

인생은 무자비한

칠십 년 전쟁입니다

이 세계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닙니다

신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낮에는 해 뜨고

밤에는 별이 총총한

더 없이 큰

이 우주를 그냥 보라고 내주었습니다

 

그 가족을 보며 나는 김광섭 시인의 <인생>이라는 글을 떠올린다. 그래서일까? 싱이에서의 첫 밤이 갑자기 행복해진다.

 

빗줄기를 헤며 그 밤, 숙소로 돌아와 풋잠에 든다.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깜박 잠이 든 것이다. 그 잠깐의 잠 속에서도 내 얼굴에는 아마 행복한 미소가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월 중국 귀주성을 여행한 기록입니다. 


태그:#귀주, #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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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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