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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을 받은 지 15년이 지났다. "나라가 망했다"는 위기의식은 한국인 모두에게 공포로 다가왔다. 그로부터 15년, 한국사회는 여전히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IMF 이후 변해버린 한국사회의 모습을 IMF 한복판을 건너온 인물들을 통해 조명한다. - 기자말

15년 전, IMF를 겪으면서 많은 실직자들이 택시기사를 '제2의 인생'으로 택했다.
 15년 전, IMF를 겪으면서 많은 실직자들이 택시기사를 '제2의 인생'으로 택했다.
ⓒ 최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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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벽력 같았다. 12년을 근무한 일터였다. '성실한 공사맨'이란 자부심도 무너졌다. 15년 전, IMF는 유종대(55)씨에게 그렇게 '명예퇴직'이란 이름으로 날아왔다. 말이 명예퇴직이지, 강제적인 구조조정이나 마찬가지였다. 회사 내에는 공공연하게 나가게 될 직원들 명단이 돌았다. 기술직이던 유씨 역시 명단에 이름이 있었다.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사표를 제출한 뒤 그는 좌절했다. 누가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지각 한 번 없이 묵묵히 일해 온 그였다. 하지만 그와 같은 사람들은 회사에서 쫓겨났다. 주로 위에 아부 잘하는 사람들이 남았다.

불행은 한꺼번에 오는 법. 명예퇴직 얼마 전, 그의 아내는 이종 사촌동생이 하던 옷가게를 인수했다.

"동네 옷 가게였는데 IMF가 올 때여서 장사가 안 됐다. 봄 옷 가져오면 금방 여름 되고, 여름에 장사 못 하면 또 금세 가을이 오고. 재고는 계속 쌓이고…. 그것도 내 돈에 빚까지 얻어서 시작한 거였다."

그의 아내는 안 되는 장사를 더 크게 키우는 것으로 만회하려고 했다. 새벽에 옷 사러 다니던 남대문시장에 가게를 냈던 것. 남대문은 보증금보다 권리금이 더 비쌌다. 월세도 비쌌다. 장사를 어지간히 잘하지 않고는 버티기 힘든 상황. 그런데 당시는 최악의 불경기였다.

"카드대출 2천만 원을 받아서 줬다. 그걸로만 장사 했으면 내돈만 까졌을 텐데, 집사람이 동네 아줌마들한테 사채를 썼더라. 근데 장사가 안 됐다. 가게 운영해야지, 가게세 줘야지, 이자 내야지…. 점점 감당하기 힘들어지면서 망한 거지. 망하고 나니까 돈 빌려준 아줌마들이 찾아와서 막 뭐라고 하고, 집사람은 방법이 없으니까 빚쟁이들 피해서 집에도 잘 안 들어오고. 그렇다고 내가 해줄 능력도 안 되고…. 내가 직장을 잃은 것과 집사람 일이 겹치면서 가정이 파탄 나 헤어지게 됐다."

명퇴에 이혼까지

두 달 동안 유씨는 매일 소주 한 병씩 마시지 않고는 잠을 못 잤다. 밤이고 낮이고 집에만 처박혀 있었다. 한 마디로 "대한민국이 싫어졌다, 떠나고 싶다"였다. 실제 미국에 사는 막내 동생을 통해 이민을 알아보기도 했다. 지긋지긋한 한국이었지만 유씨는 결국 이민을 가지 못했다. 퇴직금까지 아내 장사에 다 쏟아 붓고 신용불량자가 됐기 때문. 이민을 가려면 통장에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 했다. 헌데 유씨는 금융거래를 아예 못하는 상황. 그런 처지에까지 빠진 자신이 한심스러워 그는 자꾸 술을 찾았다.

유씨를 술독에서 건져낸 건 아이들이었다. 당시 아들과 딸은 중1, 다섯 살이었다. 아빠만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나약한 모습만 보일 수는 없었다.

유시는 우선 공사장에 나갔다. '노가다' 인력관리를 하는 친구가 "집에서 노느니 괜찮은 데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일주일 만에 몸살이 났다. 무거운 벽돌을 지고 모래 나르는 일이 많이 힘들었다. 그래도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두 달을 버텼다. 딸아이는 친구들이 유치원 가는 시간에 골목에서 혼자 소꿉놀이를 했다. 열네 살 아들은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아빠를 돕겠다며 중국집 배달일을 했다. IMF의 불행은 그렇게 아이들에게까지 이어졌다.

유씨는 또 다른 호구지책을 찾아야 했다. 친척이 집 근처에 있는 택시회사 H운수를 소개했다. 택시운전을 서너 달 하면서 다른 일을 찾아볼 요량으로 갔다. 1998년이었다. 네비게이션도 없을 때다. 길을 모를 때면 승객들한테 "제가 택시 운전한 지 이틀째입니다, 삼일째입니다"라면서 양해를 구했다. IMF를 함께 겪을 때니 손님들도 이해했다. 승객들은 "아이고, 그러세요. 힘드시죠?"하면서 친절하게 길을 안내했다. 그런 정으로 모두가 힘든 시기를 이겨내려 했다.

그렇다고 고통이 금세 사라진 건 아니다. 유씨는 새벽 4시 교대시간에 맞춰 깜깜한 밤에 나올 때 참 힘들었다고 한다. '가고 싶은 직장' 설문조사에서 매년 1, 2위를 다투던 통신공사에서 갑작스레 '막장 인생'이라 불리던 택시까지 오게 된 처지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깨져버린 가정의 현실도 그를 괴롭혔다. 사는 게 막막했다.

"택시 운전대를 잡은 지 3개월쯤 된 날이었다. 새벽 4시에 교대를 하는데 회사 근처 교회에서 새벽 예배를 보더라. 너무 힘드니까 나도 모르게 거길 들어갔다. 남들 예배 보는데 뒤에 앉아서 '하나님, 왜 이렇게 나에게 힘든 고통을 주십니까'라면서 홀로 하염없이 울었다. 그러고 나니 조금 후련해지더라."

현실은 남았다. 대량해고의 시대, '제2의 직장'으로 택시를 택한 실직자들이 많았다. 개인택시에 대한 꿈 탓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1997년 3000만 원 좀 넘던 개인택시 값이 1998년 5000만 원을 넘었다. 그런데 밥도 제때 못 먹고 한 달을 꼬박 일한 유씨의 손에 들어온 건 100만 원 남짓. 개인택시를 넘볼 처지가 못 됐다.

그마저도 월급이 나오자마자 카드회사에서 먼저 50%씩 떼 갔다. 전처에게 해줬던 카드론 2천만 원이 그의 목을 옥죈 것. 생활이 되지 않았다. 전셋집을 사글세로 바꿨다. 일수까지 썼다. 일을 해도 보람이 없었다. 그렇게 비참한 생활이 이어졌다. 그나마 주인집 아주머니가 반찬 등을 주면서 아이들을 챙겨줬다. 지금도 유씨는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꼬박 2년을 그렇게 살고선 빚을 갚았다. 숨통이 조금 트였다.

2년간 월급 절반은 카드회사가 떼 가

그 즈음, 예전에 일했던 통신공사에서 임시직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유씨는 고민했다. 비정규직이긴 해도 택시보다 월급은 많을 터. 하지만 왜 하필 비정규직인가. 분명 차별이 있을 게 뻔했다. 택시에서 만난 많은 손님들이 들려줬던 얘기다. 임금은 비정규직과 별 차이 없지만 신분은 정규직인 택시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정규직원들이 쉬는 휴일에 택시를 모는 '스페어' 직원들은 임금이 더 적었다. 그도 그렇지만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감에 떨었다. 그런 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 노동조합 대의원 활동을 시작하던 때였다. 선배가 권유하기도 했지만, 그의 뜻도 있었다. 후배들이 밟혔다. '내가 정년 퇴직해서 택시에서 물러났을 때, 후배들이 지금보다는 더 나은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었다. 특히 택시기사들의 하루하루를 갉아먹는 사납금 제도를 없애고 싶었다.

매일 '오늘은 사납금을 찍었나'에만 목 매며 목숨 건 '곡예운전'을 하는 기사들이 태반이었다. 기본급이 60만 원 남짓한 상황에서 사납금마저 채우지 않으면 월급 봉투는 더 얇아졌다. 지금도 택시에서 승차 거부, 과속 운전 등이 사라지지 않는 원인이기도 하다.

2002년, H운수에서 사납금 제도가 사라졌다. 한국노총 소속에서 민주노총 산하인 전국민주택시노동조합(민택)으로 넘어온 때이기도 하다. 이를 관철하기 위해 8일간 파업을 벌였다. 사장도 그때 겁 좀 먹었을 게다. 직원 300명 중 270~280명이 계속 회사마당을 꽉 채우고 있었으니까.

유씨는 사납금이 없어지자 마치 해방을 맞은 것 같았다. 일제 때 맞은 해방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가슴을 억누르던 뭔가가 사라져 가슴이 뻥 뚫린 듯했다. 조합원 모두가 한 마음으로 똘똘 뭉쳐 움직였기에 가능했다. 유씨는 그 힘이 여전히 살아있는 분회가 자랑스럽다. H분회는 현재 서울에 몇 개 안 남은 사납금제가 없는 택시사업장 중 하나다. 민택 산하의 많은 분회들도 노동조합 힘이 약해지면서 다시 사납금제를 부활시켰다.

이에 반해 H분회는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유씨는 그에 일조했다는 자부심이 크다. 대의원으로 시작해 대외협력부장, 조직부장을 거쳐 그는 2010년 9월부터 분회 사무장을 맡고 있다. 처음에 분회장이 "형님이 적임자"라면서 사무장을 제안할 땐 걱정했단다. 다른 것보다도 '컴퓨터'의 '컴'자도 모르는데 사무장 역할을 잘 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사무장 1년쯤 했더니 이제 이메일도 주고받고 엑셀도 좀 한다. 사무장을 안 했다면 아마 평생 컴퓨터 쪽은 쳐다보지 않았을 거다. 아래 세대 동생들과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춰가는 것 같아서 뿌듯하다.

물론 노조 간부일이 쉽지만은 않다. 전임이 아니다. 택시를 몰면서 간부일도 같이 한다. 노동조합 사무실에 낮 12시쯤 출근해서 저녁 7시쯤까지 조합 업무를 본다. 밤 8~9시쯤 택시를 끌고 나가 새벽 4시에 교대한다. 지하철 첫차가 오는 새벽 5시 반까지 회사에서 기다렸다가 집에 아침 7시쯤 도착한다. 바로 잠이 오지 않아 8, 9시쯤 자면 수면시간은 늘 3시간 남짓. 3시간이라도 푹 자면 좋을 텐데 그게 맘처럼 잘 안 된다. 피로가 쉬이 가시지 않는 나날이다. 그래도 그는 '나 아니면 누가 조합을 챙길까' 생각하는 사명감 높은 사무장이다.

한 때, 유씨는 '비정규직이라도 옛 회사로 돌아갈 걸 그랬나'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택시기사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손님들로부터 말 못할 고충도 많이 겪는 직업이다. 택시 운전대 잡은 지 15년, 그가 그동안 만난 '진상 손님'들에 대해 책을 쓰자면 대여섯 권은 충분히 나올 게다. 어려운 점 많지만 그래도 여전히 정을 전해주는 손님들도 꽤 있다. 보람을 느낀다. 요즘 언론에서 '죽음의 기업'으로 옛 회사가 소개되는 걸 볼 때면 그때 가지 않은 게 다행이다 생각한단다.

노동조합 활동에서 보람 찾아

유씨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바로 아이들이다. 딸은 고등학교 내내 방학마다 알바를 하면서 자기 용돈을 벌었다. 얼마 전 대학 수시모집에 합격했다. 딸아이는 방송PD를 꿈꾸고 있다. 등록금 마련할 걱정에 싸인 아빠를 돕겠다며 지금도 알바 중이다. 저녁엔 편의점에서 일한다. 편의점에 오가던 동네 아주머니 소개로 오전부터 낮까진 고양이를 돌본다. 백만 원을 호가하는 비싼 고양이들이다. 종종 고양이에 할퀴기도 하지만 시급이 편의점보다 세다. 고양이가 사람보다 대접받는 세상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딸이 알바비로 사다준 내복을 받고 그는 감격했다.

열네 살부터 별별 고생을 다한 아들도 어엿하게 자리를 잡았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까지 따고 지금은 방송통신대에 갈 고민 중이다. 10여 년 사글셋방을 전전하던 그의 가족은 3년 전에야 전셋집으로 옮겼다. 올해 6월엔 아예 집을 장만했다. 아들이 남의 집살이 그만두고 외곽에 빌라라도 사자고 마련했다. 그는 1천만 원밖에 보태지 못했다. 그나마도 두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거다. 택시기사 월급으로 대출받을 수 있는 최대치였다. 나머지는 은행 대출을 좀 보태서 아들이 마련했다. 아들이 늘 안쓰러웠는데 이젠 그저 대견하다. 사실 유씨는 퇴직금이라도 미리 끌어 쓰려고 했다. 아들은 "지금 월급으로 저축도 못하고 있는데 퇴직 후에 그거라도 없으면 아빠는 어떻게 사냐"며 말렸다.

그는 쉬는 날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애들이 들어오면 자기 방으로 들어와 텔레비전을 켰다. 요즘 애들은 연예인 나오는 프로그램들을 좋아한다는데 자신이 다큐멘터리나 시사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아이들이 보고 싶은 걸 못 볼까봐 걱정했다.

어느 날, 아들이 회식을 하고 좀 늦게 들어왔다. 술기운으로 그에게 물었다.

"아빠, 아빠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시다가도 왜 저희만 오면 방으로 가세요? 저희가 불편하세요?" 
"너희들 배려한다고 그랬지…."
"그거 싫어요. 우리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든 아니든 같이 보면서 대화하는, 가족이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아요."

요즘 애들 같지 않고 듬직한 아이들을 보면서 그는 생각한다. '애들을 끝까지 지켜서 지금껏 키운 게 내복으로 왔구나'라고. 그래서 요즘은 경제적으로는 조금 힘들긴 해도 행복하다. 이제 좋은 여자친구 한 명만 만나면 될 것 같다. 유씨는 아직도 자신과 아이들이 똑같은 상처를 겪을까봐 재혼이 두렵다. 하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다보면 그 상처도 치유되지 않을까 희망도 갖는다.

아이들이 내 복으로 자라줘

지난 15년이 가져온 변화다. 처음 막막한 마음으로 발을 내딛었던 H운수 옆엔 어린 느티나무가 있었다. 지금은 한아름 끌어안아도 팔이 모자랄 정도로 굵어졌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품이 넉넉해지지 않았다. 지난 15년 동안 손님이 가장 많았던 게 아이러니하게도 IMF때다. 이후엔 계속 손님이 줄어들기만 했다. 지금은 장거리 손님도 별로 없다. 인심도 각박해졌다. 길이라도 좀 모르면 바로 "택시기사가 길도 모른다"는 면박이 날아온다. 욕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손님들 입에선 연신 "살기 힘들다"는 소리만 나온다.

IMF를 극복한 지 오래라고 하는데, 택시에서 만나는 밑바닥 민심은 IMF때 보다 더 어려운 요즘이다. 카드대란, 금융위기가 또 오고 있다는 느낌이 자꾸 든다. 지난 세월 아이들과 어렵게 일군 작은 행복이 깨질까봐 유씨의 택시는 여전히 불안하게 거리를 달린다.

덧붙이는 글 | 월간 <노동세상> 1월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IMF, #택시,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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