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한국전쟁 이후 폐허된 마을 터에 도시민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은 새유토마을. 영암 국사봉 아래 자리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된 마을 터에 도시민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은 새유토마을. 영암 국사봉 아래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공해와 소음으로 찌든 도시에서 벗어나 농촌에서 살며 토종 약초를 심고 가꾼다. 생각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결코 꿈이 아니다.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산골로 들어와 '유토피아'를 만들고 있는 사람과 마을이 있다. 전라남도 영암군 금정면 연소리 '신유토마을'이 그곳. 국립공원 월출산과 강진·장흥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국사봉(國師峰·613m)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회관을 뒤로 하고 산길을 오른다. 비좁은 시멘트 길을 따라 마을 어귀에 다다르니 풍광이 아름답다. 한껏 멋을 낸 단층집들이 원시림과 조화를 이루며 옹기종기 모여 있다.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도 허투루 다루지 않았다. 자연의 실용성을 그대로 담았다. 한 폭의 풍경화다.

그 풍광에 취한 채 마을에 들어서서 또 한 번 놀랐다. 계곡물이 졸졸졸 흐른다. 한 줄기 바람도 대숲에 스쳐 교향곡을 연주한다. 마당 연못엔 갓 깨어난 올챙이들이 한가로이 노닌다. 뒤뜰은 된장, 고추장을 가득 품은 항아리로 빼곡하다. 바로 옆 뱀바위에 걸쳐있는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광도 멋스럽다.

마을 대숲에 자리하고 있는 항아리들. 된장과 고추장을 가득 담고 있다.
 마을 대숲에 자리하고 있는 항아리들. 된장과 고추장을 가득 담고 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새유토마을에 가장 먼저 터를 잡은 박말녀씨. 경기도 성남에서 내려왔다.
 새유토마을에 가장 먼저 터를 잡은 박말녀씨. 경기도 성남에서 내려왔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귀신나올 것 같던 마을'...그로부터 60년 지난 지금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곳은 평온한 산골 마을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천혜의 지리적 여건은 아이러니하게도 빨치산 사령부를 불러들였다. 전쟁의 광풍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갔다. 전쟁이 끝난 뒤 빨치산을 도왔다는 이유로 초토화됐다. 마을주민들은 정든 고향을 등져야 했다. 주민이 떠난 마을은 폐허로 변했다. 주변 마을 사람들조차 '거기엔 귀신이 나온다'며 접근을 피할 정도였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지금, 이곳에 새로운 마을이 들어서고 있다. 그 중심에 마을 대표를 맡고 있는 박말녀(55·여)씨가 있다. 그녀가 이곳에 들어온 건 지난 2003년. 경기도 성남에서 자영업을 하던 그녀는 교통사고로 1급 장애를 입은 딸을 위해 이곳에 내려왔다.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을 찾아 전국을 헤매다가 우연히 이곳을 만났다.

그녀의 남행 길엔 장애인 자녀를 둔 세 가정이 동행했다. 이들 역시 소외된 삶에서 벗어나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희망을 꿈꿔오던 터였다. 하지만 불모지인 산 중턱에 새로운 마을을 만들기란 녹록지 않았다. 물은 고사하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맨손으로 집터를 다지고 끊긴 도로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다리가 부러지고 지네에 물리기도 했다. 온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어갔다.

박씨는 "천막을 지어놓고 살다가 뱀이 나와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공사 중에 다리가 부러지거나 지네에 물린 사람도 숱하게 있었다"면서 "하지만 이런 고생보다 속사정도 모른 채 '먼(무슨) 죄 짓고 농촌에 왔소', '혹시 북에서 넘어 온 사람들 아닌가'하고 말하는 이웃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그것까지도 그나마 참을 만 했다. 더 고통스러운 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겠냐"며 풀려다 만 짐을 챙겨 떠나는 이들이 생길 때였다. 서로를 위로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손수 지은 집들이 완성되고 끊겼던 전기와 전화를 끌어들였다. 제법 마을의 모습이 갖춰졌다.

새유토마을 풍경. 연못과 물레방아를 품은 주택이 멋스럽다.
 새유토마을 풍경. 연못과 물레방아를 품은 주택이 멋스럽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새유토마을 전경. 국사봉 아래에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했다.
 새유토마을 전경. 국사봉 아래에 터를 잡고 마을을 형성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도시병'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몸은 고달팠지만 변화는 자녀들에게서 먼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악화되어 가던 건강이 좋아지고 아토피와 천식 등 '도시병'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성격도 밝아졌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한 집 두 집 더 들어왔다. 어느새 10가구가 이사해 왔다. 은퇴자에서부터 교사, 디자이너 등 30대에서 70대까지 다양한 이들이 모였다.

서울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이주한 서준호(71)씨 부부는 "가족의 건강 때문에 내려왔지만 와서 보니 너무 좋다"면서 "매일 산과 들에서 잠들고 눈부신 햇살에 잠을 깰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박산홍(17) 양도 "서울에 살 때는 아토피염으로 온 몸을 긁느라 밤잠을 설쳤는데, 이곳으로 이사 온 지 1년 만에 아토피가 깨끗이 나았다"며 "몸도 좋아지고 자연 속에서 살아 공부도 더 잘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이주를 희망하는 모든 이가 들어올 수 있는 건 아니다. 남을 위한 희생이 준비된 사람만 가능하다. "집이 다르고 사람도 다르지만 마을일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게 이 마을의 규칙이다. 자기 고집만 내세운다면 이 마을로 이사하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맘대로 집을 팔고 나갈 수도 없다. 마을 총회에서 결정이 나야만 떠날 수 있다.

곰보배추. 새유토마을의 소득원으로 자리잡았다.
 곰보배추. 새유토마을의 소득원으로 자리잡았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새유토마을 풍경. 주민들의 사연이 집 한 채에도 고스란히 묻어있다.
 새유토마을 풍경. 주민들의 사연이 집 한 채에도 고스란히 묻어있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그럼에도 이주를 희망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 지난해만도 6가구가 집을 새로 지었다. 마을사람들의 꿈은 마을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은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마을 공동의 수익구조를 만드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귀농 마을이 성공하려면 자체적인 소득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이를 위해 청정지역에서만 자라는 곰보배추 씨앗을 받아 재배하고 있다. 약초공원을 조성하고 약초연구회를 만들어 산과 들에 자생하는 약초를 재배·숙성시켜 상품화도 시켰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약초농사는 신 유토마을을 토종약초마을로 브랜드화해 소득창출로 연결짓는 밑거름이 됐다. 여기서 나오는 소득은 마을에 투자했다. 황토방을 만들고 자연 토굴을 이용한 약초 숙성실도 만들었다.

경관이 가장 좋은 곳에 길손 20∼30명이 하룻밤을 지낼 마을회관도 지었다. 지금은 마을회사 설립도 서두르고 있다. 세대별로 1000만 원씩 출자도 했다. 출자금으로 땅을 사 벼농사도 짓고 보리농사도 짓고 있다. 공동 경작이다. 여기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팔아서 공동 분배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신 유토마을은 지난 2009년 행정안전부가 주관한 '참 살기 좋은 마을 콘테스트'에서 2년 연속 최우수 마을 등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마을에서 주는 월급을 받는 게 작은 소망이라는 박말녀 마을 대표는 "새 유토마을은 산골의 작고 소중한 가치를 알려내며 넉넉하지 않더라도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마을주민들이 그리는 새 유토마을의 미래다.

새유토마을 전경. 도시를 떠나 내려온 사람들이 터를 잡았다. 행정안전부로부터 '참 살기 좋은 마을'로 선정됐다.
 새유토마을 전경. 도시를 떠나 내려온 사람들이 터를 잡았다. 행정안전부로부터 '참 살기 좋은 마을'로 선정됐다.
ⓒ 이돈삼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새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새유토마을, #귀촌마을, #박말녀, #영암, #국사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