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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10년은 과거 농본국가에서처럼 그렇게 긴 기간이 못 됩니다. 모든 게 속전속결로 진행되고 처리되는 풍토이기 때문입니다. 즉각적이고 찰나적 삶이 우리 생활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그와의 만남은 옛것을 생각나게 하고 찾게 만들었습니다. 삶에 여유를 갖게 만든 분도 그였습니다. 그분은 흉부 이하가 마비되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중증 장애인입니다.

2003년쯤으로 기억됩니다. 제가 충북 옥천의 두메산골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지역 신문에 간간이 칼럼을 연재하고 있을 때였는데, 옥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유정(榴亭) 조동호(趙東祜) 선생에 대해 글을 썼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쓴 글을 보고 유정의 장남 되는 분 조윤구 선생이 전화를 한 통 해왔습니다. 글을 잘 읽었다는 것과 그해 9월 10일 있을 선친의 추도식에 참석해서 기도 순서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전화 통화로 가늠해 보는 그분은 연치(年齒)가 그렇게 높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말에 힘이 있고 고저장단이 분명했습니다. 그를 처음 본 것은 그러니까 2003년 9월 10일이 됩니다. 유정 선생의 추도식은 하루의 오차도 없이 매년 같은 날(9월 10일) 열리고 있습니다. 그분을 처음 만나고 두 가지에 놀랐습니다. 먼저, 그분은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는 중증 장애인이었습니다.

두 번째의 놀람은 그분은 연치가 적지 않았음에도 목소리는 젊은이 못지않은 강고함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화로 통화하면서 제가 느낀 것보다 훨씬 많은 세월을 살아오신 분이었습니다. 아마 일제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한 선친 조동호 선생에게 가려 그분의 나이마저 낮춰 생각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날 추도식 앞머리에 잡혀있는 기도 순서에서 저는 풍찬노숙하며 조국 독립의 일념으로 생을 마감하신 유정 선생의 유지가 계속 이어질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유정 선생의 추도식은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안에 있는 독립관에서 줄곧 거행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2008년인가 고향인 옥천에서 열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 의견을 처음 낸 분도 장남 조윤구 선생이었습니다. 조 선생은 유정의 장남으로서 기념사업회 상임이사를 맡아 실질적으로 추도 사업을 이끌어 왔습니다. 고향에서의 추도식은 의미만큼이나 여러 가지 어려움도 따랐습니다.

장소와 강사 및 초청장 발송 대상자들부터 여느 해와는 달랐습니다. 장소는 옥천다목적회관 강당으로, 추도식이 끝난 뒤 저녁식사는 읍 사무실 구내식당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옥천군수와 군 의회 의장, 청주 보훈지청장이 조사와 인사말을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추도식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장소를 달리하여 처음 고향에서 거행하는 추도식이어서 가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고향에서 선친 추도식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참석해서 고향 출신 독립운동가를 추모했습니다. 조윤구 선생도 흐뭇해했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제 마음도 가벼웠습니다. 저는 추도식 광경을 한 신문에 '독립운동가의 금의환향'이란 제목으로 글을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농촌에서 목회하는 우리 교회를 방문하고 예배를 드린 뒤 앞 마당 잔디밭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 농촌 교회인 덕천교회를 방문한 조윤구 선생 내외 불편한 몸을 이끌고 농촌에서 목회하는 우리 교회를 방문하고 예배를 드린 뒤 앞 마당 잔디밭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 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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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구 선생의 선친인 독립운동가 유정 조동호 선생에 대해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조동호 선생의 호는 유정(榴亭)입니다. 1892년 충복 옥천에서 출생해서 1954년 돌아가셨습니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기관지 <독립신문> 창간 동인, 한중호조사와 한국노병회 창립 등 중국에서의 항일운동에 참여했습니다. 1923년 귀국해서 조선공산당에 조완구 신채호 김두봉 등과 함께 가입, 출판부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유정은 또 독립운동에 언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당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하여 몽양 여운형 선생을 사장으로 모시고 항일 논설을 집필하며 언론으로도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유정은 몽양의 독립 노선에 동의하고 그와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일제 말 조선건국동맹의 군사위원회에서 일하다가 해방 뒤에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선전부장을 맡아 활동했습니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완전 독립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54년 9월 11일 고향인 옥천군 청산면에서 60여 성상의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이런 유정 선생은 독립운동가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여운형의 사회주의 계열에 속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의 독립운동은 몇 개의 노선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본다면 민족주의 계열, 사회주의 계열, 무정부주의 계열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세 개의 흐름을 필요에 따라 넘나들며 항일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유정 조동호 선생을 굳이 이 세 개 중 하나에 귀속시킨다면 여운형 선생과 함께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 노선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랜 시간 유정 선생에게 굴레로 작용했습니다. 사회주의 심지어는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라는 이유로 그는 서훈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고친 분이 유정의 장남 조윤구 선생입니다. 그는 중증 장애인의 몸으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보훈청, 국회의사당 등 관계되는 기관이라면 찾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의견이 수용될 때까지 수십 번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 갔습니다. 독립운동 관련 서적이란 서적은 거의 빼지 않고 독파해 그 분야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갖고 있어서 대화하는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선친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근현대사를 바로 잡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극한 정성은 사람뿐만 아니라 하늘도 감동시켜 마침내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3월, 유정 선생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받고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모셔졌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조윤구 선생의 불굴의 의지가 큰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조윤구 선생의 성실한 자세와 숭고한 뜻이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를 역사 위에 동승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조 선생은 소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고향 옥천에 아버지를 추모하는 공원을 만드는 것이 그것입니다. 땅을 사서 나무를 심고 돌을 박은 가운데 아담한 공원을 조성해서 가운데 선친 유정 조동호 선생의 늠름한 동상을 세우는 게 그의 마지막 꿈이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시세에 훨씬 밑돌게 집을 파는 등 재정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라는 딱지는 고향 인심에도 영향을 미쳐 일부 반대 여론으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거역하는 마음들입니다.

국화로 장식된 빈소 앞에 십자가 상을 하고 있는 붉은 꽃이 보이고 위패엔 '집사 조윤구'라고 되어 있다.
▲ 조윤구 선생의 빈소 국화로 장식된 빈소 앞에 십자가 상을 하고 있는 붉은 꽃이 보이고 위패엔 '집사 조윤구'라고 되어 있다.
ⓒ 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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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2일 밤 11시가 넘은 시각이었습니다.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늦은 시각에 제게 오는 전화는 긴급을 알리는 전화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전화를 한 사람의 목소리가 좀 떨리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슬픈 기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는 늦은 시간에 죄송하다면서 조윤구 선생의 별세를 알렸습니다. 저는 마음이 착 가라앉는 기분을 느껴야 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몰려오는 슬픔과 아쉬움 그리고 남은 여러 가지 가로 놓여 있는 일들이 뇌리에 착종(錯綜)했습니다.

조윤구 선생은 향년 74세입니다. 예전 같으면 천수를 누렸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길지 않은 일생입니다. 그의 삶을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그는 39세 때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 뒤 가슴 아랫부분이 마비되어 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주위의 도움을 받으며 반평생을 장애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대단한 의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조 선생을 그림자같이 따라 다니며 보살핀 부인 김용성 권사님의 노고는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조 선생의 부음을 들은 날 밤, 늦은 시각임에도 옥천의 몇몇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서울로 조문을 가기 위해 아침 일찍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13일 정오로 잡혀 있는 입관예배에 참석해서 조 선생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기차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데, 조 선생의 부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출석하는 교회 교구 목사님이 일이 겹쳐 정오 입관예배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 저보고 입관예배를 좀 드려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겨우 시간에 맞춰 장례식장에 도착했습니다. 국화 향기 진동하는 빈소 영정 앞에서 아내와 함께 조문을 했습니다. 조 선생의 영정 사진은 국립현충원의 선친 '애국지사 조동호'의 묘지석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선친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삶을 존경한 아들을 상징적으로 집약해 놓은 사진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아내와 함께 하얀 국화 한 송이를 영정 앞에 갖다 바쳤습니다.

유족과 함께 입관실로 가서 잠든 조 선생을 뵈었습니다. 저는 조 선생의 누워 있는 모습을 처음 봅니다. 늘 그분이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만 봤습니다. 두 다리를 쭉 펴고 누워 있는 조 선생이 그렇게 키가 큰 줄 몰랐습니다. 한 장애인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20대가 되기까지 휠체어만 의지해서 살아오다가 각고의 재활 치료 끝에 20대 중반부터 목발을 짚고 생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세상이 달리 보이더라고 했습니다. 휠체어에 앉은 눈으로 보는 세상과 비록 목발이지만 서서 보는 세상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줄 몰랐다며 고백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조윤구 선생은 그와 대조되는 생활을 했을 테니까 삶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39세 때 닥친 교통사고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 갔습니다. 하지만 그 답답함과 불편함을 그는 신앙생활로, 정의를 좇는 삶으로 대체했으니 참으로 돋보이는 삶을 살다 가신 것입니다.

이제 조 선생이 매달 보내 주던 일일 묵상집 <일용할 양식>을 더 이상 받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보내주는 정성에 값하지는 못했지만 매달 초가 되면 그것이 기다려질 것입니다. 그때마다 조윤구 선생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의 따뜻한 마음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조윤구 선생은 이젠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만 그분을 떠올리면서 나는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을 것입니다. 슬픔 가운데에서도 작은 소망을 가지며 조 선생의 안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태그:#조윤구, #독립운동가, #중증장애인, #유정 조동호, #충북 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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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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