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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쉬는 시간 동안 친구들이 책을 놓고 밖에 나가 있다
▲ 교실의 쉬는 시간 잠깐의 쉬는 시간 동안 친구들이 책을 놓고 밖에 나가 있다
ⓒ 김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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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등학생이다. 기말 시험이 끝났다. 맘이 맞는 친구들끼리 모여 교문 밖을 나선다. 그리고는 노래방으로 향한다. 게임방으로 향한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콘크리트 건물에서 온종일 공부만 하던 우리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다시 어두운 골방으로 들어간다. 두 시간 남짓의 열창이 끝나면 서로 묻는다.

"우리 이제 어디 가지?"

이런 시간이라도 보내는 친구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다. 시험이 끝나면 부모님 차를 타고 집으로 바로 돌아가는 친구들도 있다. 그 친구들에게는 골방에서의 열창도 사치다. 많은 친구들이 "수능만 끝나면"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엄마 차에 실려 집에 돌아갔던 그 친구들은 수능이 끝나고도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아니,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까?

경쟁을 유도하는 학교에서 10대를 보낸, 우석훈 박사의 말대로 "신자유주의를 육화시킨" 친구들이 졸업하면 노는 것마저 처절한 경쟁이 된다. 내가 아는 많은 선배들은 모이면 술을 마신다. 누구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마신다.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술이 대화의 도구가 아니라 모임의 목적 그 자체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술을 누가 더 많이 마시나' 하는 경쟁이 끝나면 피곤한 몸을 이끈 채 집으로 향한다. 중고등학교 6년 동안 학교는 그 선배들에게 다양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을 체화시켰지만, 정작 노는 법은 알려주지 않았다. 혼자 노는 법은 고사하고 함께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것조차 그들에게는 어렵다. 노는 것은 교육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친한 누나랑 통화를 했다. "남자친구도 스펙"이라는 대학교 룸메(룸메이트)의 말에 가치관의 혼란이 온다면서, 자신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두 명의 남자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그 룸메의 말에, 주변 친구들은 "네가 잘못했어"라는 말 한마디 못하고 동조했다고 한다. 그들에겐 관계조차, 숫자로 판가름되는 경쟁이다. 연애라는 즐거운 놀이도 상대방의 '레벨'에 따라 질이 달라지는 숫자놀음이 되는 것이다.

선배들이 공허한 대학생활에서 느낀 무력감은 결국 사람의 만남에 인간관계가 빠져 있다는 아이러니에서 나온다. 타인과의 지속적인 만남 속에서 사람 간의 유대감은 사라지고, 단순히 같이 있다는 사실만 남는다. 같은 시공간 속에서 웃으며 떠들지만, 같은 생각을 공유하지는 못한다.

협동보다 경쟁이 편한 우리, '노는 교육'을 원한다

대신 만남 속에서 내가 타인들보다 우월한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 노력한다. 고등학교 3년 동안의 처절한 무한 경쟁은 상대방에 대한 인간으로서 기본적 예의를 잊게 하였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든지 의식적으로든지 만나는 친구들을 끊임없이 경쟁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물론 모든 경쟁이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경쟁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치는 몸부림이라면 그건 너무 슬픈 일이다. 모든 친구들이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내 주변의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인정받는다. 나조차 이것을 느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경쟁이 체화된 우리는 함께 조율하고 결정하는 협동보다도 혼자 하는 레이스인 경쟁이 더 편하다. 그건 우리 세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이고, 누구를 쉬이 탓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혼자 뛰어나다고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다. 혼자 잘났다고 해서 재미있을 수가 없다. '같이 있다'라는 느낌을 받아야 하고 감정의 교류에서 오는 즐거움을 느껴야 한다. 인간관계에 그게 전제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쉽게 모였다가 흩어진다. 헤어지고 나면 외로워진다.

학기말고사가 끝났다. 나와 친구들은 시험 후의 일상이 되어버린 '건대 앞 노래방 코스'를 벗어나길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우리는 오랜만에 축구를 했다. 답답한 의자와 책상 위에서의 경쟁이 아니라, 야외에서 힘을 모아 뛰어노는 경쟁을 했다. 그렇게 격렬한 운동으로 피곤해진 몸을 이끌고 찜질방에 가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다. 친한 친구이지만 서로를 밀어내던 얇은 장막마저 걷어버리고 자신을 스스럼없이 보여주었다. 집에 오니 몸은 피곤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친구들과 모임 뒤 느꼈던 허탈한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내 또래 많은 친구들이 '감정의 공유가 전제된' 놀이와 만남의 방법을 아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과 기회 자체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런 '노는 교육'을 학교에서 제공하면 어떨까? 무엇을 가르치는 것만이 교육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게끔 자신만의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도 교육이라 한다면, 학교에서도 충분히 '노는 방법'을 교육할 수 있을 듯하다.

경쟁 끝에 느끼는 성취감보다 함께 있을 때 느끼는 따뜻함이 더 큰 기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은 10대 20대가 공유할 때, 무한 경쟁 체제에 조그마한 균열을 내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태그:#경쟁, #교육, #외국어고등학교, #놀이 교육, #신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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