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문소리

'스파이' 문소리 ⓒ 스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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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대를 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영화 <스파이> 말이다. 딱 봐도 너무 뻔해 보였다. '작전은 완벽했다. 그들이 끼어들기 전까진' 이라는 헤드카피는 식상했고, 한 물간 장르인 초대형 코믹첩보액션을 들고 나온 것은 감을 잃어버린 듯했다. 게다가 주연은 요즘 들어 갑작스레 다작을 하고 있지만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데는 버거워하는 듯한 설경구다.

코믹액션 장르는 한국 관객들에게는 지겨울 정도로 익숙하다. 그동안 한국 영화계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같은 덩치 큰 액션물을 만들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섬세한 액션, 디테일한 CG, 리얼한 특수효과를 창조해내는 데에는 자본을 바탕으로 한 테크닉이 필요한데, 한국에서 그 테크닉이 자라난다는 것은 전반적인 환경 상 쉽지 않은 일이다.

액션의 코믹화는 이를 위한 돌파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00% 리얼로 가기엔 여러모로 부족한 상황의 열악함을 슬쩍 숨길 수 있으면서, 동시에 관객들에게 재미를 선사할 수 있는 혼합장르. 엉성한 액션을 코미디로 채워 넣었고, 조악한 기술을 웃음 바이러스로 무마시키는 것이다. 한해 두해 지내다 보니 어느덧 충무로는 대박 코믹액션작을 만들어내는데 노련해지기 시작했고, 이를 한국형 블록버스터로 속하기에 이르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이름 아래 개봉한 코믹액션 영화들은 쏠쏠한 재미를 봤다. 킬링타임용으로 이만한 게 없고, 진지한 영화를 꺼려하는 이들에게는 안성맞춤이었으니까. 하지만 맛있는 오징어도 오래 씹으면 턱이 아프고 쓴 물이 나오듯, 한 장르의 영화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게 되면서 관객들은 지루함과 식상함을 느끼게 되고, 그것은 더 나아가서 외면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영화 <스파이> 포스터

영화 <스파이> 포스터 ⓒ CJ엔터테인먼트


그런 상황 속을 헤집고 나온 영화가 바로 <스파이>다. 그것도 대목인 추석을 앞두고 개봉한다. 획기적인 스타일, 이채로운 장르, 더욱 덩치가 커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맞서기에는 가진 것이 빈약한 영화 <스파이>. 이 작품 역시 맥없이 잊혀 가는 그저 그런 코믹액션 영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더군다나 감독이 신예 이승준이다. <해운대> <퀵>의 조감독 시절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의 실력을 쌓았을 것이기는 하나, 감독이 되어 데뷔작을 만들어내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은가. 영화는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신인 감독의 표현법이 간간히 신선함을 안겨주기는 했지만, 코믹액션 장르를 다루는 노련함은 아직은 부족한 듯싶었다. 정리가 되지 않은 듯 어수선한 장면들이 보는 내내 걸렸다.

스파이 철수를 연기한 설경구의 연기는 이번에도 안정감을 보여주긴 했다. <공공의 적> <강철중>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관객들에게 확연히 다른 느낌을 심어주었는지에 대해서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연기를 못한 적이 없는 배우 설경구지만, 한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에게 숙제로 남아 있다.

 영화 <스파이>의 한 장면.

영화 <스파이>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이 작품을 살린 배우는 다름 아닌 문소리다. 사실 <스파이>는 문소리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 했을 영화다. 그녀는 죽어가는 에피소드를 되살리는 저력을 뽐냈고, 맥없이 흘러가는 코믹액션에 숨을 불어 넣은 연기를 보여줬다.

문소리가 맡은 영희라는 캐릭터는 한 마디로 웃긴 여자다. 결혼한 지 7년이 되어도 아이를 못 갖는다는 구박을 시어머니로부터 들어야만 하는 며느리. 남편이 그저 평범한 샐러리맨이라고 여기면서 바가지를 긁는 속없는 아내. 나이에 비해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약간은 철이 없어 보이는 스튜어디스. 빈틈도 많고 허당이며 어수룩함 투성이인 캐릭터다.

잘 넘어지고, 바보처럼 웃고, 멍청하게 눈동자를 굴리면 그것으로 제 몫을 다했다고 치부될 수 있는, 어쩌면 연기의 진가를 보여주기 정말 힘든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소리는 이러한 캐릭터를 가지고 연기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만다. '역시 문소리구나!', 이 철부지 캐릭터를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녀가 연기하는 모든 장면은 그야말로 빵빵 터진다. 절대로 웃기가 곤란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문소리는 무척이나 세련된 수법으로 웃음의 코드를 잡아낸다. 코믹연기의 아이콘인 고창석마저도 이번만큼은 그녀에게 두 손을 든 듯하다.

웃기는 캐릭터를 정말 웃기게 그려내는 연기야말로 어려운 일이 아닐까. 그것도 여배우가, 더군다나 코믹 캐릭터를 거의 해본 적이 없는 문소리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만약 문소리가 아닌 다른 여배우가 영희를 맡았다면, 그녀의 생명력 있는 연기가 없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보니 고개가 저절로 흔들어진다. 추석 때 볼만한 영화로 <스파이>를 추천할 수 있는 건 오롯이 그녀 덕분일 테다.

덧붙이는 글 DUAI의 연예토픽,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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