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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 그림 왼쪽 하단 돈화문 주변에서 회화나무를 찾을 수 있다.
 <동궐도>. 그림 왼쪽 하단 돈화문 주변에서 회화나무를 찾을 수 있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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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나무는 한자로 괴화(槐花)나무라 표기한다. '괴화'의 중국어 발음이 우리말 '회화'와 비슷해 회화나무 또는 홰나무로 불리게 됐단다. 한자 표기 중 괴(槐)자는 귀신(鬼)과 나무(木)가 합쳐진 글자다. 때문에 이 나무가 잡귀를 물리친다는 속설이 생겨 집이나 궁궐에 널리 심어졌다.

회화나무는 학자수(學者樹)로도 알려져 있는데, 중국 주나라 때 선비를 의미하는 사(士)의 무덤에 회화나무를 심은 데서 유래한다. 콩과에 속하는 회화나무는 음력 7월께 연한 황색의 꽃을 피운다. 당나라 때에는 회화나무 꽃이 필 무렵 진사 시험을 치렀다. 이런 이유에서 옛 사람들은 과거시험을 치르거나 합격했을 때에도 집안 마당에 회화나무를 심곤 했다.

최대 25미터 높이까지 자라는 회화나무는 한국·중국·일본에 분포한다. 우리나라의 회화나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경상북도 의성군 도서동 회화나무(경상북도기념물 제2호)로 수령이 600년이 넘는다. 1919년에 간행된 <조선노거수명목지>에 따르면 의성군 도서동 회화나무는 당시 조사된 208개의 회화나무 중 가슴 높이 둘레가 남북을 통틀어 가장 큰 나무였다고 한다.

나랏일 논할 때 빠지지 않았던 게 바로 회화나무

창덕궁 돈화문 안마당 회화나무. 돈화문 안마당에는 여덟 그루의 회화나무가 있다.
 창덕궁 돈화문 안마당 회화나무. 돈화문 안마당에는 여덟 그루의 회화나무가 있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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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에서도 어렵지 않게 오래된 회화나무를 만날 수 있다. 이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창덕궁 회화나무(천연기념물 제472호). 창덕궁 돈화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늘어선 우람한 회화나무들이 느티나무와 어울려 찾는 이들을 반긴다.

창덕궁 회화나무 안내문에 따르면 '궁궐 정문 안쪽에 괴목(회화나무와 느티나무)을 심고 그 아래에서 삼공(三公)이 나랏일을 논했다'는 중국의 고사에 따라 심어진 것이라 한다. 1830년께 그려진 동궐도에도 등장하는 창덕궁 회화나무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궁궐을 새로 지으면서 심은 것으로 그 수령이 300~400년을 헤아린다.

창덕궁 말고도 서울 도심에는 아름다운 자태와 갖가지 사연을 간직한 회화나무가 여럿 있다. 그중 수령 500년을 넘긴 회화나무가 세 그루 있는데, 이들 나무는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 나이테만큼이나 많은 이야깃거리를 켜켜이 간직한 채 지금도 푸르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초의 태극기 게양을 지켜본 나무

우정총국 앞 회화나무. 이곳 회화나무 옆 게양대에 태극기가 최초로 걸렸다고 전해진다. 고목이 됐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회화나무
 우정총국 앞 회화나무. 이곳 회화나무 옆 게양대에 태극기가 최초로 걸렸다고 전해진다. 고목이 됐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하는 회화나무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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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창덕궁에서 멀지 않은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있는 회화나무를 찾아가 보자. 우정총국(郵征總局) 앞에 서 있는 견지동 회화나무는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우정총국 완공 축하연회 때 벌어진 갑신정변의 현장을 가까이서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갑신정변 말고도 이 회화나무는 태극기와 관련된 특별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태극기가 만들어진 것은 1882년 8월 박영효가 임오군란 사죄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으로 가던 배 안에서였다.

"박영효가 탄 배는 일본 국적의 메이지 마루란 배였는데 선장은 영국인 제임스였으며 조선주재영국총영사 애스턴도 동행했다. 박영효는 애스턴과 조선 국기에 관해 협의했는데 애스턴은 세계 각국을 돌아다닌 제임스를 추천했다. 제임스는 마건충(청나라 사신)의 도안대로 8괘가 다 들어가면 복잡해 다른 나라 사람들이 따라 그리기가 힘들다고 충고했다. 이에 따라 태진손간 4괘를 들어내고 건곤감리 4괘만 남기면서 상하좌우에 있어야 할 정괘를 45도 왼쪽으로 돌려버린 태극기가 탄생했다."(<한국근대사 산책1> 270쪽)

1883년 3월 6일 고종은 조선을 상징하는 국기로 태극기를 정식 반포했다. 이듬해 조선은 태극기를 널리 홍보하기 위해 태극기 도안을 넣은 우표 다섯 종, 총 280만 장을 일본에 제작 의뢰했다. 제작을 의뢰받은 일본은 네 귀퉁이의 4괘를 삭제하고 태극 문양도 중국의 태극 문양으로 바꿔 마치 조선이 중국의 속국으로 이해되도록 우표를 인쇄해 보냈다.

이처럼 태극기는 주변 열강들과의 외교적 각축 속에서 탄생한 조선의 상징물이다. 이렇게 탄생한 태극기를 처음 게양했던 곳은 어디였을까. 바로 우정총국 회화나무 옆 국기게양대다.

1884년 서울을 기행한 일본인 오비(小尾直藏)는 1885년 2월 도쿄에서 <조선경성기담>(朝鮮京城奇談)을 펴낸다. 오비는 이 보고서를 통해 "우정국 구내에는 매일 국기를 게양했는데, 그 높이가 2장(약 6미터) 남짓"이며 "조선 국내에서 국기를 게양한 것은 이것이 효시"라고 적었다. 그리고 우정국 구내에는 수령 500~600년 된 고목이 한 그루 있는데 이 나무 곁에 태극기를 게양했다고 덧붙였다.

망국의 그날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나무

캐나다대사관 앞 회화나무. 중구 보호수인 이 나무는 수령 520년이 넘는다.
 캐나다대사관 앞 회화나무. 중구 보호수인 이 나무는 수령 520년이 넘는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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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이 있는 정동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공간이다. 정동이 구한 말 외교의 중심지로 떠오른 것은 1883년 4월 조선 주재 미국 초대공사 루셔스 하우드 푸트(Lucius H. Foote)가 입국해 미국 공사관과 사택을 경운궁(덕수궁) 옆에 세우면서부터다.

미국 공사관을 시작으로 영국·러시아·프랑스 공사관이 차례로 자리를 잡으며 정동은 외교 공관이 밀집된 지역으로 탈바꿈했다. 특히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정동은 정치의 1번지이자 외교의 각축장이 됐다.

한국 근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이곳에도 오래된 회화나무가 한 그루 있다. 지하철 시청역에서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걸어 올라가다 정동극장과 예원학교를 지나면, 인도 한가운데 서 있는 오래된 회화나무를 만날 수 있다.

서울시 중구 보호수로 지정(지정일자 1976년 11월 17일)된 이 회화나무는 높이가 17미터이고 둘레는 5.16미터에 달한다. 나무 옆 안내판에는 이 나무의 나이가 520년이라고 적혀 있다.

이 회화나무 바로 옆에는 캐나다 대사관이 있다. 언뜻 봐도 회화나무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건물을 안쪽으로 들여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회화나무를 보호하려는 캐나다 대사관의 배려가 인상적이다.

하지만 캐나다 대사관이 신축되기까지의 내력을 알게 되면 아쉬움이 남는다. 캐나다 대사관이 이곳 정동에 신축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정부가 용적률을 300%에서 400%로 완화시켜줬기 때문이다. 이 같은 용적률 변경은 1997년 캐나다 정부가 오타와 지방문화재인 고옥을 헐고 한국 대사관을 건립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에 대한 응답이었다고 한다. 사정이야 어찌 됐든 덕수궁을 비롯해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이 인접한 이곳에 8층짜리 대사관 건물을 지은 것은 아무래도 아쉽다.

이 나무, 김종서 장군의 최후도 봤을까

농협중앙회 뒤편 회화나무. 원래 위치는 사진 오른쪽 건물 있는 곳이었으나 198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심었다.
 농협중앙회 뒤편 회화나무. 원래 위치는 사진 오른쪽 건물 있는 곳이었으나 198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심었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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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한미관계만큼이나 중국과의 관계가 중요했던 조선시대. 한양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는 서대문(돈의문)과 의주로였다. 이런 영향으로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 철도가 처음 개통됐을 때의 시발역은 서울역(당시 남대문정거장)이 아니라 서대문역이었다.

서대문역은 이화여자외국어고(서울 중구 순화동) 정문 부근에 있었다. 남대문 정거장이 남대문역으로 승격(1915년)되고, 1919년 3월 서대문역이 완전히 문을 닫으면서 그 역할을 서울역에 넘겨주기까지 서대문역은 한반도 철도의 중간 기착지이자 종착역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한강철교의 준공과 더불어 경인선이 1900년 7월 완전 개통되자 이곳에 호텔이 문을 열게 된다.

서대문에 정거장 호텔(스테이션 호텔)이 문을 연 때는 1901년 4월. 영국인 엠벌리가 운영했던 정거장 호텔은 1905년 프랑스인 마르텡이 인수해 그 이름을 애스터하우스(Astor House)로 바꿨다. 당시 몇몇 사람들은 마르텡의 한자 이름을 따 마전여관(馬田旅館)이라 불렀다 한다.

정거장 호텔이 있던 이곳에도 오래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정거장 호텔이 개업한 직후 미국인 사진여행가 엘리아스 버튼 홈즈가 이곳을 방문해 1901년 5~6월께 찍은 사진을 보면 기와집 뒤쪽에 우람하게 자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바로 이 나무가 현재 농협중앙회 뒤에 있는 회화나무다.

스테이션 호텔(정거장 호텔). 엘리아브 버튼 홈즈 일행이 1901년 5~6월께 스테이션 호텔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스테이션 호텔(정거장 호텔). 엘리아브 버튼 홈즈 일행이 1901년 5~6월께 스테이션 호텔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 명지대국제한국학연구소·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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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진 속에 등장하는 모습에 비해 키가 다소 작아졌지만 서대문 정거장 호텔 자리에 있는 회화나무는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나무의 현재 위치가 사진 속의 위치와 다르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농협중앙회는 안내문을 통해 "원래 (농업)박물관 뒤쪽에 심어져 있던 것을 1986년 대강당 신축 시 이곳으로 옮겨 심었다"고 설명해놨다.

안내문에 따르면 이 회화나무의 나이는 500년 정도. 그런데 만약 이 나무의 나이가 560년 정도 된다면, 김종서 장군의 최후를 지켜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은 김종서 장군의 집터였다. 가을 햇살을 머금은 회화나무는 제자리에 서 있을 뿐 말이 없다.


태그:#화화나무, #창덕궁, #우정총국, #캐나다대사관, #스테이션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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