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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교조 교사다. 한 때 전교조 교사라는 말이 자랑스러운 수사로 쓰일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이기적이고 과격한 교사 집단의 상징이 된지 오래다. 재밌는 것은 전교조를 잘 모르거나 전교조 교사를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조차도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하긴, 전교조 조합원인 나 자신조차 전교조라는 이름이 그 실체와는 전혀 다른 낯선 느낌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 책임이 일부 전교조 안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전교조는 아직도 내게 치열한 그 무엇이며, 그 이름에 값하기엔 난 아직 멀었다.  

1987년, 6월 항쟁이 있던 바로 그 해 나는 교사가 되었다. 꿈에도 그리던 교직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그 실체를 파악하는 데는 불과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전형적인 부패사학에서 첫 교단을 밟은 개인적인 불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교사는 교사가 아니었다. 교사는 교장의 명에 의해서만 학생을 교육할 수 있었고, 상당수 교장은 교육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물론 개인적인 성품의 문제만은 아니었기에 시대적 환경을 탓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학교에서 민주주의와 정의를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였다. 게다가 사립학교 교사는 재단의 종노릇까지 해야만 했다. 교사가 되기 위해 돈을 내고 줄은 서는 일은 하나의 상식이었고, 그런 열악한 교육환경의 최종 피해자는 학생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만약 나에게 전교조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나는 하루하루 죄를 짓는 기분으로 살았으리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다행히도 내가 첫 교단을 밟았던 바로 그해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전신인 전교협(전국교사협의회)이 탄생했고, 나는 그 우산 속에서 소낙비를 피하며 교육다운 교육을 모색할 수가 있었다. 학생들에게 자유와 정의를 가르치는 일도 일정한 한계 속에서나마 가능해졌다. 그런 점에서 나는 퍽 운이 좋은 교사였다. 물론 전교조 교사라는 이유만으로 억울한 누명을 쓴 일도 많았지만, 나는 교사로서 그런대로 행복했다. 

전교조와 관련한 가장 최악의 기억은 지난 대선 때였다. TV토론 중에 당시 박근혜 후보가 문재인 후보에게 왜 전교조 교사들과 친하게 지내느냐고 질타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어이가 없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솔직히 좀 창피했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할망정 그걸 말로 해버리다니?'

나를 부끄럽게 만든 대통령 후보께서는 대통령이 되자 한 술 더 떠서 해직교사의 조합원 자격을 박탈하지 않으면 노조설립을 취소하겠노라고 전교조를 겁박하고 나섰다. 엄연한 합법 단체인 전교조를 온 국민들 앞에 대놓고 미운 오리새끼 취급하는 것도 모자라 국제적인 스탠더드조차 모르쇠하고(모르쇠한 건지 정말 모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교육의 민주화와 교육정상화를 위해 애쓰다 삶의 터전을 잃은 해직교사들을 전교조의 울타리 안에서마저도 내치라고 한 것이었다. 만의 하나 그런 결정을 하더라도 그것은 정부의 간섭이 아닌 조합원들끼리의 토론과정을 거쳐서 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곧 평상심을 되찾았다. 세상 일이 다 그러려니 했다. 아니, 그런 생각도 없이 길가에 뒹구는 돌맹이처럼 무심해졌다. 매사에 치열하지 못한 내 성정 탓이었다. 그러다가 한 순간 진실이 나를 찾아왔다. 순정한 감성의 눈이 떠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출근길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길가에 쪼그려 앉은 채 마음의 수첩을 꺼내들었다.
            
이른 아침 출근길
이슬이 내린 줄 알았더니
꽃들이 울고 있더라.


무슨 슬픈 일이 있느냐
넌지시 물었더니
내가 울지 않아 대신 운다 하더라.


왜 내가 울어야 하느냐
다시금 물었더니
세상의 진실이 스러졌다 하더라.


민주주의가 도륙 났는데
아무도 곡(哭)하는 사람이 없어서
대신 울고 있다 하더라.


가랑잎 같은 아이들 하늘로 보내고
소나무 같은 선생님들 거리로 내몰고
이런 게 무슨 나라냐고
이게 무슨 얼어 죽을 교육대국이냐고
꽃들이 울고 있더라.


어스름한 저녁 산책길
빗방울이 떨어진 줄 알았더니
꽃들이 울고 있더라.


길가에 버려진 돌맹이들과 연대하여
내 대신, 꽃들이 울고 있더라.


-졸시, '꽃들이 울고 있더라.' 전문

그때 나를 찾아온 진실은 다름 아닌 '부끄러움'이었다. 치열하게 살아오지 못한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먼저요, 전교조 교사로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좋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하고 교육현장에서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또한 그 부끄러움의 실체였다.

그렇다. 나는 전교조 교사로서 누구보다도 아이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하다. 한 때 십 만 조합원을 자랑하면서도 아이들을 입시교육의 사슬에서 구해주지 못한 것이 부끄럽고 죄스럽다. 지금도 여전히 전교조는 아이들에게 희망의 등대가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전교조가 교사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는 이기적인 집단이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 질책만은 달게, 그리고 고맙게 받아들이고 싶다.
      
어제 나는 한 통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전교조 순천사립지회 지회장에 당선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내년이면 환갑인 사람이 무슨 지회장 출마냐고 아내의 지청구를 듣고 난 뒤의 일이었다. 솔직히 피하고도 싶었다. 2년 남짓 남은 정년까지 내가 맡은 아이들이나 잘 가르치고 싶었다. 그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돈에 영혼을 파는 인간은 되지 않도록 단속해주는 일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자위하고 싶었다.

솔직히 법외노조의 위기에 내몰린 전교조에서 활동가로 일하는 것이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등 떠밀게 한 것은 바로 그 두려움이었다. 그 부당한 두려움(나를 두렵게 하는 부당한 세력들을)에게 싸움을 걸고 싶어진 것이었다. 다음은 '출마의 변'의 일부 내용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도 춥고 을씨년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질곡의 역사 속에서 어렵사리 지켜낸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허물어질 것만 같은 참담하고 당혹스런 현실을 목도합니다. 그런가 하면 해직교사들의 값비싼 희생과 조합원들의 피와 땀으로 일궈낸 합법 전교조가 법외노조로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위기에 봉착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의 변화에 적극 대응하는 마음의 건강함을 잃지만 않는다면 말이지요.

다만, 뭔가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을 아주 떨쳐버리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동안 우리 전교조가 교육의 꽃인 아이들에게 과연 희망을 주는 존재였는지, 입시교육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갇혀 꼼짝할 수 없게 된 절망적인 현실에 오히려 안주해버린 것은 아닌지, 다른 이가 아닌 바로 내 영혼에게 묻고 따져 보는 시간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교육동지들의 진실어린 견책과 연대의 우정을 믿고 두렵고 부끄럽지만 힘을 내어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년이 불과 2년 남짓 남았지만 신이 난 홍안의 소년처럼 씩씩하게 달려가겠습니다.'

지회장 당선 통보를 받고 나는 기분이 좋았다. 남들보다 7년이나 뒤진 서른 네 살의 나이로 첫 교단을 밟았을 때와도 견줄만했다. 나도 내 기분이 왜 이런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럴 때일수록 학교 아이들에게도 잘하고 가정에도 더 충실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일찍 귀가했다. 대통령보다도 더 무서운 아내가 환히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태그:#전교조, #학교 아이들 ,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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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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