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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화(운우도첩 중), 전 김홍도, 18세기 후반, 종이에 담채, 28.0x38.5cm, 개인소장 -<명작순례> 114쪽-
 춘화(운우도첩 중), 전 김홍도, 18세기 후반, 종이에 담채, 28.0x38.5cm, 개인소장 -<명작순례> 114쪽-
ⓒ (주)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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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동해안 일출을 찍겠다고 강원도 양양 앞바다로 몇 차례 출사를 다녔습니다. 그때 속초에서 활동하시는 김욱이라는 사진작가 분을 만났습니다. 지금은 연세 일흔이 넘은 어르신으로 설악산과 동해안 풍광만을 찍는 전문 사진작가셨습니다.

몇 번째 뵙던 어느 날, 그분께서는 일출을 찍을 거면 다음날 새벽 당신을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다음날 새벽, 바다서 떠오르는 태양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닌가 하는 의아심을 품은 채 그분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분께서 안내한 곳은 평소 일출사진을 찍던 곳에서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움직여 소위 포인트라는 곳에 도착해 조금 기다리니 캄캄하기만 했던 동녘하늘이 열리고, 검푸른 빛을 띠던 바다가 붉게 물들며 아침 태양이 솟았습니다.

같은 태양이지만 달랐습니다. 일출을 보는 안목이 달랐습니다. 지금껏 보아왔던 일출과 김욱 작가께서 안내해 준 곳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느낌도, 장관도, 감탄도, 배경도 달랐습니다. 몇 차례 보아왔던 일출이 침묵 속의 일출, 어둡기만 했던 바다에서 붉은 태양 하나가 아무런 꾸밈없이 불쑥 솟아오르는 장관이 자아내던 단조로운 감탄이었다면 김욱 작가가 안내해 준 곳에서 맞이한 일출에는 배경을 품고 있는 조화로움, 풍광과 어울리며 뭔가를 끊임없이 연출해내는 스토리텔링이 뜨거운 아름다움과 감동으로 담겨있었습니다. 

어등을 밝힌 채 조업중인 배, 기암절벽의 낙락장송, 천 년의 역사를 안고 있는 의상대... 동해의 아침을 조명하는 일출은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풍광들을 조화롭게 품어내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해가 떠오르는 방향이 연중 지속적으로 달라지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그런 일출을 찍을 수 있는 건 일 년에 고작 사나흘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언제쯤엔 어느 쪽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어떤 풍광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걸작을 연출하는지 훤하게 꿰뚫고 있었습니다. 이맘때의 일출은 어디서 봐야 가장 아름답고, 저맘때의 일출은 언제 어디서 봐야 가장 장관이라는 걸 두루 섭렵하고 계셨습니다.

그 분이 보여준 건 단지 동해안 풍광만이 아니었고,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만도 아니었습니다. 일출을 보는 안목이었습니다. 같은 일출을 보더라도 어떤 안목을 가지느냐에 따라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아름다움,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환희가 천양지차라는 걸 실감한 경험이었습니다. 

유홍준 교수가 틔워주는 안목

<명작순례>┃지은이 유홍준┃펴낸곳 (주)눌와┃2013.11.15┃1만 8000원
 <명작순례>┃지은이 유홍준┃펴낸곳 (주)눌와┃2013.11.15┃1만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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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순례>(지은이 유홍준, 펴낸곳 (주)눌와)는 문화재청장을 역임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현재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에 재직중인 유홍준 교수가 조선시대 대표적인 서화 49점을 중심으로 명작의 내력과 거기에 깃든 예술적 가치를 해설한 내용입니다. 

책이 소개하는 49점의 서화 중에는 박물관이나 전시회, 다른 책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작품이 있습니다. 반대로 개인이 소장하고 있어 접할 기회가 거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책에는 그동안 가치를 몰랐던 명작, 그 명작들에 드리운 아름다움, 새기지 못했던 감흥, 가늠하지 못했던 가치를 제대로 느낄 수 있도록 안목을 틔워주는 설명, 길라잡이가 돼주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책에서는 조선 전기와 후기, 말기의 내로라하는 명작들은 물론 사경과 글씨, 왕실의 그림과 글씨 까지 아우르며 설명하고 있어 명작에 대한 지식도 넓혀줍니다. 

"유럽 중세의 춘화는 나이브 페인팅에 가까운 순진한 것이고, 바로크·로코코 시대의 춘화는 궁중화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프랑스 혁명기에는 일러스트레이션이 많다. 19세기 리얼리즘 시대에는 귀스타브 쿠르베가 레즈비언을 그린 <게으름과 음탕>, 여자의 성기를 클로즈업한 <세계의 기원>이라는 작품이 있고, 20세기에는 피카소, 고갱, 에곤 실레,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이 그들의 개성적인 예술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동양의 춘화로는 성희의 갖가지 자세가 무술염화 허풍처럼 기묘하게 그려진 중국의 춘궁화(春宮畵), 과장된 성기 묘사로 이미 정평 있는 일본의 우키요에(浮世會)가 여러 점 출품되었다. 그런가 하면 인도의 춘화는 거의 다 요가를 연상케 하는 동작의 성희로 일관되어 있고, 몽골의 춘희는 한결같이 말 타고 달리면서 마상에서 성교하는 그림들이다. 그림마다 민족적 특성을 그렇게 반영하고 있다." - <명작순례> 114쪽.

한쪽 눈을 감고 양손을 쭉 뻗어 손가락 끝을 맞대 보면 잘 맞지 않고 조금씩 어긋납니다. 양 눈을 뜨고 할 때는 척척 맞던 손가락이 앞뒤로 약간씩 어긋나며 자꾸 헛손질을 하게 됩니다. 한 눈으로만 보면 원근감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명작도 그렇습니다. 외눈박이 눈으로만 보는 춘화는 음화(淫畵)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예술성을 갖고 있는 춘화는 예술의 한 장르, 에로틱 아트로 분류돼 세계적인 전시회에서 전시되기도 합니다.

명작 순례자들을 위한 지팡이

어떤 사물을 두 눈으로 본다는 건 눈의 숫자만 많아지는 게 아니라, 사물을 제대로 살피는 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가 어떤 눈으로 뭔가를 보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걸 보는 건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아는 만큼만 보입니다. 책에서는 각 나라의 춘화들의 특성들까지도 설명하고 있어 조선시대의 춘화들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안목을 틔워줍니다.

"이 복숭아는 꽃이 피는 데 삼천 년, 열매가 맺히는 데 삼천 년, 열매가 익는 데 삼천 년이 걸린다고 한다. 한나라 때 동박삭(東方朔)은 곤륜산에 몰래 들어가 천도 열 개를 훔쳐 먹고 삼천갑자三千甲子(60년 x 3천 =18만 년)를 살았다고 한다. 서왕모는 요지의 천도복숭아를 익힐 때면 신선들을 모아서 잔치를 벌였다. 주(周)나라 목왕이 천하를 평정하고 세상을 주유하다 서왕모의 생일인 음력 3월 3일 삼짇날, 서왕모를 찾아 요지에 갔을 때 대접받은 것도 천도였다. 이를 그린 것이 <요지연도>다." -<명작순례> 258쪽-

난초, 조희룡, 19세기 전반, 종이에 수묵, 22.5x26.7cm, 개인소장 -<명작순례> 149쪽-
 난초, 조희룡, 19세기 전반, 종이에 수묵, 22.5x26.7cm, 개인소장 -<명작순례> 149쪽-
ⓒ (주)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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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보는 왕실의 의례용 도장이고 국새는 제국의 상징이니 형식은 같아도 의미는 전혀 다르다는 걸 인식할 때쯤이면, 조선시대의 명작을 보는 눈이 조금은 분명해지고 밝아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명작이야 말로 아는 만큼 보입니다. 모르고 보면 그냥 그림이거나 글씨에 불과하지만 알고 보면 감탄을 자아낼 서정적 극치의 아름다움과 보석보다도 값진 실물적 가치가 보입니다. 그러기에 명작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명작을 보는 안목을 길러야합니다.

등 굽은 어르신에겐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식보다 당장 짚을 수 있는 지팡이가 더 효자일 수도 있습니다. 눈이 침침해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는 안경이 보약이고 효자입니다. 유홍준 교수가 <명작순례>를 통해 들려주는 설명이야 말로 조선시대의 명작들을 둘러보고자 하는 이들의 발걸음을 도와주는 지팡이, 침침하게만 보이던 명작을 또렷하게 볼 수 있도록 안목을 툭 틔워주는 고품질 명품 안경이 될 듯합니다.

덧붙이는 글 | <명작순례>┃지은이 유홍준┃펴낸곳 (주)눌와┃2013.11.15┃1만 8000원



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유홍준 지음, 눌와(2013)


태그:#명작순례, #유홍준, #(주)눌와, #김홍도, #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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