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당시 완행열차로 이용되던 비둘기호. 10시간은 족히 걸렸던 상경길.
 당시 완행열차로 이용되던 비둘기호. 10시간은 족히 걸렸던 상경길.
ⓒ wikipedia

관련사진보기


50년도 훌쩍 넘은 오랜 세월 전. 서울에서 보냈던 생활들이 떠오른다.

"사람은 서울로, 망아지는 제주로 보내야 한다."

당시 유행하던 말이다. 사춘기 시절의 나는 시골에 처박혀 살기보다는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당시 자식을 서울로 보내기까지는 큰 결단이 필요했다. 일단 학업을 접어야 했고, 부모 형제들과 이별해 사는 게 큰 문제였다. 그러나 내 나이 열일곱, 상경을 결심했다.

"사나이 한 번 결심을 누가 막을 수 있느냐."

나는 당당하기만 했다. 서울 출발 일 주일 전 선산의 선대 산소를 다녀와 부모님께 큰절을 올렸다. "무모한 짓인지는 나중 결과를 보면 된다"고 부모님께 말했다. 때마침 방학이라 잠깐 서울 친구 집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부모님은 "서울에서 잘못하면 코도 베어 간다 더라"며 조심을 당부하셨다.

서울행 밤 열차표를 사서 난생처음 기차에 올라탔다. 그야말로 촌놈의 서울행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이 올 리 없다. 촌놈의 상경은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달랑 서울 사는 사촌누이 주소 하나만 갖고 기차에 올랐다. 역마다 서는 완행열차. 10시간이 넘게 걸렸다.

정신 없는 상경길... 모든 게 신기했다

서울에 도착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숭례문(남대문)이었다. 어릴 적 동무들과 "서울의 남대문에 문턱이 있느냐 없느냐" 내기했던 기억도 났다.

상경 첫 발, 나를 맞아 준 건 거대한 숭례문.
 상경 첫 발, 나를 맞아 준 건 거대한 숭례문.
ⓒ flickr

관련사진보기


누군가 말해주길, "서울역 앞에서 주의할 점은 납치다. 돈이 있게 보이거나 촌놈 티만 나도 어디론가 끌고 가서 다 털리고, 심지어는 강제 노역도 시킨다"고 했다. 조심스럽게 서울로 발을 디뎠다. 수없이 지나가는 시발택시와 호객 소리가 요란했다.

청량리 홍릉의 제기동을 번지수만 보고 찾아갔다. 물어물어 사촌 누나 집을 겨우 찾았다. 연락도 없이 들이닥친 사촌 동생을 맞이하며 누나가 의문의 눈초리를 보냈다. 어린 조카가 셋이나 있었다. 공무원인 매부는 지방 출장 중이었다. "무슨 일로 서울에 왔느냐"는 질문에 친구를 찾아왔다고 둘러댔다.

이틀을 보내고, 더 이상 누이 집에 신세를 지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일단 서울 지리를 익히기 위해 영등포, 동대문, 서대문, 마포, 돈암동, 뚝섬, 종점까지 지상 전철에 몸을 싣고 왕복했다. 전차표는 1회에 2환 50전이었다.

3일째부터는 종로 1가에서 동대문, 청계 1가에서 6가, 을지로 1가에서 동대문 운동장까지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이틀 만에 자리가 생겼다. 잠자고 먹는 것까지 해결해 주진 못했다. 사무실의 좁은 숙직실에서 잠을 청하고, 식사는 따로 사 먹어야 했다.

고용주는 야박한 월급에서 방세까지 까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의 세입자 생활은 시작됐다. 당시 6천 원의 월급에서 2천 원을 월세로 내야 했다. 아침은 값싼 백반으로, 점심은 호떡 빵 2개, 저녁은 다시 백반으로 때웠다. 식대 합계가 2천 원. 나머지 2천 원이 수입이었다.

문제는 애초 계획한 야간 학교에 다니는 일이었다. 고용주에게 처음은 야간학교를 가도록 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방학이 끝나고 6개월이 지났는데도 공부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서울에 와서 돈도 벌고, 공부도 해서 큰물에서 살아보겠다는 의지는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모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는 곳에서 차량을 구입했는데 이를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월급도 많았고 식사도 제공됐다. 집세가 문제였다. 방 한 칸을 사용하는데 월세가 3천 원이나 됐다. 그래도 월 5천 원은 저축이 되니 수입은 상당한 편이었다. 문제는 역시 학교.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결국 다니지 못했다.

역사의 현장, 그 곳에 내가 있었다

1년 6개월 뒤, 3·15 부정선거가 터졌다. 대구와 마산 등지에서 자행된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학생들이 데모를 일으켰다. 당시 나는 서울 생활이 어느 정도 적응됐지만,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해 하향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었다.

그해 4월 6일 서울에서도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일어났다. 나 또한 국회의사당 앞으로 갔다. 야당의원과 당원 3백여 명이 국회를 출발, 시청을 거쳐 을지로에 진입할 때 나도 대열에 들어섰다. 을지로를 거처 종로 4가를 돌아 종로 앞에 이르렀을 땐 대략 6천여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우리는 중앙청 앞까지 진출했다.

상경 후 만난 역사의 현장, 그해의 4월
 상경 후 만난 역사의 현장, 그해의 4월
ⓒ wikimedia

관련사진보기


데모대가 "이제 경무대로 가자!"고 소리쳤다. 그 순간 기마 경찰과 소방대 차가 물을 뿌려 대열이 흩어지고 말았다. 다시 대열을 정리해 국회 앞, 시청 앞, 미도파 백화점 앞 등 여러 군데로 나뉘어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계속했다. 와중에 나는 종로에서 경찰에 연행돼 종로경찰서로 잡혀갔다.

나는 그렇게 불광동 소년원에 위탁, 감방 신세가 됐다. 내가 갇힌 곳은 17호실. 약 5평의 감방에 20명의 소년 범죄자를 빼곡히 집어넣었다. 난생처음 감방 생활이 시작됐다. 학생 시위에 가담해 붙잡혔다고 했더니 감방 안 자칭 '재판관'이 "넌 1주일이면 나갈 수 있다"고 했다.

다음날 감방 안에서 팔씨름 대회가 열렸다. 나는 감방장과 최종 겨루게 됐는데 결국 그에게 져서 부 감방장 대우를 받게 됐다. 철창 안의 감방은 외롭기 그지없었다. 저녁에는 발가벗겨 잠을 재웠고, 용변도 감방 내에서 해결해야 했다. 감방 안으로 들어온 달빛을 보며 서울에 온 것을 후회했다. 처량함과 외로움이 밀려왔다. 그럴 때마다 생각했다.

'나는 죄를 짓고 들어오지 않았다.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젊은이로, 학생으로 가담했다. 이는 역사에 동참한 것이고, 그러므로 지금은 내 인생에 좋은 경험을 쌓는 중이다.'

1주일 후 나는 소년원 재판에서 무죄를 받고 석방됐다. 고모님은 내게 두부를 먹이고 목욕을 하게 했다.

공부를 위해 하향하기로 결정했다. 행장 가방에 저축해 둔 5만 원을 주인에게 마저 털리고 난 뒤, 남은 돈으로 서둘러 밤차를 예약했다. 4월 18일 밤 기차였다. 그날 고려대생 300여 명은 안암골을 나와 국회 앞 농성을 벌인 뒤 을지로 4가에서 임화수, 이정재 등 자유당 수하 깡패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다음날 4·19가 일어났다. 광주역에 도착해 광주 고교생 데모에 다시 합류했다. 서울 경무대로 진격한 학생 시위대 중 126명이 경찰의 발포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만약 하향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그들의 일원이 됐을 터다. 운명이란 그런 것일까?

지독하게 따라다닌 연탄가스... 살아남은 나

4·19 혁명 후, 복학해 학교를 마친 뒤 군에 입대했다. 제대 말년엔 베트남전에도 참전했다. 제대 후 다시 서울 생활에 들어간 나는 누나와 함께 셋방 살이를 시작했다. 부모님도 함께 모셨다.

서울 셋방 살이를 다시 시작하고 나서 연탄 가스에 세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고단한 총각 가장이었던 나는 세 번의 이사를 다녔지만 연탄 가스는 줄곧 생명을 위협했다. 결국 한겨울에 창문을 열고 지내야 했다. 네 번째 전셋집에는 부모와 동생들까지 연탄가스 때문에 혼이 났다. 방세가 싼 셋방이기에 별수 없는 듯했다.

1970년 초에 결혼한 후, 그놈의 셋방 살이를 면하기 위해 노력을 거듭했다. 청량리 행당동 전세살이에서 벗어나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웠다. 브라질 촌으로 유명한 중계동 시유지를 매입해 방 두 칸과 장독, 작은 정원과 변소까지 마련했다. 이젠 내 집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그놈의 연탄가스는 여전히 나를 찾아왔다.

끊임없이 괴롭히던 연탄가스
 끊임없이 괴롭히던 연탄가스
ⓒ wikimedia

관련사진보기


그렇게 단단히 살피며 집을 지었건만 날씨가 궂은 날은 연탄가스가 새어나왔다. 주변에서도 연탄가스로 죽은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그 집에서 애들이 셋이나 태어났다. 부모님과 우리 부부가 연탄에 중독될 뻔했는데 마침 애들이 울어 간신히 산 적도 있다.

벌써 한 세대가 지난 이야기다. 이젠 연탄가스 위험 없는 12층 아파트에서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당시 부모님은 시골 선산에서 영면해 계신다. 젊었던 우리 내외가 이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다. 다시금 떠올린 그 옛날의 추억은 소중하기만 하다.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공모글입니다. 아주 오래 전 추억의 글입니다.



태그:#셋방살이, #연탄가스, #가스중독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